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호남에서 마당포덕을 행하다
[동학, 그때는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동학에 입도(入道)하는 마당포덕을 전국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마당포덕을 한 번 살펴보자.]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수운 선생 순도 후 객지를 떠돌며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모진 고생을 겪으면서 초인적인 노력으로 동학을 전국에 확장시켜 나갔다. 해월 선생은 1880년대에 동학의 포덕과 조직구축을 위해 또다시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이때 그 유명한 마당포덕을 행하였다. 마당포덕은 동학에 입도(入道)할 사람들이 풍운(風雲)같이 모여들어 정식 입도식을 거행할 수 없어서 마당에서 한꺼번에 청수(淸水)를 봉전하고 입도식을 거행하는 의식이다.
해월 선생은 경상도를 출발하여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도착했다. 선생은 지명수배된 몸이라 언제든지 도주할 준비로 보따리 하나 메고 다녔기 때문에 '최 보따리'라는 별명이 함께 따라다녔다. 그 보따리 속에는 생활필수품은 물론이고 수운 대선생의 직필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들어 있었다. 해월 선생은 그 보따리를 단 한 번도 손에 놓아 본 적이 없었다.
해월 선생은 당시 동학의 법적 최고 지도자를 상징하여 최법헌(崔法軒)이라는 호칭이자 존칭으로도 불렸다. 해월 선생과 동학 지도부의 핵심 인사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들을 체포하는 관리들에게는 특진이, 신고한 사람에게는 포상금이 걸려 있었다. 한마디로 목숨을 건 동학포덕운동이었다.
해월 선생은 1888년 1월에 전주의 박공일 집에 도착하여 기도식을 거행하였다. 선생은 기도식 뒤에 서영도, 고문선 접주 등과 지역 도인들에게 수운 대선생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 선생의 말씀을 듣고 있던 박공일 접주가 질문을 했다.
"법헌님, 수운 대선생님께서 전주를 다녀가셨다고 들었는데, 그 무렵 대선생님의 행적이 궁금합니다."
해월 선생은 인자한 웃음으로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씀을 시작하였다.
"수운 대선생님께서는 신유년(1861) 말쯤 관의 탄압도 피하고, 동학의 포덕을 하기 위해 전라도에 오셔서 남원 은적암에 5개월가량 계셨지요. 남원에 오신 다음 해(1862) 1월 초부터 제자 최중희를 대동하고 전주에도 몇 차례 오시어 포덕도 하시고 인심과 풍속도 살피셨지요."
해월 선생의 말씀을 듣던 서영도 접주가 질문을 하였다.
"고운 최치원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인지요?"
"대선생님은 경주 최씨 시조인 최치원 선생님의 25세손입니다. 최씨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운 선생님이 남긴 말씀 중에 이르기를 '우리 동방에 신령한 기운이 어려 있어 나의 후손 중에 반드시 세상을 개조할 대성인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셨답니다. 그 후손이 바로 수운 스승님이십니다."
해월 선생은 전주에서 동학과 수운 선생에 대한 강론을 마치고 전주 근처 삼례로 향하였다. 삼례에는 이몽로 접주가 많은 동학도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라도 지방에 동학이 많이 전파되고 마당포덕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이몽로 접주집에 머무르다가 다시 호남순회에 나섰다. 선생은 삼례에 이어서 임실 이병춘, 익산 박치경의 집에도 머물렀다. 특이한 점은 해월 선생께서 들리시는 그 고을은 동학의 바람이 불어 포덕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마당포덕은 정식 입도식을 치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도인들이 동학에 들어오면
마당에 모두 모여 한꺼번에 입도식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마당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들녘에서 청수 대신 개천이나 웅덩이를 향하여 집단 입도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마당포덕은 큰 마당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경전 해석과 강론을 행하면서 동학 포덕을 행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때의 광경은 수운선생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풍운같이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해월 선생과 호남의 대두령들
[해월 선생과 호남의 대두령들은 각별한 사제지간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어긋남이 없었다. 다만 훗날 동학농민혁명 1차 기포에 대한 입장차이 즉 시국관에 있어서 서로 생각하는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 강시원,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서장옥 등 양호(호남·호서) 동학 지도자들은 끝까지 해월 선생을 스승으로 존중하였다.]
해월 선생은 몇 차례에 걸쳐 호남순회에 나섰는데, 1890년대 초, 태인포 김개남(金開男)과 무장포 손화중(孫花中), 부안포 김낙철(金洛喆) 등의 집에도 머물렀다. 그때의 이야기 몇 토막이 전해오는데, 김개남, 김덕명 접주가 해월 선생에게 옷 몇 벌과 약간의 돈을 선사했다.
"법헌께서 전국을 순회하시며, 입으실 것과 잡수실 것이 모자랄 것 같아 작은 성의로 드리오니 받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해월 선생은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많은 도인들을 보살피고 씀씀이가 많을 터인데 이렇게 안 해도 되네. 각 접에서 유용하게 사용하시게"라고 말씀했다.
