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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아리랑고개 우리 백성들의 한많은 고개 아리랑고개를 박홍규 화백이 판화로 그려냈다. 조선말 백성들의 삶은 아마 아리랑 고개였을 것이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목판화]아리랑고개우리 백성들의 한많은 고개 아리랑고개를 박홍규 화백이 판화로 그려냈다. 조선말 백성들의 삶은 아마 아리랑 고개였을 것이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 박홍규

조선의 운명과 동학세력의 확장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고 망하기 시작한 사연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왕조 스스로의 책임도 외면할 수 없지만 근본적으로 외세침략 즉 일본의 침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국내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나를 살펴보겠다.

그때 그랬었다. 조선왕조 말, 조선의 국운(國運)은 바닥을 치고 있었으며, 또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사람 개개인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듯이, 왕조에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는 법이다. 사계절이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돌고 돌듯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이루어졌다가 사라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하늘의 법칙이라지만 사람이 하기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동학에서는 말이다.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살펴본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창업한 지 어느덧 500년이 지났다. 당시 조선왕조의 운명은 마치 해가 서산에 기울어 검붉은 노을을 토해 내고 있는 것 같았으며, 또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갔다.

조선왕가의 드라마와 같은 마지막 장면은 틈만 나면 권력을 차지하려는 외척들의 다툼과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외세의 침입으로 시작되었다. 나라가 망하든 백성이 아우성치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더구나 조선 왕가의 복합적인 문제들이 분출되었다. 흥선군 이하응은 신정왕후 조 대비와 결탁하여 어린 둘째 아들 이희를 왕으로 내세웠다. 왕의 아버지가 된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물론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대원군은 그야말로 왕위의 왕 상왕(上王)이었다.

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성장함에 따라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똑똑하고 정치력이 남다른 민왕후(閔王后)는 민씨 집안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호시탐탐 대원군이 차지한 권력을 노리고 있었다. 민왕후는 과히 여장부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고 있었다.

민왕후는 대원군의 완고한 쇄국정책보다는 개화정책을 선호하였다. 결국 민왕후와 민씨 세력이 단합하여 대원군을 밀어내고 지아비 고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그 와중에 조선왕조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세상만사는 내부의 분열과 다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조선왕가의 그러한 허점을 틈 타 자행된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는 백성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갔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악성유행병인 역병(疫病)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사방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널렸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더구나 사람으로 먹어서는 안 될 풀뿌리와 나무껍질 같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거나 밥을 빌어먹는 처지가 되었다. 백성들의 처참한 광경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았다.

백성들이 의지해야 할 나라의 권력 집단은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에 거리낌이 없었다. 또한 세도가들에게는 '누가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느냐'가 유일한 관심거리였다.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민씨 정권에 외세의 침입은 사실로 닥쳐온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윤요호가 강화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한일 간의 포격사건이 벌어졌다. 이러한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여 개항을 했다.

강화도조약은 일명 병자망국조약(丙子亡國條約)으로도 불리면서 이때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이 갑오년(1894) 이전, 병자년(1876)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조선은 결국 위로는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 하수인이 되고, 아래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호구 노릇을 하게 된 셈이었다. 모든 백성들은 한결같은 말로 '임진왜란과 같이 나라가 큰 전쟁 위기에 휘말릴 것'이라고 모두 불안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백성들이라는 사실이 역사가 증명한다.

이때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그러한 영향에 힘입어 <정감록(鄭鑑錄)> 같은 예언서들이 유행병처럼 퍼졌다. 국가를 지탱해주고 있던 성리학도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는 유학세상이 망하고 동학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입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백성들을 더욱 두렵게 했던 것은,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힘없이 무릎을 꿇은 사건이었다. 1840년, 1856년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맥없이 무너지면서, 중국이 서양 세력에 굴복한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상실감과 공포감이 조선을 공황 상태로 몰아갔다.

수운 선생은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중국이 무너지면 나라를 지탱하기 힘들다는 것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제는 그 말씀이 현실이 된 것이다.

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

서양 세력이 신식무기를 앞세워 동양을 굴복시키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로 거대 중국마저 무너뜨렸으니, 바람 앞의 등불 같은 풍전등화(風前燈火) 위기 속에서, 조선의 민중들에게는 오로지 동학(東學)만이 희망이라는 믿음이 커져만 갔다.

이때를 전후해 중국은 큰 변화와 위기에 직면했다. 1850~1864년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 전국을 휩쓴 것이다. 태평천국운동은 청나라가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패한 후, 신흥종교인 배상제회의 홍수전 교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혁명이었다. 청나라 정부의 권위는 추락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시기에, 태평천국운동은 민심을 얻어 큰 성과를 거두며 중국의 반 이상을 장악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자신을 천왕이라 칭했다. 그러나 결국 태평천국은 내부적으로 타락하고 분열하면서, 서양 세력의 지원을 받은 청나라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패하고 만다. 홍수전의 큰 꿈과 야망은 권력을 차지한 뒤 자신의 관리는 물론 관료등용과 개혁정치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역사의 교훈을 준다.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소식은 조선 정부와 백성들에게도 전해졌는데, 정부는 불안에 떨었고 백성들은 은근히 민중봉기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동학을 창도하였으니,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이 1864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수운 선생도 그 소식을 접하였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태평천국혁명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전주성점령 이후 집강소 통치 등 백성을 위한 폐정개혁에 박차를 가한 것은 아마 태평천국운동의 실패를 거울삼았다고 볼 수도 있다.

