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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처음 인지돼 한국 사회에 커다란 아픔을 남긴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정부, 시민단체, 기업이 모였습니다. 안전한 생활화학제품을 만들겠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7년간의 준비 기간을 끝내고 오는 12월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를 발족합니다. 그 과정을 기사로 싣습니다.

 2016년 8월 2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6 생활 화학 안전주간'에서 관람객들이 생활에서 쓰이는 화학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2016년 8월 2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6 생활 화학 안전주간'에서 관람객들이 생활에서 쓰이는 화학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1957년부터 독일에서는 '콘테르간'이라는 이름의 '무독성' 입덧 치료제가 판매된다. 이 약을 복용한 산모들에 의해 팔다리가 없는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4년 뒤 판매가 금지되기까지 전 세계 1만 2000여 명 이상이 피해를 본 이 참사를 '콘테르간 스캔들', 혹은 문제가 된 성분에서 이름을 따 '탈리도마이드 참사'로 부른다.

인류 최악의 화학 물질 참사라 손꼽히는 이 참사 이후, 독일은 BfR(독일연방위해평가원, Bundesinstitut für Risikobewertung)을 만든다. 유해 물질과 관련된 위험을 평가하고 연구하는 정부 조직으로 소비자의 안전을 목표로 1000명가량의 직원들이 유해 물질을 평가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전 세계에서 이 분야의 가장 뛰어난 정부 조직으로 손꼽힌다.

그렇다면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겪은 한국은 어떨까. 사참위(가습기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2020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사망자만 약 2만 366명, 피해자는 9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 역시 탈리도마이드 참사처럼 최악의 참사로 손꼽힌다.

오는 12월 2일 정부, 시민단체, 기업이라는 세 주체가 상설기구인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아래 '이행협의체')'를 발족한다. 앞으로 더 안전한 생활화학제품을 만들고,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공동의 목표를 담았다.

생활화학제품이란 세탁세제, 살균제, 탈취제, 세차 용품 등 화학 물질을 포함한 제품을 뜻하는 말로, 이들 제품은 가정부터 사무실 등 일상 속에서 위생 관리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지금은 판매가 금지된 가습기살균제 또한 생활화학제품으로 볼 수 있다.

이행협의체가 발족하기까지 무려 7년의 준비 기간이 걸렸다. 정부, 시민단체, 기업의 입장차를 줄이고, 생활화학제품 전성분 공개, 원료 안전성 평가 등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어 왔다. 이 과정을 거쳐 크고, 작은 생활화학제품 기업 68개가 이행협의체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수없이 많은 대화 자리와 협상이 필요했다.

[시작] 정부·시민단체·기업, 7년간 '팀플'

 지난 10월 22일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 만남의 날, 이행협의체 준비기업과 정부·시민단체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안전 약속을 적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지난 10월 22일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 만남의 날, 이행협의체 준비기업과 정부·시민단체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안전 약속을 적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

시작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가 늘어나던 시기인 2017년 '생활화학제품 안전관리 자발적 협약(아래 협약)'이었다. 참사 관련자의 처벌만큼 중요한 숙제는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생활화학제품을 만드느냐'였다. 안전한 생활화학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준을 먼저 만들어야 했다.

가습기살균제를 만들어 최대 피해를 냈던 옥시(옥시레킷벤키저)를 향해 거친 불매운동을 전개했던 녹색소비자연대도 시민단체로 이행협의체에 함께하게 됐다.

"소비자는 물건을 어떻게 살까. 보통은 제품에 안전하다고 쓰여있고, 효과가 좋으면 사게 된다. 가습기살균제의 원료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은 외국에서 수영장이나 물탱크 청소시 쓰인다. 세척의 효과는 좋겠지만 가습기에 살균제 형태로 들어가 흡입하면 안 되는데 이걸 안전하다고 광고를 했다. 이걸 알고 넣었을까? 협약 초기인 2017년 제품 제조사를 모아 생활화학제품에 무슨 성분이 들어가는지 보자고 했는데 다들 잘 몰랐다. 게다가 전성분을 공개하는 일이 어렵다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대체 뭐가 어려운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은영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건강안전위원회 전문위원

기업은 왜 전성분을 공개하기 꺼려할까. 생활화학제품에 들어가는 성분을 모두 제조사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업의 비밀 또한 공개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의 생활화학제품에 원하는 향을 넣는다고 할 때, 향료는 공급망을 통해 사오면서 성분을 물어도 영업비밀이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향료를 공급하는 쪽에서도 안 하던 질문을 받으니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하지'라고 생각하며 성분을 알려주지 않는다." - 김은영 전문위원

7년간 협약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전체의 19.1%(368개)로 최다 제품의 전성분을 공개한 LG생활건강의 경우도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LG생활건강이 국내 선두 기업이니 (협약 참여는) 사회적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나가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목표는 소비자에게 안전한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여 기업이 더 높은 기준으로 더 많은 것을 공개함으로 인해 참여하지 않은 기업들에 비해 소비자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은 여전히 두렵다." - 이봉환 LG생활건강 대외협력팀 팀장

[과정] 전성분 공개부터 '화우품' 선정까지

 '화우품' 마크. 몇 년 간 사용하던 기존 마크(오른쪽)가 새 마크(왼쪽)로 바뀌게 된다.
'화우품' 마크. 몇 년 간 사용하던 기존 마크(오른쪽)가 새 마크(왼쪽)로 바뀌게 된다. ⓒ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

