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의 비기를 꺼내다
손화중이란 인물, 호남 최대의 동학 세력을 갖고 훗날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다. 동학대접주 손화중 장군이 유명세를 떨치고 거대 조직을 통솔하는 대두령이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선운사 도솔암의 비기를 꺼낸 사건이다.
1892년 8월 초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울창한 숲이 더욱 짙어질 무렵, 초산(楚山) 손화중 포(包)를 중심으로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을 계획하였다. 손화중은 고창 선운사 뒤 도솔암 석불의 배꼽에서 비기(秘記) 즉 비결록을 꺼내기로 하였다.
도솔암 석불의 비기를 탈취한 사건은 손화중과 관련된 이야기로 전해 온다. 예전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꺼내려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쳐 후딱 뚜껑을 덮었다는 검단선사의 비결록 이야기는, 그 비기(秘記)가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손화중 접주가 진짜 꺼냈는지 소문만 무성했는지 모르지만 훗날 한양은 정말 망했다.
손화중은 정감록 비결과 미륵불 신앙을 동학으로 연결하는 발상으로 민중들의 염원에 또 한 번 불길이 타오르게 하였다. 그 후 도솔암 석불의 비기를 탈취한 이야기는 입소문에 의해 사방팔방, 방방곡곡으로 퍼져 손화중포는 전라도에서 가장 큰 거대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혁명전야, 교조신원운동
[동학 도인들은 쫓기고, 탄압받고,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동학 교조의 억울한 죽음으로 비롯된 것이라 깨달았다. 그래서 교조신원운동은 동학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똑바로 된 사회를 이룬다는 확신이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영해 교조신원혁명운동
동학 1세 교조 수운 최제우 순도 이후, 2세 교주 최시형의 지도로 동학은 다시 그 세력을 회복, 더욱 신장시켜 나갔다. 동학의 세력은 점점 확장되어 갔지만,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반대급부로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수운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풀고 동학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신원운동(伸寃運動)은 이필제 접주가 해월 선생에게 제안하여 1871년 10월 3월 10일(음력) 영해에서 기포한다. 해월 선생은 단양, 영해, 영덕, 연일, 경주, 영천 영양, 안동 등 16개 고을 접주들에게 기포하라는 격문을 보냈다.
이필제 접주는 평화적인 취회를 접고, 무력기포를 감행, 동학혁명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동학혁명은 최초 영해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느정도 일리있는 말씀이다). 이필제는 동학도인들을 이끌고 영해현으로 쳐들어가 부사 이돈을 살해하고 일단 일월산으로 피신하여 향후 대책을 세워갔다.
그러나 그해 8월 다시 문경에서 기포를 준비하려다가 관군에게 체포되어 무참히 처형되었다. 동학은 그야말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고 수많은 도인들이 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영해 교조신원혁명운동의 여파로 동학에 대한 탄압은 경상도 일대를 벗어나 충청도, 전라도로 확대되었다.
공주취회, 대선생을 신원하라
전라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동학의 마당포덕이 활성화되면서 동학도인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나자, 동학에 대한 탄압도 또다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그중에서도 탄압이 심한 곳은 호서(湖西, 충청)의 영동, 옥천, 청산, 호남(湖南, 전라)의 무장, 고창, 정읍, 금구, 만경, 여산 등지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여러 곳에서 관료와 유생들이 동학도인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재력가이며 세도가인 토호 세력의 횡포가 더 극성스러웠다. 도인들은 빼앗기고 쫓겨나고 떠돌다가 1892년 5월 말쯤, 보은 장안(장내리) 동학 본부인 대도소(大都所)로 몰려들었다.
극심한 탄압에 함부로 휘둘림을 당하던 동학도들은 '수운 대선생의 원통하고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버린다'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통해 동학을 정부로부터 공인받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 여겼다. 7월로 접어들자 교조신원운동은 충청도 공주에서부터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라도의 큰 동학 세력과 연결된 서장옥을 비롯하여 충청도에서 막강한 활동을 하던 서병학·황하일 등에게서 대선생 신원운동의 청원을 받은 해월 선생은 신원운동 추진을 전제로 접주들의 회합을 소집하였다.
