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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아동 문학을 소개합니다. 어른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동 문학을 통해 우리 아동 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학 속에 깃든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연일 '안전 안내 문자'가 휴대폰 문자창을 두드린다. "북한이 대남 쓰레기 풍선(추정)을 부양 중에 있습니다. 도민들께서는 낙하물에 주의하시고 발견 시 접촉하지 마시고 군부대나 경찰서로 신고 바랍니다."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 생각해 보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한반도를 뒤덮었던 때가 그리 먼 옛날도 아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겪은 일이며, 아직도 전쟁의 상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 아버지의 고향은 평양이다. 전쟁을 청년 학도병으로 겪어내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경험한 분이셨다. 병으로 돌아가실 무렵, 마약성 진통제로 몽롱한 순간에 전쟁터 꿈을 꾸셨노라고 하셨다. 모두 잊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 땅을 누리며 사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가슴 깊은 곳에는 그때의 고통과 슬픔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 역시 그랬다. 굴곡진 어머니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겨보자고 글을 써보시라 했다. 내게 내민 어머니의 글에는 일제강점기와 전쟁 이야기뿐이었다. 나머지 세월은 어디 갔냐고 묻자 "나머지? 그건 그냥 남들 사는 대로 살았지"라고 무덤덤하게 말을 던지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진저리나게 아팠던 전쟁을 모른다. 몇 백 년 세월이 아니라 단지 칠십여 년을 지났을 뿐이지만, '분단'은 기정사실이며, '통일'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단어가 되었다. 학교 토론 시간 단골 논제였던 '통일은 필요하다'에 관한 찬반 논쟁도 식상한 것이 되어 밀려난 지 오래다. 분단과 통일은 관심 밖의 이슈이며, 북한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근접 국가일 뿐이다.

프랑스 집에서 만난 한글 낙서

 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은이), 김진화 (그림)
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은이),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한윤섭의 <봉주르, 뚜르>는 2010년에 나온 작품이다.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굵직한 타이틀을 거머쥐고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제는 이미 식상해진 '분단 조국의 현실'이다. 뻔한 이야기일 거라는 기우를 '봉주르'라는 인사로 무너뜨리며, 프랑스 땅 뚜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국'이라는 단어에는 눈물이 배어있다. 단지 '국적이 속해 있는 나라'라기보다는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민족, 애국과 같은 단어가 '조국'을 떠받치고 있으니 '나라'라는 단어보다 한층 무거운 느낌을 준다. 또 빼앗겼던 나라, 없어졌던 나라, 그 아픔을 간직한 본디의 나라라는 의미까지 합쳐지면 조국이라는 단어에 한 나라의 역사까지 가득 들어있는 듯하다.

주인공 아이 봉주는 아빠 회사 일로 프랑스 파리에 살다가 뚜르로 이사하게 된다. 이사한 날, 자기 방 책상 옆에서 달빛에 비친 한글 낙서를 보게 된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살아야 한다."

봉주는 이 낙서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독립운동가나 쓸 법한 이런 말이 프랑스 땅 어느 집, 벽 귀퉁이에 쓰여있다는 것이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봉주는 이때부터 낙서의 주인을 찾는 추적을 시작한다.

집주인 할아버지께 먼저 살았던 사람 중에 한국인은 없었는지도 묻고, 동네에 오래 산 할머니께도 묻는다. 하지만 먼저 산 사람은 일본인이며, 한국인은 없었다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봉주는 그래도 추적을 멈출 수 없다. 학교에서 만난 토시라는 일본인 친구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 애는 봉주가 친구들 앞에서 한국을 주제로 발표할 때 북한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에 발끈하며 봉주의 의견에 계속 태클을 건 아이다. 노란 머리에 동양인, 말 없는 일본 친구. 봉주와 맞서게 되면 서로 승부욕을 발동시키느라 난리다.

그런데 우연히 토시의 가족이 봉주가 살던 집에 먼저 살던 사람들이며,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일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신분을 속이는 한국인이라… 추리소설같이 쫄깃한 긴장감이 시작되는 대목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새로운 단서를 하나하나 더해가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인 작가의 내공이 돋보이는 구조다.