협약은 지난 7년간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정부, 시민단체, 기업은 2017년 자발적으로 제1기 협약을 만들면서 제품의 전성분 공개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전성분 공개에 어느 정도 중지가 모이자 2019년부터는 제2기 협약을 시작하면서 원료 안전성 평가를 도입했다. 이후 1100종의 원료 안전성 평가가 완료되자 2021년부터는 '화학물질 저감 우수제품(화우품)' 심사를 해 더 나은 생활화학제품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구성원들은 이 과정에서 세 주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모두의 동의와 양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수년을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협약으로 인해 시민사회와 서로를 이해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게 됐다"고 이봉환 팀장은 전했다.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생활화학제품 안전센터는 생활화학제품의 제조와 판매를 위한 전체 과정을 관리하는 곳이다. 센터는 협약에 참여하며 제품 전성분을 공개한 기업에는 컨설팅을 제공하고, 향후 팝업스토어 등을 열어 화우품을 홍보할 계획이다. 전성분 공개나 원료 안전성 평가가 채찍이라면, 컨설팅이나 홍보는 당근인 셈이다.

협약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기업에게는 이 '화우품'에 선정되는 것이 가장 큰 참여 동기이자 목표다. 녹색소비자연대는 화우품을 심사하는 운영 기관으로 협약에 참여했다.

김은영 전문위원은 "화우품에 선정된 제품은 국제 기준보다 훨씬 높다"며 "알레르기 유발 물질의 총 함량이 0.01% 이상 들어가면 탈락이다. 국제적으로는 1% 미만이면 안전하다고 한다"고 전했다. 화우품에 선정되어도 사후 관리를 통해 예고 없이 제품을 심사하고, 2년마다 한 번씩 갱신 심사를 진행한다.

"처음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큰 참사로 인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여러 주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참여 기업을 응원하게 됐다. 이제는 소비자에게 막연하게 두려움을 주는 소비자운동이 아니라 더 나아간 운동을 하고 싶다." - 김은영 전문위원

올해 처음으로 협약에 참여하게 된 부산의 작은 신생 기업인 '와니라이프'는 지난 19일 제4차 심사에서 디퓨저 몇 종을 화우품 명단에 올리게 됐다. 서혜정 와니라이프 대표는 "이행협의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소비자만이 아니라 내 가족도 포함해 보다 안전한 제품을 사용하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의미"라고 짚었다.

"현행 법보다 더 안전한 제품을 선제적으로 소비자에게 공급하려는 기업의 인식 변화와 노력이 이행협의체의 목표일 것이다. 제조 기업이 '지금보다 더 안전한 제품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 서혜정 대표

 지난 4월 26일 진행된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 협의체 준비기업 설명회'에서 '에코엠엔씨' 이영일 대표가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지난 4월 26일 진행된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 협의체 준비기업 설명회'에서 '에코엠엔씨' 이영일 대표가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

세차 용품을 판매하는 중소기업 '에코엠엔씨'의 이영일 대표는 과거 화학물질 공장에서 일하면서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직접 깨달았고, 협약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전성분을 공개했다.

"12살 때부터 락카나 시너를 다루는 공장에서 일했다. (유해 물질이) 눈에도 들어가고 그랬다. 먹고 살기 힘드니 뭐든 다 해야 했다. 10년 전 생활화학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이 화학물질의 안전에 취약한 나라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행협의체가 있든 없든 전성분 공개는 제조사에서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해 2017년 회사를 만들었을 때부터 전성분 공개를 원칙으로 세웠다.

이행협의체는 하나의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기둥이 하나 서 있으면 그걸 바라보는 소비자든, 만드는 관계자든 기둥에 따라 행동 반경이 정해지지 않나. 이런 모델을 하나 만들어 두면 (다른 기업도) 하나둘씩 찾아올 것이다. 나 또한 언제든지 물어보고 배울 곳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외국에만 기댔던 부분을 어떻게든 '메이드 인 코리아'로 바꿔보고자 한다." - 이영일 대표

[과제] 참여 기업 68개뿐, 해외 직구도 숙제

그러나 이행협의체와 함께 하겠다고 밝힌 기업은 12월 2일 발족 직전인 현재(11월 25일 기준)까지 68개뿐이다. 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기업이 전성분 공개부터 원료 안전성 평가까지 이행협의체의 기준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협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간에 이탈한 기업도 상당수 있다.

소비자가 믿고 살 수 있는 화우품의 가짓수를 지금보다 늘리는 것 또한 남은 과제다. 해외 직구를 통해 들어오는 각종 검증되지 않은 생활화학제품 또한 숙제다.

"그간 환경부는 이행협의체가 발족되기까지 '너무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7년간 꾸준히 해왔다. 이 과정을 거쳐 우리 생활화학제품이 국제적으로 안전성을 인정받아 수출도 잘 되고 (검증되지 않은) 해외 직구 제품도 걱정하지 않는 상황이 왔으면 한다. 궁극적으로 'K-제품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끔 계속 해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향후 이행협의체가 잘 만들어져 이런 모델이 기후위기나 재생에너지 같은 다른 환경 문제 갈등 상황에서도 좋은 선례로 남았으면 한다." - 전성원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생활화학제품 안전센터장

 지난 4월 26일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 협의체 준비기업 설명회'에서 전성원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생활화학제품안전센터 센터장이 발언하고 있다.
지난 4월 26일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 협의체 준비기업 설명회'에서 전성원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생활화학제품안전센터 센터장이 발언하고 있다. ⓒ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 협의체

*이행협의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생활화학제품 안전약속 이행협의체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thesafeli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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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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