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섬놈 팔자 / 고립무원 서러움도 유전이 되고 / 원통할 섬놈의 피 / 씻어 내고 씻어 내도 짠 내는 가시지 않아 (아픈 것들은 모조리 파도가 되자)
시인은 섬에서 태어났다.
"하도 멀어 섬 천 개는 / 징검다리 삼아 건너야 갈 수 있는 섬"이다.
"천주쟁이 정약전, 왕의 도포를 훔친 상궁 / 가다 죽으라 보낸 유배지"란다. (내 고향은 흑산도)
서울·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인구가 가파르게 줄어드는 오늘, 이 섬은 벌써 늙고 야윈 지 오래다. 그곳은
"싱싱하고 비린 것들은 / 모두 서울로 가고 / 포구엔 온통 늙은것들뿐"인 섬이 다.(서해 노포(老鋪)에서)
시인은 그 섬이 밉다. 그리하여
"다음 생엔 이 소징한 섬에서는 / 절대로 나지 말아야지 / 그런 헛된 다짐이야 / 아비는 안 했을까 / 아비의 아비인들 안 했을까" 되뇐다. (아픈 것들은 모조리 파도가 되자. '소징하다'는 징하다, 징글징글하다는 뜻의 흑산도 말)
하지만 시인에게 흑산도는 그저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이 아니다. 그곳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푸르던 그 어떤 시절이다.
시집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이주빈, 2024)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시로도 한 시절을 기록할 수 있다는 걸, 손때 묻은 물건과 빛바랜 사진들을 모으는 일만으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갈파래가 짝지에 밭을 지으면 / 까맣게 반짝이는 아이들은 / 주르륵주르륵 미끄럼 놀이에 신났다 // 어른들은 먹지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 / 갈파래 흉을 보며 / 여름 초저녁마다 걷어 내기 바빴다 (푸른 초저녁. '짝지(밭)'는 몽돌로 이뤄진 해변)
나 살던 옛집은 밤나무 숲에 있었지 / 서향으로 난 창으론 수수한 들녘 익어 가고 / 뒷산 자락엔 새벽마다 상고대 피었다 지곤했어 // 분칠 잘하던 옆집 새댁 야반도주하던 어느 봄 / 무수한 참꽃 서럽게 울어 대더군 / 칠성이가 농약 마신 것이 한 달쯤 되었던가 (흰꼬리수리 옛집)
한 삼백 년 산 팽나무 지나 / 선창가 끄트머리 집 보이제 / 거가 나 사는 데여 // 작년에 구신 된 영감이랑 같아 살어 / 둘이 맞담배질에 / 소주도 반 고뿌식 나누고 / 내 소리에 타당타당 장구바라지 / 얼마나 기막히게 했는지...... / 한 시절 좋았제 (당골래 도화(桃花). '당골래'는 전라도의 세습 무녀(무당)를 가리킨다)
그의 시를 읽으면 시간의 흐름에 밀려 저만치 흐릿해져 가는 아스라한 풍경들이 보인다. 그뿐인가. 지금은 그 어디에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와 함께 섬에서 살았던 이들의 마음이 읽힌다. 저 멀리 바다에서 불어온 짠내 머금은 바람이 살갗에 닿고, 정겹던 살냄새도 코끝을 스친다. 시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새집 하나씨 다섯 식구 거느리고 / 맞바람 툭 밀고 들어오는 짝짓가에 / 초막 지었을 때 / 친모 잃은 어린 아비는 / 몽돌처럼 또르르 굴러가 / 작은엄니 마른 젖가슴에 파묻히곤 했다 // 아비가 맘씨 착하던 계모를 친모 옆에 묻고 / 저만한 나이로 짠 내를 몸에 배기 시작한 / 나를 끌고 섬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 기막혀 서럽게 운 건 / 아비가 아니라 나였다 (아픈 것들은 모조리 파도가 되자. '하나씨'는 할아버지의 서남해 섬 지역 말)
흑산도 지피미 고향집 앞 / 까치발로 총총 여섯 걸음 걸으며 / 마당 같은 짝지밭 / 바다를 살짝 깨물고 / 수평선엔 뽀얀 아지랑이 / 그 속을 느리게 느리게 기어가는 배들 / (중략) / 섬마을 아이들 좁은 등에 / 차크르 소금 알갱이 / 안산 솔숲 성근 낙엽 밀고 다니는 / 미역 줄기 같은 바람이 닦아 주던 / 까맣게 흰 / 어린 동무들 살냄새 (향수(鄕愁))
쌓아 둔 추억만큼 / 파도는 일고 / 잊어야 할 이유만큼 / 물결은 멀어진다 / 더러 미련들 / 암초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 바다 한가운데 / 나를 잡아 세워도 / 돌아갈 수 없는 길은 / 돌아보지 않으리 (출항2)
시를 읽다 보니 나도 시인과 함께 짝지를 뛰놀다가 철들자 저 수평선 너머로 떠났던 섬놈이 된다. 내 어머니가 그 섬 어딘가에서 솥뚜껑 엎어 전 부치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어느새 나도 흑산도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한강 작가가 '변방'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었다.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변방의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바다에 주소를 둔" 이 작은 시집을 자꾸 들춰보게 된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주소를 둔 더 많은 시들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시인 이주빈은 신안의 섬 흑산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20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섬문화 다양성과 태평양 기후 위기 대응 일을 하고 있다.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