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세(趙秉世, 1827~1905)는 경기도 가평에서 아버지 유순과 어머니 대구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아버지는 현감이었다.
32세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 정선·헌납·홍문관 교서 등을 지냈다.
37세에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후에 사헌부 장령, 부교리, 사간원 사감, 홍문관 부응교에 이어 39세에 이천부사·영광군수 등 외직인 지방관을 지내고, 40세에 대사성·의주부윤·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41세에 한성부판윤·우의정, 46세에 좌의정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이 일어나자 정계를 떠나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자 조정에서 청국군을 끌어들이려하자 이에 우려를 표하고,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 19조>를 상소하였다.
일제의 범권과 민비 살해 등 국권침탈, 이에 대해 의병봉기 등 시국수습책이었다. 주요 내용은 언로를 크게 열어 중지를 모을 것.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할 것, 재정의 충실과 군대 양성, 의병을 호유하되 토벌하지는 말 것,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에 대한 신중한 외교 정책 등이 담겼다.
고종이 1898년 정승(영의정)에 임명 했으나 받지 않았다. 1900년에 다시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국정개혁을 건의하고 포천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무능한 군주였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일제의 야욕이 들어났는데도 친일파들에 쌓여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조병세는 1905년 2월 서울에 주재하전 외국공관이 빠져나가는 등 국가의 위기가 코앞이 닥치고 있음을 지켜보고 <시폐 5조>의 상소를 올렸다.
1. 재상을 신중히 선택하여 관기를 바로 세울 것.
2. 황실주변의 간신배를 숙청하여 아첨배를 배제할 것.
3. 간관을 두어 언로를 넓힐 것.
4. 외부대신을 잘 선택하여 대외교업에 많은 기할 것.
5.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
조병세의 피끓는 상소를 하여 임금의 면담을 청했으나 고종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주변에 이미 친일파들로 철벽을 치고 있기도 했지만 국왕은 암울하고 고집불통이어서 신하들과 소통이 거의 되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7일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지위하는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상황에서 대신들을 불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5조약(을사늑약)을 강제했다. 한유선과 민영기를 제외한 이완용·이근택·이지용·민영기·환영기가 찬성했다. '을사5적'이다.
늑약의 소식을 들은 조병세는 다시 임금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5조약의 부당함을 들어 폐기할 것과 여기 찬성하는 5적신의 처단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라는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이 사사로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일에는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뜻대로만 해서는 안 되니, 역대 선왕께서 남긴 법규에 근거하여 반드시 전현직 대신과 2품 이상의 신료와 재야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자문한 뒤에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본의 공사(公使)가 위협하여 망국의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는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달린 일인데, 한두 명의 신료가 국법과 민의와 성상의 뜻을 어기고서 제멋대로 가부를 정하여 나라를 통째로 적에게 넘겼으니, 법을 능멸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주무대신인 박제순을 비롯하여 도적에게 동조한 각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속히 국법으로 분명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즉시 늑약을 폐기한다는 조칙을 내리고 각국에 이 뜻을 공표해야 합니다. 만약 윤허를 받지 못한다면 신은 이 궁궐 섬돌에 머리를 부수고 죽겠습니다.(조소앙, <유방집>, 129쪽.)
고종은 칭병하면서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조정의 신료들과 대궐 앞에서 며칠 동안 면담을 호소했으나 나타난 것은 일본 군병이었다. 일본 헌병대에 구류되었다가 풀려나 귀향하려는 시각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들었다.
조병세는 결심했다. 12월 1일 고종에게 들이는 유서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 그리고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그의 자결은 조정 대소관리와 전국의 유생들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주고 대일항쟁서 촉매제가 되었다.
죽음에 임하여 국민에게 고하는 부탁
나는 죽음에 임하여 국내의 인민들에게 경계하여 고합니다. 아아, 강한 이웃 나라가 맹약을 저버리고 배신한 신하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니, 오백 년을 이어 온 종묘사직이 장대 끝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위태롭고 우리 이천만 백성들이 머지않아 노예가 될 것입니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쓰러져 죽을지언정 오늘날의 치욕을 차마 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진실로 뜻있는 선비가 피를 칠하고 울음을 삼킬 때입니다. 나는 충심에 분한 마음이 치솟아 스스로 헤아리지도 못하고서 임금께 올릴 글을 작성하여 대궐에 나아가 부르짖으며 석고대죄 하여 이미 기운 국권을 부지하고 거의 죽게 생긴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마음 같지 않아 무너져 쓸려 가는 상황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오직 한 번 죽음으로서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인민들에게 사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한이 있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동포 여러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또 헛되이 이 고집스럽고 어리석음을 본받지도 마십시오. 반드시 각각 분발하여 힘써 충의를 기르되 의기를 멋대로 하지 말고 권세와 이익을 휘두르지도 말며, 사사로운 원한에 급급하지 말되 공적인 원수를 잊지는 마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독립의 기틀을 회복하고 이 잊지 못할 치욕을 씻는다면 죽어도 매우 다행이며, 살아 있는 자의 영애 또한 무궁할 것입니다.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
나는 지난번에 일본 공사가 겁박하여 맺은 조약에 대해 귀 공사에게 알렸는데 끝내 한 번도 함께 모여 처리하지 못하였으니 울분이 가슴에 맺힙니다. 지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려 하니, 바라건대 귀하는 이웃 간의 우의를 생각하고 약소국을 불쌍히 여겨 함께 도움을 주어 우리의 국권을 회복해 주십시오. 대대로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