한양취회, 광화문에서 임금에게 상소하다
동학도인들, 공주와 삼례 취회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하늘같은 믿음과 서로가 뜻을 같이하고 행동하면 불가능이 없다는 바다와 같은 거대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동학지도부는 삼례취회 이후에도 관의 탄압이 누그러들지 않자 1892년 11월 12일(음), 향후 대책을 논의하여 결의된 내용을 해월 선생에게 건의하였다. 해월 선생은 각 접과 포에 경통(敬通)을 보내 향후 계획과 행동 지침을 알렸다.
"대선생 신원을 이루지 못했다. 탄압이 더욱 심해질 것 같다. 지목이 심해지면 접에서 소장을 작성해 관청에 제출하고, 큰일은 도소에 알려 의송단자를 올리도록 한다. 큰 뜻을 위해 나섰다가 가산을 탕진한 도인들이 많다. 정성을 모아 어려운 도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광화문 복합상소에 앞선 1893년 1월 초쯤 전봉준은 창의문(倡義文) 즉 의병기포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일본과 서양세력 그리고 청나라 등이 우리나라에 나쁜 일을 마구 저지름에도 이를 막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들 도적의 무리를 무찔러 없애 초멸(剿滅)하고자 한다. 각 고을에서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자를 추천해서 보내라."
전봉준의 창의문 즉 '의병을 일으킨다'는 격문을 보면 이때부터 동학 조직에 있어 호남세력 즉 남접을 중심으로 정치지향적인 독자 노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학지도부는 한양으로 올라가 직접 상소하여 신원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해월 선생은 1893년 1월 초쯤, 청원 산동 용곡에 있는 권병덕 접주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서장옥과 서병학이 찾아와 '대선생의 원통함을 신원하지 못하면 저희 도인들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한양에 올라가서 임금께 상소하겠다'고 하였다.
해월 선생은 '청원 송산의 손천민 집에 취회 본부로 도소를 설치하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하였다. 공주에서 시작된 대선생 신원운동은 삼례를 거쳐 광화문에서 또 재차 취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해월 선생은 손천민에게 상소문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1893년 1월 20일경, 선생은 전국의 접주들에게 경통을 보냈다.
"임금께 상소를 할 것이니 각 포 접주들은 도인들을 인솔하여 2월 10일까지 한양에 모이라."
동학지도부는 2월 1일, 남산 자락의 최창한 접주 집에 임시 본부로 설치한 도소에 모였다. 강시원, 손병희, 서장옥, 서병학, 박인호, 김연국, 박광호 등 지도부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집회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전략을 논의하였다.
한양도소 지도부에서는 대표자 아홉 명을 선출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도인들을 세 곳으로 분산시키도록 하였다. 그동안 집회에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호서의 박광호 접주를 상소를 제출하는 대표인 소두로 정하였다. 또한 박광호 접주를 필두로 손천민, 김낙철, 권병덕, 남홍원, 박석규, 박인호, 임규호, 손병희 등 아홉 명을 대표단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광화문 부근에는 본부 대표단을 비롯해서 지방 대표단 50여 명이 잠입했다. 일반 도인들은 동대문 밖 낙타산 부근과 남대문 밖에 모이도록 하였다. 동학도인들은 긴장과 기대 속에 수백 명씩 무리 지어 본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양취회 참여자 수는 정확한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광화문 외에 흩어져 잠입한 수는 수천 명을 넘어섰다.
양지바른 곳에는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때 이른 꽃들이 막 피어나려는 2월 10일(음)의 화창한 초봄이었다. 저녁 무렵, 대표단은 기도식과 함께 상소의 성공을 기원하는 봉고식을 거행했다. 이어 11일 아침 일찍 대표단 9인과 지방 대표 40여 명은 의관을 정제하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에 도착한 대표단은 광화문 앞 길가에 각자 돗자리를 깔고 빨간색 보자기에 싼 상소문을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박광호 접주의 주도로 상소 예식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게 거행되었다. 문필이 뛰어난 손천민이 작성하고 법헌 최시형이 감수한 상소문의 요지는 이러했다.
"최근에 살펴보면 올바른 선비는 많지 않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수운 대선생께서 하늘의 뜻으로 도를 깨달아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쳤습니다. 그 후 3년 만에 못된 학문으로 몰려 대구감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백옥처럼 작은 흠집도 없는 큰 진리가 뜻밖에 불행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동학은 유학에 비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바른 도리입니다. 부모님을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말씀이 어찌 바르지 않겠습니까. 동학은 동학이고, 서학은 서학인 바 어찌 동학을 서학으로 모함하여 빼앗아 가고 잡아 가두는 탄압을 합니까.
