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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동학 삼례 취회와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장소인 당시 삼례역참 인근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약사광장'이 조성되어있다. 본 사진은 삼례 역사광장을 사면(4곳)으로 나뉘면 한 방향에 해당된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동학 삼례 취회와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장소인 당시 삼례역참 인근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약사광장'이 조성되어있다. 본 사진은 삼례 역사광장을 사면(4곳)으로 나뉘면 한 방향에 해당된다. ⓒ 동학혁명기념관

삼례취회, 탐관오리를 처단하라

[교조신원운동은 수운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것에서 한층 더 높게 요구 내용이 진화한다. 동학 접소의 허가와 탐관오리들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부정부패의 관리들인 탐관오리의 처단 요구는 종교적인 문제를 뛰어넘어 정치적인 문제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선언이다.]

충청도 감사를 상대로 신원운동을 전개한 지도부는 재차 신원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1892년 10월 25일경(음) 전라도 삼례에 동학 본부인 도회소를 설치했다. 전주와 가까운 삼례는 이명로 접주 등 많은 도인들이 사는 곳이었고, 교통·통신 기관인 역참(驛站)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삼례 교조신원운동의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지도부는 10월 27일(음) 삼례도회소 명의로 각 포·접에게 통문(通文_여럿이 돌려가며 보는 통지문)을 보냈다.

'지금까지 30년이나 죄지은 사람처럼 숨어 살아왔다.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에게 소원하려 함은 대선생의 신원을 위해서이다. 각 포(包) 대접주와 접주들은 도인들을 인솔하여 10월 29일까지 삼례역참에 모이라.'

추수가 끝난 초겨울 삼례의 텅 빈 들녘에 수많은 동학도들이 몰려들었는데, 공주집회 때보다 그 수가 더욱 많았다. 수천을 헤아릴 정도의 도인들이 모두 의관을 정제하여 들판은 온통 하얀 옷으로 가득찼다. 야간 집회에는 어김없이 횃불과 관솔불이 등장하여 참여 인원을 더욱 많아 보이게 하였다.

충청도 도인들은 물론 전라도 도인들까지 대거 동참했다. 원평의 김덕명, 태인의 김개남, 무장의 손화중, 주산의 최경선, 전주의 서영도, 남원의 유태홍, 임실의 이병춘, 부안의 김낙철, 장흥의 이방언 등의 대접주와 접주들은 각 포·접 조직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특이한 점은 삼례 취회(聚會_회합, 모이다)부터 전봉준 접주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동학도인들은 일제히 동학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외웠으며, 간간이 '대선생을 신원하라!' '동학 접소를 허가하라!'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야말로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하얀 옷의 파도였다.

전라감사(全羅監司_전라도의 으뜸가는 벼슬) 이경직(李耕稙)은 관료들의 잘못된 정보와 부적절한 상황 판단으로 동학 지도부와 신경전만 벌이는 무능함을 보여주었다. 전라감영에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밀정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동학도 수천 명이 삼례에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동비들 수천 명이 합창으로 주문을 외우며, 천지가 진동하는 듯 구호를 외치면서 삼례역참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삼례취회도 공주에서처럼 강경파인 서장옥과 서병학 등이 앞장서 주도하고 해월 선생이 총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런데 해월 선생은 삼례로 오던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해월 선생은, "함께하려고 했는데 못 가게 된 것을 참으로 부끄럽게 여긴다"는 말을 삼례도회소에 전달했다. 그리하여 해월 선생을 수행하던 수제자들과 측근들도 삼례취회에 동참하지 못 했다.

전봉준 의송단자 전라감사에게 전달 삼례취회부터 전봉준 동학 접주가 전면에 등장한다.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과 유태홍은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동학 청원문 의송단자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림 중앙 왼쪽이 전봉준 접주, 오른 쪽이 유태홍 접주이다. ‘대선생을 신원하라!’ ‘동학 접소를 허가하라!’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라!’ 당시 삼례 취회, 교조신원운동은 수천 명이 운집하여 조선을 뒤흔든 엄청난 시위와 집회를 진행하였다. 그림은 박홍규 화백이 삼례취회와 의송단자 전달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전봉준 의송단자 전라감사에게 전달삼례취회부터 전봉준 동학 접주가 전면에 등장한다.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과 유태홍은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동학 청원문 의송단자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림 중앙 왼쪽이 전봉준 접주, 오른 쪽이 유태홍 접주이다. ‘대선생을 신원하라!’ ‘동학 접소를 허가하라!’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라!’ 당시 삼례 취회, 교조신원운동은 수천 명이 운집하여 조선을 뒤흔든 엄청난 시위와 집회를 진행하였다. 그림은 박홍규 화백이 삼례취회와 의송단자 전달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 박홍규

동학지도부에서 작성한 의송단자를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전달하는 책임자로 전봉준 접주와 유태홍 접주가 결정되었으며, 청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신년에 수운 대선생께서 동학(東學)을 창도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한울님인 천주(天主)를 공경한다는 이유로 수운 대선생을 서학으로 모함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30년이 되도록 숨어 살며 세상에 드러나지 못함은 신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학의 참된 가르침을 몰라 서학(西學)으로 지목하나, 이미 서학에 대한 지목은 해제되었는데 어찌 동학만을 배척한단 말인가?

