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도(貪官汚吏圖) 박홍규 화백의 '탐관오리도'이다. 탐관오리는 재물을 탐하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들을 말한다. 1차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이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동기중에 탐관오리의 횡포(橫暴)가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이 조선의 탐관오리중에 으뜸이었다.](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4/1123/IE003380550_STD.jpg)
▲탐관오리도(貪官汚吏圖)박홍규 화백의 '탐관오리도'이다. 탐관오리는 재물을 탐하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들을 말한다. 1차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이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동기중에 탐관오리의 횡포(橫暴)가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이 조선의 탐관오리중에 으뜸이었다. ⓒ 박홍규
긴장하는 세도가와 양반들
[그동안 원 없이 누려오고 지탱해 온 기득권, 세도가와 양반들 특히 재물을 탐하여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인 탐관(貪官)들의 횡포(橫暴)는 동학의 출현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도 결속하고 동학 탄압에 경쟁이라도 하는 듯 앞장섰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은 동학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고 응원가가 되어 동학세상 즉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이때 동학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 삼남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의 지도력과 포덕으로 지역마다 핵심적인 제자들이 자리를 잡고 그 산하에 도인 수가 수백 수천 명에 달했다.
동학의 세력이 몰라보게 성장하였지만 해월 선생은 늘 걱정이 앞섰다. 수운 대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 도덕을 실천하기보다, 세상의 기운에 편승하여 변혁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도인들이 적지 않았다. 자칫 세를 믿고 힘으로 뜻을 이루려 하다가 그것이 큰 난리로 확산되지 않나 하는 근심이었다.
그 무렵 농민들은 흉년이 든 데다 온갖 수탈과 탄압을 당해 곳곳에서 민란을 넘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
동학은 세를 불려가면서 한편으로 도인들끼리 서로 돕는 기풍이 민심을 얻어 곳곳에서 마당포덕이 이루어졌다. 입도하지 않은 농민들도 오로지 동학만이 자신들을 대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당시 서양 세력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렸고, 특히 일본의 자본이 개항장은 물론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조선의 농민들을 파탄 지경에 내몬 것은 물론이고 소규모 상업도 대부분 망해 가고 있었다.
동학은 많은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어 그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견고한 계급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양반과 상민·주인과 노비가 맞절을 하는 진풍경도 다반사로 펼쳐졌다.
또한 동학은 사람이 하늘이라는 실천사상을 내세워 왕과 백성은 신분 차별이 없으며,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서로 하늘처럼 존중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당시 지배층으로서는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왕조와 위정자들, 세도가와 양반 사회는 최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동학에 의한 커다란 변혁과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라는 신념으로 외세의 침략에 직접 맞서 나서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되었다.
「세도가와 일부 양반들, 그리고 탐관들은 동학이 커져갈수록 밤잠을 못 이루며 한숨 소리만 커져갔다. 개벽이라는 것, 혁명이라는 것,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된다는 것, 동학은 이제 나라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봉준 장군의 마직막 거주지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라면 전 장군의 마지막 거주지가 '산외면 동곡'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전봉준 판결선고서(1895, 3, 29)' 원본에 따르면, 전봉준의 마지막 주소가 "전라도 태인 산외면 동곡(東谷) 거(居)"로 되어 있다. 지금 주소는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이다. 직업은 '농업'으로, 신분은 '평민'으로, 당시 나이는 '41세'로 적었다. 사진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 박용규 박사가 전봉준 고택을 가리키는 장면이다. 박용규 박사는 이곳에 안내판이 없음을 지적했는데 현재는 자그마한 안내판이 설치되어있다. 필자(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도 이곳을 여러차례 답사한 적이 있다.](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4/1123/IE003380551_STD.jpg)
▲전봉준 장군의 마직막 거주지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라면 전 장군의 마지막 거주지가 '산외면 동곡'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전봉준 판결선고서(1895, 3, 29)' 원본에 따르면, 전봉준의 마지막 주소가 "전라도 태인 산외면 동곡(東谷) 거(居)"로 되어 있다. 지금 주소는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이다. 직업은 '농업'으로, 신분은 '평민'으로, 당시 나이는 '41세'로 적었다. 사진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 박용규 박사가 전봉준 고택을 가리키는 장면이다. 박용규 박사는 이곳에 안내판이 없음을 지적했는데 현재는 자그마한 안내판이 설치되어있다. 필자(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도 이곳을 여러차례 답사한 적이 있다. ⓒ 박용규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하다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은 남모르게 서로의 집에서 번갈아 모이고 흩어졌다. 이들은 이미 결의형제가 되어 세상의 변혁을 이끌어갈 준비를 하였다. 특히 녹두라는 자그마한 키에 야무지게 생긴 전봉준은 혁명을 일으킬 면밀주도한 인물이었다.]
