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나이에 아무나 하기 어려운 나라의 원수를 죽이고,
일제의 감옥에서도 당당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밝히고,
갖은 회유와 협박도 겁내지 않으면서 기개를 보이고,
동양과 세계인을 위하여 '동양평화론'을 제기하였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흑점이 있어 아명을 응칠이라 지었다. 가문은 무반의 호족으로서 대대로 해주에서 세력과 명망을 이어온 집안이다.
할아버지가 미곡상 경영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해주·봉산·연안 일대의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황해도에서 두 세번째 가는 부자가 되었다.
부자 할아버지는 재산을 배경으로 아들들에게 과거를 보게하여 둘째 아들 안태현은 초시에, 셋째 아들 안태훈은 진사에 합격하였다. 안태훈이 바로 안중근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한 때 동학농민혁명이 국가에 대한 반란이라고 생각하고,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안태훈은 김구가 동학의 소년 접주로서 일본군과 싸우다 패했을 때,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오기도 할 정도로 의협심이 높고 나라 일을 걱정하는 우국의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사냥과 말타기를 즐겨하고 무예를 익히는 일에 열중했다. 무과 급제자만 7명을 배출한 무반 가문의 혈통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정의감과 남아다운 호기를 갖고 자랐다. 그렇다고 글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16세 때 부모님이 정해주신 김아려와 결혼을 하고 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안중근의 가문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믿게 되고, 안태훈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청계동 성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안태훈 가문과 청계동 천주교 성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관가의 탄압이 심해졌다. 정부의 지방 기관이 명분이 없는 세금을 물리고 말을 듣지 않으면 끌어다가 매질을 하기 일쑤였다.
안중근은 서울로 뮈텔 주교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천주교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안중근이 천주교전교 활동을 하는 동안 나라의 사정은 대단히 어려워져가고 있었다.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안중근은 1905년 중국으로 떠났다. 해외에서 동포들에게 나라의 사정을 알리고 일제와 싸울 것을 호소했다. 그런데 여행 중에 갑자기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 진남포로 이사한 안중근은 먼저 학교를 세웠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자 이번에는 조상들로부터 물려온 재산을 팔아 중등수준의 교육기관인 삼흥학교를 설립했다. 안중근의 교육사업은 1906년 봄부터 이듬해 8월 망명하기 전까지 1년 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모든 재산을 팔아 교육사업을 벌이고, 국제정세와 군사교련, 민족의 역사를 통해 인재를 키웠다.
안중근이 해외 망명을 뜻하고 서울에 올라와 명동성당 근처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의분에 넘친 한국군이 일본군과 싸우다가 희생되는 현장을 지켜보게 되었다. 일본군은 신식 소총인데 한국군은 구식소총이거나 대부분이 빈손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07년 8월 1일, 만주 간도에 도착하여 동포들을 찾아보고, 얼마 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당시 이곳에는 유인석·홍범도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이 지역 한인들이 조직한 별도의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들을 도와주고 있는 이범윤·최재형 등 한인 지도자들과 만났다.
이곳에 터를 잡은 안중근은 각계 한인 지도자와 교포들을 만나 나라 사정을 알리고 의병부대 조직에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그의 성실성과 진심이 유지들과 교포 청년들에게 알려져서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의병부대 참모장이 된 안중근은 출전했지만 전투는 쉽지 않았다.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심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일본군 여러 명을 사살하고 수비대 진지를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연합부대 전체로는 괴멸상태였다.
안중근은 설 땅이 없었다. 지역의 유지들도 더 이상 의병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교포들이 사는 산간·해변 마을을 찾아다니며 재기를 도모했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 러시아령 크리스키노 쮸카노바 마을에서 구국의 뜻을 같이 하는 청년 동지 11명과 '단지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나라를 찾기위해 새끼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하늘에 맹세했다.
안중근의 항일전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의병전으로는 대규모의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을 던져 일제를 괴멸시키는 의열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권총을 준비하고 이토가 지나는 철도를 따라 길을 나섰다. 여관에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시 한 편을 지었다. <장부가>이다.
장 부 가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어느 날에 과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기하여 한 번 지나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룰 지어다
쥐도적 OO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 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동포로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5일 마침내 만주 하얼빈에 도착했다. 다음날 이토가 러시아 정부 고위층 인사와 만나기 위해 하얼빈역에 내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26일 오전 9시 15분 경에 이토는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역에서 내려 환영장으로 들어왔다. 일본 교포, 구경 나온 러시아인 등 수 천명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때를 맞춰 군악대의 환영곡이 울려 퍼지고 일장기(일본국기)를 높이 든 일본인들의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이토는 러시아 재정대신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군의 사열대 앞으로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나왔다.
이때 안중근의 권총이 불을 토한다. 이토의 가슴을 향해 연속 세 발을 발사했다. 어릴적부터 명사수였던 그의 총탄은 어김없이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 이토의 가슴에 명중되고 그는 현장에서 고쿠라져 숨을 거두었다.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붙잡혀 일본군에 인계되었다. 일본은 일본군이 점령한 다이런에서 재판에 회부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될 줄을 알면서도, 조금도 두려움없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당당하게 밝혔다.
먼저 이토가 저지른 죄상 15가지를 제시했다.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을사늑약 등을 체결한 죄, 군대를 해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등을 낱낱이 열거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재판을 받는 동안 밤을 새워 <동양평화론>을 썼다. 검사의 질문에서 이토의 죄상을 밝힘과 더불어 자신의 의거가 동양평화를 짓밟는 이토를 제거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주의 정책을 멈추도록 하겠노라는 진술을 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한·중·일 3국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2. 3국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만든다.
3. 3국 청년들의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한다.
재판은 각본대로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재판을 받을 때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당당하게 이토 처단의 이유를 밝히고 동양평화론을 전개했다. 한국인은 물론 이를 전해 들은 중국·러시아와 일본인들 중에서도 존경하고 구명운동을 펴는 사람이 있었다. 안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했다. 나이 31세였다.
사형집행 전 안중근은 감옥에서 면회온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광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의사의 유해는 해방 80주년이 되도록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 뤼순공원 어디쯤에 묻혔던 것인지, 간악한 일제가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성지'가 될 것이 두려워 다른 어데다 암장, 또는 화장해서 허공에 날려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