해월 선생은 지도부와 접주들에게 신원운동에 대해 '수운 대선생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억울한 죄를 씻고, 동학의 공인을 요구하는 의로운 일이니만큼 털끝만치의 위력이라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비폭력평화집회를 당부하였다.
수운 선생 순도 28년, 영해 교조신원혁명운동 21년 뒤 1892년 10월 20일(음)에 다시 교조신원운동을 공주에서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을 상대로 개최하기로 하였다.
청주 송산 손천민의 집에 도소를 설치하고, 동학 도차주(道次主) 강시원을 중심으로, 손병희·손천민·김연국·박인호·임규호·서장옥·서병학·조재벽·황화일 등 십여 명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해월선생은 10월 17일 '신원의 방법을 찾으라'는 내용의 입의통문(立議通文, 여럿이 돌려 보는 문서)을 각 포·접 지도부에게 보냈고, 이로써 운동의 개시가 공포되었다. 10월 20일경, 공주에 모인 동학도 1천여 명은 지도부의 주도로 역사적인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공주취회(公州聚會)라 불리는 이 운동에는 내부적으로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강경파인 서장옥·서병학·황하일을 중심으로 반란의 불꽃을 지피는 흐름이었고, 또 하나는 온건파인 손병희·손천민·김연국을 중심으로 한 평화 시위의 흐름이었다.
그날 늦가을 서리에 낙엽이 우수수 지고, 초겨울 찬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윙윙거리는 10월 21일(음)이었다. 동학접주 서장옥·서병학·황하일을 비롯하여 대표단 일곱 명이 의관을 정제하고 앞장서서 관아에 나아가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보내는 의송단자(議送單子_고을 관찰사에게 건의하는 상소문)를 전했다.
동학 역사에서 의송단자를 공개적으로 올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찰사 조병식과 관료들은 뜻밖의 사태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관문 앞에 운집한 1천여 명의 동학도인들은 동학의 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합송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취회를 진행했다.
밤에는 수많은 횃불과 관솔불, 등불이 물결을 이루며 집회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지도부의 의연한 태도와 당당한 모습에 조병식과 관료들은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동학지도부에서는 보낸 청원문과 협상안의 내용은 간단하였다. 수운 대선생의 신원과 동학 활동의 자유 보장이었다. 이는 수운 대선생의 명예회복과 동학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원들이 동학도들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체포하는 것을 멈추고, 농민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척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병식의 답 또한 간단하였다.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 공인은 정부의 일로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동학도인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는 것은 노력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10월 23일, 충청감사 조병식은 관내 각 고을 수령들에게 '동학도의 탄압은 물론 무고한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약탈하거나 그들을 무단히 잡아 가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감결(甘結, 관청의 공문)을 내렸다. 동학으로서는 일단 몇 가지 소원 중에 하나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탄압만 받아 왔던 동학으로서는 적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충청감사 조병식이 취회 즉 집회의 해산을 동학 지도부에 통보하였다. 동학도소에 모인 지도부는 난상토론 끝에 공주에서 10월 24일 해산하고 곧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만나자고 결의했다. 결국 강경파의 입김이 먹혔고, 온건파가 수용하는 형태로 재차 수운 대선생 신원운동을 하기 위한 삼례취회가 결정되었다.
「동학 공주 취회 즉 공주 교조신원운동. 수운 선생의 억울한 누명을 씻고, 동학의 자유를 국왕과 조정에 요구, 만천하 동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역사 이래 최초의 평화집회,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척양척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밤에는 엄청난 횃불, 관솔불, 등불이 물결치고 대낮처럼 밝아, 그야말로 혁명전야로 불타오른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