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에서 12화를 끝으로 막을 내린 드라마 <정년이>의 여운이 진하다. 목포 출신으로 천구성(하늘이 준 목소리)을 가진 소리 천재 정년이, 그런데 실제로 목포 출신 천구성을 가진 여자 명창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류 명창이었던 이화중선이다.
이화중선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로 일본에 건너가 음반을 내기 시작해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음반(160장, 그 다음이 임방울 140장)을 낸 명창이었다. 특히 심청가 중에 황후가 되어 아버지를 그리며 부르는 소리 '추월만정'은 자그마치 100만장 이상 팔린 명반이다.
오랜만에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들으려고 유튜브 <명창 이화중선 07 심청가-심황후 사친가 추월만정>에 들어가니 정년이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댓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흐뭇한 일이다.
정년이와 명창 이화중선의 공통점

▲명창 이화중선 판소리 선집,19921930년대 이화중선의 심청가 중 '추월만정'이 담긴 복간 음반 ⓒ 김양오

▲1930년대 추월만정 음반과 가사명창 이화중선 판소리 선집에 들어 있는 사진과 사설 ⓒ 김양오
나는 3년 전 이화중선에 대한 강의를 듣고 뭔가에 홀린 듯 이화중선의 발자취를 찾아다녔고 자료를 모으며 책을 써나갔다. 나를 강하게 이끈 건 이화중선이 1944년 1월 1일 저녁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사망했다는 얘기였다. 강제 징용으로 일본까지 끌려간 우리 동포들을 위해 위문 공연 갔다가 해방을 앞두고 그렇게 가셨다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날 이후 나는 이화중선의 넋에 완전히 사로잡혔고 결국 그 분이 돌아가신 나가사키 앞바다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며 '쑥대머리'를 불러 드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 드디어 청소년 소설 '대한의 독립을 노래한 소리꾼 이화중선' <아리아리 아라리요>를 출간했다.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이화중선에게 제사지내는 필자남원에서 술과 포를 사가지고 가서 절을 하고 쑥대머리를 불러드렸다. ⓒ 김양오

▲청소년 소설 아리아리아라리요이화중선을 주인공으로 쓴 판소리 청소년 소설이다. ⓒ 김양오
정년이와 이화중선의 공통점은 한둘이 아니다. 정년이가 '매란 국극단'에 들어가 처음 맡은 역할이 방자였는데 이화중선이 바로 젊었을 적 방자로 유명한 소리꾼이었다. 1921년 조선일보는 경성 우미관 공연에서 '이화중선의 방자 노름은 실로 익살스러워 만장은 박장대소를 하였다'고 보도했다.
또 드라마에서 정년이가 자매로 나오는데 이화중선 역시 함께 소리를 했던 이중선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이화중선만큼이나 소리를 잘 했으나 안타깝게도 폐렴에 걸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던 소리꾼이다.
정년이 엄마 채공선의 어릴 적 회상 장면 역시 이화중선의 어릴 적 모습을 강하게 떠오르게 한다. 가난한 아버지(이덕화 분)와 여기저기 떠돌다가 아버지가 채공선을 권번으로 짐작되는 곳에 맡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화중선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
목포 출신이지만 엄마가 세 살 때 죽은 이후 아버지 따라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떠돌아 다녀야 했던 이화중선, 아버지는 결국 딸을 남원 권번에 맡기고 떠났다. 권번은 여자 예인들(1패 기생)의 조합이며 재능이 있는 여자 아이들을 예인으로 키우는 학교이기도 했다.
3년 이상 소리와 춤, 예의범절과 시서화를 모두 배우며 예인으로 성장한 권번 기생들은 저잣거리 기생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예술인들이었다. 그렇게 남원에서 성장한 이화중선은 20대 초반에 경성으로 올라가 조선 최고의 명창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채공선의 삶과 매우 일치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비슷한 점이 많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정년이는 1950년대 이후이고 이화중선은 채공선처럼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여성국극단은 해방 이후에 만들어졌고 그 이전에는 '협률사'라는 단체가 있었다. 협률사는 고종 때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국립 극장이기도 하지만 극단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1906년 협률사는 해체되고 1914년 극장마저 불에 타 없어졌다. 그런데 경성에서 일자리를 잃은 협률사의 대표 송만갑 명창은 남원에서 민간 협률사를 다시 조직해 지방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조선 구극의 원조인 남원 협률사가 내지하야 진주좌에 장소를 정하고 매야여행하는데 입장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1920년대 국극이 생기기 전 협률사가 있었다.최초 민간협률사인 남원협률사가 진주에서 공연했다는 기사 ⓒ 김양오
이 협률사가 바로 여성 국극단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서울 한성권번은 남원협률사에서 활동하던 이화중선, 김정문 들을 초청하여 단성사, 우미관, 죽항사에서 공연했는데 춘향전을 공연할 때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 역할을 김소옥 명창이 하고 역시 남자 역할인 방자를 바로 이화중선이 했다.
그렇게 1920년대부터 여성 중심으로 창극이 공연되다가 해방 이후에 완전히 여성들만으로 극단이 만들어졌는데 이게 바로 여성 국극단이다. 남원에서는 국극단말고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여성농악단이 결성되어 1960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 전국농악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여성 농악단 역시 국극 형태의 창극을 하면서 전국 순회 공연을 했다.
일제 강점기 예인들의 삶
그런데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 예술인들은 본인들의 삶을 꾸리기 위한 직업인으로서만 살지는 않았다. 이화중선 관련 기사를 찾아 정리하다 보니 당시 예인들이 얼마나 민중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어 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장을 많이 찾아다녔다.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큰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학교를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야학을 돕기 위해, 고아원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여름마다 태풍으로 쑥대밭이 된 한반도 곳곳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그때는 남북이 갈라지지 않았으니 그분들의 활동 범위는 함경도 청진과 신의주까지 아니 만주와 일본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가마니로 긁어모은 돈이(실제 입장료를 가마니에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쓰기보다는 세상에 뿌려진 게 더 많았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 문화를 지키려고 결성한 조선성악연구회1934년 우석 김종익(순천대 설립자)선생의 후원으로 국악인들이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했다. 진주 촉석루 야유회 모습. ⓒ 서울문화재단블로그
공연뿐만이 아니다.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민족 문화를 지키려고 춘향사당을 지어 춘향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낸 뒤 전국 판소리 대회를 열었던 '춘향제'라는 축제를 만들어 냈고, 만주땅까지 독립 자금을 전달하는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의 군수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위해 위문 공연을 가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열한 엄청난 일들의 한가운데 늘 이화중선이 있었다. 그분의 별명은 '소리 보살'이었다. 일제 시기 예인들은 이렇게 대단한 민중 활동가였다. 그것은 넓은 범주의 독립운동이다.
그 시기 소리꾼들의 사진을 보면 기백이 느껴진다. 무대 위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예술가로서의 기백뿐만 아니라 그악한 탄압에도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를 지켜내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그분들의 담담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에서 느껴진다.