수운 대선생은 옛 성현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가르침을 다시 밝혀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리와 근본을 다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있다면 감히 임금을 속이는 것인데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천지부모 은덕으로 신들의 스승을 억울하고 분한 죄목에서 풀어 주소서. 끝으로 감영이나 고을에서 죄 아닌 죄로 벌을 받고 귀양 간 도인들의 생령을 살려 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쉽게 보기 드문 백성들의 움직임에, 대궐 문을 출입하는 대관들과 외국인들은 취회 광경을 목격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였다. 집회가 시작되자 광화문 앞에 자리한 지도부는 땅바닥에 엎드려 수운 대선생 신원과 동학 공인을 호소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밖 등지의 수천의 도인들도 제각각 주문을 외우고 구호를 외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전하, 대선생의 억울한 죄목을 풀어 주소서!"
"전하, 동학의 자유로운 포덕을 허락하소서!"
"전하, 백성을 구하시고 부패를 척결하소서!"
"전하, 서양 세력과 일본 세력을 몰아내소서!"
동학도인들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적극성을 띠며 커져 갔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조용히 상소문을 싸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정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이틀이 지나도 도인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자 13일 오후쯤에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소원을 베풀어 주겠노라"는 성의 없는 한 마디를 전했을 뿐이었다. 이에 격분한 도유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를 더욱 격렬하게 진행하였다.
이렇듯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정부를 더욱 긴장시키는 특이한 일이 있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호남 일대에 벽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괘서(掛書) 사건에 전봉준이 개입되었고 또 직접 지은 벽서도 있었다. 그 글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포악한 정치를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등이었다.
한양과 충청도에서도 벽서 사건이 터졌는데, 서양 공관과 외국인 거리, 일본 상려관(商旅館)에도 경고문이 내걸렸다. 한양에 있는 서양 공관과 일본 상려관에 붙은 괘서의 내용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빨리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으로, 척양척왜의 강력한 경고였다. 이러한 벽서 사건 즉 괘서 사건들은 광화문 복합상소 집회가 끝난 후에도 한 달 이상 지속되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대선생 신원운동은 2월 13일을 끝으로 3일 만에 접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한양과 지방의 괘서 사건들은 속속 정부에 보고되었다. 동학 지도부에서 올린 상소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회를 지켜보던 조정에는 유생들의 반(反)동학 상소가 빗발쳤다.
"요즘 동학당들의 최제우 신원운동은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짓들입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한 명의 역적 최제우가 열 명이 되고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저들의 세력은 더욱 커져 수십만 명의 최제우로 둔갑하여 나라를 전복하려 할 것입니다. 속히 엄단하시어 그 싹을 뽑아 화근을 없애야 합니다."
유생들의 상소는 물론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대책을 서둘렀다. 급기야 형조와 각 지방관청에 난동을 부리는 동학 비적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한양성 내의 외국인들은 동학도인의 복합상소 취회와 괘서 사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조선 정부에 보호 대책을 강구해 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자국에 군대 파견까지 요청하였다.
일본은 한강과 인천을 왕래할 선박을 준비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고, 3월 1일 군함 팔중산호를 인천항에 정박시켰다. 중국은 3월 8일 군함 정원호와 내원호 두 척을 인천에 몰고 와서 일본을 견제하는 한편 자국민 보호에 나섰다.
또한 서양세력을 반대하며 몰아내야 한다는 괘서의 내용에 미국과 영국도 비상이 걸렸다. 미국은 군함 피트레루호를 출동시켰으며, 영국은 항해 중인 순양함 세방호를 인천항으로 향하게 했다. 각국은 동학의 본격적인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편으로는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품고 군함을 동원하고 있었다.
한양 복합상소 취회를 통해 백성들은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이며 역사 창조의 주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복합상소의 신원운동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했지만, 동학도인들의 사기는 나날이 높아졌고, 정부와 외세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또한 일본과 중국은 물론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세력들까지 크게 놀라게 하는 등 동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한양에서 흩어진 동학도인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도인들은 몇 번의 집회를 통해 뼈아픈 경험을 했다. 중앙정부나 지방의 관리들은 동학지도부와 한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것, 또한 동학도인들의 집회가 끝나면 가차(假借)없는 탄압이 반복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예상한 대로 관군의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해월 선생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빛을 발하면서 손병희에게 지시를 내렸다.
"손대접주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재산이 넉넉한 도인들에게 돈을 거출하여 관료들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접주와 도인들이 안전하게 석방되도록 하라."
해월 선생은 동학 접주들과 도인들이 관아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하면,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에 나서는 건 물론이고 고생하는 제자들과 똑같이 힘든 생활을 자처하였다. 추운 겨울에도 방에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불도 덮지 않고 냉골에서 떨면서 자곤 하였다. 식사도 감옥에 갇힌 제자들을 생각하며, 하루 한 끼만 먹었다. 반찬 역시 수감 생활을 하는 제자들의 음식처럼 차려 겨우 허기만 면하는 정도의 식사를 하였다.
해월 최시형 선생
감옥에 갇힌 제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제자들이 석방된 후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