1891년 3월 초9일, 태인 산외면 동곡(泰仁 山外面 東谷)이라는 곳, 산을 살짝 벗어난 동쪽의 골짜기 마을에 낮선 그림자 몇 개가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봄을 맞이하여 온종일 일터에 나가 고된 노동을 하던 농민들이 코를 골며 잠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 적막에 휩싸인 산기슭, 사연이 많은 듯 졸졸거리며 마을을 관통하는 냇물,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텅 빈 가슴을 위로하듯 심금을 울려주는 소쩍새 노랫소리, 그날, 그곳, 전봉준의 집을 향해 어둑한 밤길을 쏜살같이 달려오는 사내들이 있었다.
단단한 체격과 재빠른 몸놀림과 형형한 눈빛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김덕명(金德明), 김개남(金開男), 최경선(崔慶善), 손화중(孫化中)이었다. 전봉준(全琫準)과 이들은 틈만 나면 남몰래 접속하여 나라 걱정과 시국을 의논하는 형제 같은 사이였다.
전봉준,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던가. 그동안 드러내지 않던 하늘의 소리를 꺼내들었다. 그날은 수운 대선생 기일(3월 10일)이었다. '후천개벽의 천황씨께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우리도 대선생님의 제자로서 태어난 날은 달라도 한날한시에 죽자'고 하였다.
전봉준의 의기에 찬 제안으로 김덕명, 김개남, 전봉준, 최경선, 손화중 5인은 죽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맹세하였다. 이른바 동학농민혁명 5대 장군이라 일컫는 이들의 비밀결사 모임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민중혁명의 역사를 창출하게 된다.
이들 동학 5걸이 살고 있는 마을은 서로 간 걸어서 반나절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시로 만날 수 있는 지리적인 여건을 갖추었고, 또한 혁명과 전쟁을 수행할 이념 즉 사상까지 공유하게 된다.
전봉준은 나이가 위인 김덕명, 김개남과 아래인 최경선, 손화중에게 동학사상은 물론, 국내외의 역사와 시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즐겨 나누곤 하였다. 봉준은 들리는 이야기라며, 중국의 홍수전과 태평천국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이필제의 영해교조신원운동에 대해서도 카랑카랑한 쇳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이필제 접주가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조선을 평정하고 중국으로 치고 올라가 황제가 된다고 큰소리쳤지!"
전봉준의 말을 듣고 있던 손화중 대접주도 호탕하게 웃으며, 정여립 장군에 대해 솔깃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래전에 전라도에서 정여립 선생이 공화주의를 앞세워 대동세상을 꿈꾸다가 결국 기축옥사(己丑獄死)라는 모반사건으로 지목되어 선비들 천여 명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손화중의 말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의 말을 듣고 있던 최경선 접주도 굵직한 목소리로 홍경래 장군에 대해서 서슴없이 이야기하였다.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조선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대규모 거사였으나,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했다.'는 것으로 신중하게 처신해야한 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다.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곤거렸다. 새벽이 다가오자 김개남은 자리를 털며 몇 마디 거들었다. '동학으로 일어나면 조선 팔도는 물론,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인 중국의 요동과 만주 일대를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랬다. 단군왕검과 광개토대왕은 물론 발해의 대조영 대왕의 후예인 조선인들은 언젠가는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고토(故土)를 되찾아야 한다고 뜻있는 사람들은 역사대대로 꿈들을 꾸어왔다. 이들 5인 중에 연장자인 김덕명도 '껄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처럼 전봉준을 중심으로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은 틈만 나면 접촉하여 속마음을 털어놓는 허심탄회(虛心坦懷)한 사이였다. 동학의 대두령들, 이들 5대장군은 결의형제가 되어 태어난 것은 각자 달라도 한날한시에 같이 죽자는 약속은 훗날 운명처럼 닥쳐온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