조선, 그 어두운 국운은 자체에서 시작되었지만 외세에 의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수운 선생이 그토록 경계했던 서양 세력과 특히 일본의 침탈은 조선을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해월신사 최시형 존영 해월 최시형 선생의 존영이다. 현재 천도교는 물론 동학관련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해월신사 최시형 존영해월 최시형 선생의 존영이다. 현재 천도교는 물론 동학관련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최시형의 동학사상 실천 운동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사상을 농사일로 비유하면, 동학 1세 교조 수운 최제우 대선생이 봄에 씨앗을 뿌리고 새싹이 돋아나게 했다면,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여름에 그 싹들을 키워내고 널리 분포시켜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동학 천도교 3세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은 곡식들을 거둬들이는 가을 추수를 하였고, 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 선생은 혹한기의 겨울을 견뎌내고 다시 봄 맞을 준비를 하는 역할을 했다고 구분할 수 있다.

조선왕조와 세도가들은 수운 대선생을 죽이고, 동학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해월 선생의 동학에 대한 조직화, 제도화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포덕(布德)과 지도력에 의한 동학의 신앙과 사상은 갈수록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들고 넓게 확산되었다.

수운 선생께서 창명한 동학사상은 해월 선생이 더욱 구체화 하고 생활 속에 자리잡는 과정이 있었다. 다시 말해 동학사상은 철학과 사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사상이자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의 수제자로 동학에 입도한 후 30여 년간 관으로부터 추격당하며, 조선 8도 방방곡곡에 동학을 포덕하고 성장시킨 결과로 도학도인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은 동학재건과 포덕활동 중에 많은 법설을 남겼다. 그 해월 선생 법설 속에 수운 선생의 말씀을 전하는 내용 즉 명교(命敎)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해월 선생의 말씀 즉 법설을 통해 전해지는 수운 대선생 말씀이 해월 선생의 법설에서 더욱 구체화 되고 실천적으로 생활화된다는 것이다.

수운 선생이 집필한 경전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로만 보면 잘못하다간 오류를 범한다. 부처님의 불경도 그렇고 예수님의 성경도 그렇고 공자님의 논어도 그렇다. 모두가 제자들과 후세 사람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이뤄졌다.

[영월 직동]해월신사 최시형 대인접물(待人接物) 법설지 해월 최시형 선생은 태백산에 숨어드는 등 관으로부터 쫒기다가,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머물면서 대인접물(待人接物) 법설을 행하고, 동학 재건의 기운을 회복하였다. 현재 사진은 직동마을 박용걸 집터이다.
[영월 직동]해월신사 최시형 대인접물(待人接物) 법설지해월 최시형 선생은 태백산에 숨어드는 등 관으로부터 쫒기다가,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머물면서 대인접물(待人接物) 법설을 행하고, 동학 재건의 기운을 회복하였다. 현재 사진은 직동마을 박용걸 집터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선생은 많은 법설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대인접물(待人接物)>을 소개한다.

사람이 바로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십시오. 내 제군들을 보니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가 많으니 한심한 일이요, 도(道)에서 떠나는 사람도 이래서 생기니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나 또한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으나, 이런 마음을 감히 내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내 마음에 봉양(奉養)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입니다. (중략)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 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이다. 어찌 서군뿐이겠습니까.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천주天主)이 강림(降臨)하셨다 말하십시오.

도가의 부인은 경솔히 아이를 때리지 마십시오.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나 한울(천天)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합니다. 도인 집 부인이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경솔히 아이를 때리면, 그 아이가 반드시 죽을 수도 있으니 일체 아이를 때리지 마십시오. (중략)

이는 다 수운 대선생님의 명교(大先生主之命敎)를 잊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맑고 밝음이 있으면 그 아는 것이 신(神)과 같으리니, 맑고 밝음이 몸에 있는 근본마음은 곧 도(道)를 지극히 함에 다하는 것입니다. 일용행사(日用行事)가 도(道) 아님이 없습니다. (중략)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오.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십니다. (중략)

만물이 시천주(侍天主) 아님이 없으니 능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집니다. 제비의 알을 깨치지 아니한 뒤에라야 봉황이 와서 거동하고,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에라야 산림이 무성합니다.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오,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敬物, 경물) 덕이 만방에 미칩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동학농민혁명#녹두장군전봉준#해월최시형선생#수운최제우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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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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