▲1929년 명창대회 기념사진임방울 선생이 25세 때 열린 명창대회 기념 사진으로 <판소리 명창 임방울>, 1986, 현대문학사 책에 실려 있다. ⓒ 김양오
얼마 전에 일산의 한 책방에서 청소년들을 만났다. 중2 14명, 중3 한 명으로 구성된 청소년 독서 동아리였는데 강의를 하기 전에 분위기를 좀 띄우려고 "정년이 아는 사람?"하고 물으니 한 명만 손을 들었다.
춘향이 아는 사람? 역시 한두 명만 손을 들었다. 판소리를 들어 본 사람도 없었다. 춘향이를 모른다는 것은 춘향이로 대변되는 우리 전통 문화를 모른다는 뜻으로 여겨져 그냥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 예술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년이가 매우 반갑다. 정년이 덕분에 전통 문화의 한 장르인 판소리와 국극이 다시 회자되고 저변이 확대될 기미가 보인다. '추월만정'과 여러 판소리 음원을 찾아 듣고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전통은 어렵고 따분한 것이 아니다
한때 정부가 음악 교과서에서 국악을 아예 빼버리려다 국악인들의 빗발친 항의에 없던 일이 된 적이 있다. 말과 글뿐 아니라 음악, 미술, 모든 문화에 우리 것은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우리 문화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의 근간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판소리가 이렇게 대중에게 성큼 다가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앞으로도 드라마 <정년이>처럼 신박한 방식으로 전통문화를 알리는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연기를 하기 위해 판소리를 3년씩이나 매일 배우고 연습했다는 배우들을 보면 감탄을 넘어 존경심까지 생긴다. 나역시 <아리아리 아라리요>를 쓰기 위해 남원 민살풀이춤과 판소리를 배웠고 판소리는 지금까지 3년째 계속 배우고 있다.
배우들처럼 날마다 수련하지 않아서 소리는 형편없지만 이제는 순간순간 소리가 저절로 나와 몹시 즐겁다. 전통은 어렵고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동안 직접 보고 듣고 느낄 기회가 차단된 채 교과서와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봐서 그렇게 거리감이 생긴 것이다. 직접 배우고 즐기면 우리의 무의식과 본능은 훨씬 충만감을 느낀다. 또한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정체성도 확고해질 것이다.
<정년이>를 탄생 시킨 모든 배우들과 관계자들께 박수를 보내며 글을 마친다.

▲드라마 정년이 한 장면'정년이'에 나오는 현지 촬영 장소도 대부분 전라도였다. 이 장면의 공간은 익산 원불교 총부다. ⓒ 김양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역사동화 작가이며, 이 기사는 국악타임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