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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민영환의 모습.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민영환의 모습. ⓒ 중학교 국사 교과서

민영환(閔泳煥,1861~1905)의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다. 그는 요즘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고종황제와 내외 종간으로 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의 막내처남 민경호이다. 당시 세간에서 나돈 "오얏 이씨 사촌이 되지 말고 여흥 민씨 8촌이 되라"는 말처럼 권력의 실세 민비 가문의 여흥 민씨가 세도를 부릴 때이다. 그는 두 권세가의 탯줄을 타고 태어난 것이다.

그는 자질이 우수한 데다, 두 세도가의 힘을 받아서인지 관계에서 노른자위로 수직상승의 길을 걸었다.

17세(187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20세,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
21세, 성균관대사성
23세이후, 이조참의·도승지·전환국총판·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개성유수·한성부윤등을 거쳐 27세에 예조판서·이듬해 병조판서·32세에 형조판서·35세에 주미전권대사를 지냈다.

꽃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씨 척족의 대표 인물이던 친아버지 민경호가 피살되고, 그는 3년간 관직을 떠나 상복을 입었다. 탈상하고 다시 앞서 소개한 대로 고위직을 지냈다.

민씨 척족이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의 권세를 부릴 때 민영환이 홀로 독야청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2세 때에 성균관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에 이어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낼만큼 막강한 위치에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은 "백성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없애고자 거사했느냐"라는, 그를 탐관오리의 3인방으로 적시하였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의 생부에 관해 "민경호는 욕심이 많고……날마다 청탁 뇌물을 도모했다.…매관매직과 부정부패를 모두 그가 주도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임오군란 때 변을 당한 것이다.

민영환이 부패 권력체인 여흥 민씨 가문의 흙탕에서 연꽃으로 변신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미·친러 정권이 들어선 시점이다.

민영환 일행은 중국 - 일본 - 캐나다 - 미국 - 네덜란드 - 독일 - 폴란드를 경유하여 목적지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이르쿠츠크를 거쳐 제물포항으로 귀국하는 코스였다. 한국인으로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 각국의 문화와 문명, 개화와 혁신을 지켜보았다. 귀국한 뒤 의정부찬성·육군부장·군부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1897년 다시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 주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영국 빅토리아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축하식에 참석하고자 유럽으로 건너갔다.

정부의 어려운 재정에도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그의 순방외교가 얼마만큼 국익에 도움이 되었는지와는 별개로 재물에 눈이 멀어 세계의 변화에 담을 쌓고 살아온 조선의 고위 관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트이게 하였다.

귀국 후 그는 러시아·일본에 대한 방어책, 인재등용과 과거제 폐지, 육해군 창설, 산업장려, 신식무기 구입과 제조, 근대교육 실시와 학교설립 등을 제시했다. 서재필 등이 지도하는 독립협회의 활동을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직접 참여했다. 독립협회가 군주제 대신 공화제를 추진한다는 모참으로 한때 파면되었다가 내부대신·참정대신·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898년에는 사립 흥화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다.

민씨 척족의 국정농단을 매섭게 비판해온 황현은 "고종의 외척으로 반평생 좋은 벼슬만 했지만… 과거의 민영환이 아니었다. 이때 큰 절개를 세워 늠름한 열사의 기품이 생겼다.", "유럽과 미국을 둘러보고 천하대세를 연구하고 국사를 걱정한 민영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매천야록>) 라고 썼다.

민영환은 계속하여 국정개혁을 시도했으나 수백 년 썩은 가래를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1905년 11월 시종무관장(국무총리)에 임명되고 며칠 후 을사늑약이 강제되었다. 11월 23일 매국 5적 처단과 조약폐기의 상소를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에 의해 구금되었다. 얼마 후 석방되었으나 이미 기울어진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로 잡을 길이 막막했다.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것만이 지금껏 누려온 나라에 대한 보답이고 국민을 일깨워 구국대열에 나서게 만드는 길이라 믿었다.
 민영환의 순국을 기리는 기념물.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에 있다.
민영환의 순국을 기리는 기념물.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에 있다. ⓒ 김종성

11월 30일 오전 <죽음에 임하여 국민에게 고하는 부탁>, <우방의 주경 공사에게 고하는 글> 등 유서를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하였다. 45세 때이다. 이를 계기로 자결 순국자가 줄을 잇고 각지에서 의병 궐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죽음에 임하여 국민에게 고하는 부탁

아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 우리 인민들이 머지않아 생존경쟁에서 모두 죽어 사라질 것입니다. 대개 살려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못난 나는 나라를 도와 힘을 보태지 못하고 그저 한번 죽음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합니다. 만약 죽어서도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지하에서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우리 동포에게 바라노니, 나라의 수치를 잊지 말고 굳게 참아 가며 노력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외세로부터의 수모를 막아내고 우리의 자주독립을 회복해 주십시오. 그런다면 나는 죽어도 다행일 것입니다.

우방의 주경(駐京)공사에게 고하는 글

네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나라의 형세와 백성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금 한번 죽음으로써 우리 국민에게 그 죄를 갚고자 합니다. 이에 가장 마지막으로 귀 공사에게 맹세를 고합니다. 청하건대, 공정한 의리와 인간의 도리를 존중하여 귀국 정부와 인민들에게 고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원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입니다. 이에 정중히 드러내 밝히니, 일본이 한국에 불법을 자행하는 것은 귀 공사가 눈으로 직접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귀하께서는 우리 대한을 가볍게 보지 마시고, 반드시 우리 민족이 지혜와 용기를 다하여 나라를 위해 분투하고 피 흘리며 싸우고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의열사#의열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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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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