김덕명 접주는 "선생님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하자, 해월 선생은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이를 받아 수행원에게 넘겼다. 그 무렵 금구 원평의 김덕명포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원평 부근 모악산 자락에 있는 금산사 미륵부처 상의 전설과 동학사상이 결합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모여들었다.
또한 해월 선생이 김개남의 집에 머물 때 이야기다. 이씨 부인이 지극정성으로 선생을 대접하는지라 선생이 그 연유를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예, 처음에는 김 접주가 동학을 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퍼 주는 것이 속상하고 아까웠지요. 그런데 김 접주가 늘 저에게 큰절을 하고 높임말을 하면서 마치 저를 한울님처럼 섬기니, 결국 제가 곳간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도인들은 물론 배고픈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자고 했지요. 동학이 여는 세상은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씨 부인의 말을 들은 선생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진정 한울님이십니다. 제가 어느 날 청주 서택순 도인 집에서 며느리가 옷감 짜는 소리를 듣고 한울님이 베 짜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집에 사람이 오거든 한울님이 강림하신 것으로 아세요. 부인께서 나눠 드린 곡식은 한울님의 생명이요,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한울님이 먹는 것입니다."
이씨 부인은 감복하여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해월 선생에게 절하고 또 절하였다. 어찌 이씨 부인뿐이랴, 해월 선생의 고고한 인품과 드넓은 도량에 마주대하기만 하여도 그 무엇인가에 감복되어 세제지간을 맺고 동학에 입도하는 진풍경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은 1891년 호남순회 중에 김덕명 대접주(大接主)의 소개로 전봉준 접주(接主)를 만났다. 선생은 도통(道通)은 물론 영통(靈通)까지 한 분이라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었다. 선생은 전봉준을 근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앞날을 걱정하는 말씀을 하였다.
"장차 천지를 뒤흔들 인물들이구나. 거대한 태풍이 일어날 조짐이로다. 부디 때를 기다리고 신중함을 잃지 말지어다."
해월 선생은 예정대로 손화중의 집으로 향했다.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등과 그 어떤 일을 꾸미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자신을 가장 잘 따르는 손화중의 집에서 머물기 위해서였다. 선생과 손화중포 접주들의 대화가 한창일 때, 손화중의 부인 유씨가 다과를 차려 방 안에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선생과 일행도 정중하게 맞절을 했다.
"바쁘신데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걱정 마시고 편하게들 계셔요."
인상이 부드럽고 착하게 생긴 유씨 부인은 선생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선생이 유씨 부인에게 말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예. 손 접주가 동학에 너무 깊이 빠진 것 같아요. 글쎄 지난해에는 주인장이 봄철 어느 날 밭에 나가 일하는데, 어느 접주가 찾아와 쏙닥쏙닥 귀에다 몇 말씀 하자, 삽을 땅에 푹 꽂고 휙 나가더니만 가을 추수철이 되어서야 돌아왔어요."
유씨 부인의 말을 들은 해월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 힘드시겠지만, 새 세상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도와드리세요."
해월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서 유씨 부인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말했다.
"선생님, 동학에서는 여인네를 존중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다면서요?"
"물론이죠. 수운 대선생께서 득도하시고 제일 먼저 부인을 집안의 주인으로 모시고 한울님처럼 존중하여 섬겼습니다. 또한 여자 노비 두 명 중 한 분은 큰며느리로 삼았고, 또 한 분은 양녀로 삼아 몸소 신분 차별 철폐를 실천하셨습니다."
"예, 손 접주도 동학을 하면서 저에게 가끔 큰절도 하고 예전에 안 하던 행동을 하곤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무슨 큰일을 꾸미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그런 염려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제가 잘 말씀드려 그런 일이 없도록 힘쓰겠습니다."
해월선생은 자나 깨나 오직 동학의 미래와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세력이 커진 동학에서 무근 혁명과 같은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은 손화중의 집을 거쳐 김낙철의 집에 며칠간 머물면서 호남의 육임첩지(동학의 여섯 가지 직책의 임명장)를 발행했다. 선생은 김낙철이 호남에서 가장 자신을 따르는 인물이라 낙철, 낙봉 형제를 조용히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으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게나. 그리고 그 어떤 일에도 함부로 가담하지 말고 내 뜻에 따르기를 부탁하네."
"예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무슨 변고라도 생기는 것입니까"
"큰 걱정거리가 닥칠지 모르겠네."
"큰 난리라도 납니까?"
"우리 도의 운수가 끊어질 정도의 대변고가 될 수도 있어…."
해월 선생은 부안 김낙철·김낙봉 형제 집을 떠나 옹정리(현재 부안읍 옹중리)의 김영조 집에 머물렀다. 다음 날 태인 동곡 김낙삼 집으로 떠나기 전에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열매가 맺힐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였다. 이 말씀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나, 첫째로 부안에서 동학이 꽃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 또 부안이라는 지명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 큰 경사스런 일이 다가올 것이라는 말도 있다.
「호남의 대두령들, 김덕명·김개남·손화중·김낙철·전봉준·최경선 등은 해월 선생과 끈끈한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장차 천지를 뒤흔들 거대 인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