남한 아이와 북한 아이

뚜르에서 일본 음식점 '자포네'를 운영하는 가족, 학교에서 토시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토시, 그들의 정체는 결국 봉주에 의해 드러난다. 끈질기게 추적해 가는 봉주 앞에 토시가 직접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조국임을 밝힌다.

봉주의 방에 있던 낙서가 조국을 그리워하는 삼촌의 낙서일거라는 말도 한다. 그러니까 토시의 국적은 일본이지만, 공화국 출신이다. 부모님이 일본에서 공화국을 위해 일을 해야 했기에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봉주와 토시는 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된다.

두 친구의 동행은 어쩐지 조마조마하다. 남북 관계가 온화해 남북 정상이 두 손을 맞잡을 때도 괜한 불안감으로 평화로운 웃음을 웃지 못하는 우리들처럼 아이들의 동행도 불안하다.

봉주와 토시는 같은 말을 쓴다. 그러나 봉주는 한국말, 토시는 공화국 말을 쓴다고 말한다. 누가 갈라 놓았을까, 원래 하나였던 말을! 서로 같은 말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두 아이의 상황에 가슴이 저려온다.

이야기는 남북 관계가 어떤지, 이념이 어떻게 전쟁을 만드는지, 어떻게 분단 상황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지와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봉주와 토시의 조심스런 관계 속에 그저 우리가 같은 형제였는데, 이제는 그렇지 못함을 마음으로 느끼게 해준다.

"난 일본인으로 되어 있으니까, 밖에서 절대로 공화국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아빠가 말씀하셨어. 절대로, 절대로."
"우리 둘만 있을 때도 프랑스어로 말하자. 난 괜찮아."

봉주의 배려가 안타깝기만 하다.

전쟁 문학의 걸작으로 불리는 황순원의 '학'에서 덕재와 성삼이는 어릴 적 단짝 친구로 등장한다. 전쟁 중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덕재는 포로로, 성삼이는 포로로 잡혀 온 덕재를 이송해야 한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일 뿐이고 순박하고 선량한 덕재가 '적국 포로'가 된 상황은 보기만 해도 안타깝다. 북한군에 의해 뺏긴 마을을 되찾은 후 마을 치안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성삼이 역시 이 일이 맘 편할 리 없다. 그저 전쟁이라는 상황에 내몰린 가련한 백성들의 모습일 뿐이다.

봉주와 토시 역시 그렇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그저 내몰린 것이다. 봉주와 토시의 상황은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에 경종을 울린다. '한국이 위험한 상황인지 한국인들은 모르고, 외국인들만 안다'는 말이 있다. 분단의 현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산다. 토시와 봉주는 그 의미를 그들의 '마음'을 통해 전달한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된다면

토시 가족은 결국 뚜르를 떠난다. 토시의 아빠는 뚜르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이사를 결정한다. 토시는 뚜르를 떠나며 봉주에게 편지를 남긴다.

"갑자기 뚜르를 떠나게 됐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인사를 못 한 거야. 하지만 너한테는 꼭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았어. 네가 나 때문에 괜한 걱정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난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아니까."

토시의 말이 울림이 되어 자꾸 퍼져온다. '난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아니까.' 어른들은 모른다. 서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분단 후 칠십 년이 넘는 세월만 흘렀다. 어린이문학평론가 유영진은 심사평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분단 문제를 말하기 위해 우정을 끼워 넣은 것도 아니고, 우정 뒤에 분단이 배경처럼 자리 잡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봉주와 토시의 우정과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분단은 씨실과 날실처럼 교직되어 켜켜이 서사를 쌓아간다."

고갯마루까지 덕재를 호송하던 성삼은 어릴 적 덕재와 함께 학을 잡아 놀다가 사냥꾼이 학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학을 놓아줬던 기억을 떠올리고 별안간 학사냥을 하자며 덕재를 놓아준다. 덕재는 훨훨 날아갔던 학처럼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토시도 훨훨 날아 떠났다.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올라 날갯짓하는 학처럼, 그러다 이곳에서 쉬고, 또 저곳에서 쉬는 학처럼 내 조국, 내 민족 역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날을 상상해 본다. 봉주와 토시가 마음껏 손잡고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 날을 상상해 본다.

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한윤섭 (지은이), 김진화 (그림), 문학동네(2010)


#봉주르뚜르#한윤섭#문학동네#장편동화#분단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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