지방 수령들이 동학을 서학으로 모함하여 우리 도인들을 잡아가두고 매질로써 돈과 물건을 강제로 빼앗으니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처지다. 재산이 넉넉한 백성들도 억눌리고 빼앗기니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떠돌이로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나라의 백성으로서 동학을 하는 뜻은, 스스로 허물을 고쳐 새사람이 되어 한울님을 공경하고, 임금님에게 충성하며, 스승님과 어른을 존경하여 받들고, 부모님께 효도하자는데 있다.

우리가 수도(修道)하여 한울님께 축원하는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뿐이다. 억울함을 견디다 못해 피눈물로 호소하니, 영감께서 덕을 베푸시어 상감께 글을 올려 동학이 참된 도리라는 것을 드러나게 해 주시길 천만번 간절히 소원한다.'

동학지도부가 전라감사에게 보낸 상소문(청원문)인 의송단자(議送單子)의 내용은 당시 동학이 탄압받았던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려는 것으로, 민심을 그대로 전달한 솔직하고 담대한 청원의 글이었다.

전봉준은 이때부터 동학도인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새로운 지도자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경직은 어떠한 해결책도 내놓지 못 하고, 궁리만 거듭하면서, 결국은 그들이 스스로 해산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동학지도부는 6일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7일 만에 답변을 독촉하는 전문을 감사에게 보냈다.

'의송단자를 올린 지 6일이 지났다. 합하(閤下_정일품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던 말)의 처분을 기다리면서 계속 찬바람을 맞아 가며 길가에 노숙하고 있다. 이 시간에도 각 고을의 수령과 관료들이 동학도를 수탈하고 있다. 거의 죽어 가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임금님께 상소하여 대선생의 숙원을 풀게 하여 달라.'

이경직은 동학도들이 곧 해산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측이 빗나가고 그들이 완강히 저항하자, 9일째 되는 날에 제사(題辭, 소장에 대한 판결)를 보냈다. 제사의 요지는 "이단의 무리들인 동학도와 협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상의 해산 명령이었다.

동학도인들은 일심 단결하여 더 적극적으로 위력을 과시했다. 이경직 감사는 영장(領將_지방관아의 장교) 김시풍에게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가서 동학도인들을 강제해산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감영군이 곧 몰려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지도부는 전열을 가다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영장 김시풍은 완전무장을 한 병졸 수백 명을 이끌고 마침내 동학도인들이 운집한 들판에 다다랐다. 삼례 남천을 사이에 두고 김시풍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살기를 느꼈다. 또한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처음에는 1~2천 명이 모였는데, 시방은 3~4천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번에 의송단자를 들고 온 차돌 같이 생긴 전녹두(전봉준)라는 자가 범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영장 김시풍은 그만 동학의 기세에 눌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김시풍은 순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대들의 의견을 모아 사또께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김시풍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병졸들을 이끌고 퇴각하여 감사에게 '그들을 잘못 건드리면 폭동으로 돌변할 것 같다'고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이경직 전라감사는 고심 끝에 동학을 금한 것과 대선생의 신원 문제는 정부의 일
이라는 핑계로 빠져나가며, 11월 11일에 감결(甘結_하급기관에게 보내는 공문)을 내렸다.

'이제 들으니 각읍 관리들이 동학을 엄중히 금하는 것을 이용하여 돈과 재물을 약탈한다 하는데, 나라의 법대로 하면 될 것을 어찌 재물과 돈을 탐하게 되었는가! 감결이 도착하는 즉시 경내에 명하여 한 푼이라도 탈취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공주취회에 이어 삼례취회도 나름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대선생 신원 문제와 동학을 나라에서 인정하는 공인 문제는 숙제로 남게 되었다. 동학 지도부는 조정에 대선생 신원과 동학의 공인을 직접 상소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한양취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동학 취회
삼례 교조신원운동
밤길, 이슬길, 새벽길
이웃의 눈을 피해 그 무엇인가
비밀리에 추진했던 전봉준
그가 이제 의로운 일에 앞장서며
백성들 앞에 본격 등장한다.
의송단자 청원문을 손에 쥐고
우리는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원할 뿐이라고 전라감사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동학의 역사는 물론이고
민족사, 민중사에 빛나는
전봉준의 등장은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생명의 빛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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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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