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차유진의 사는이야기입니다.[기자말] |
초등학교 근처에 위치한 문방구가 때아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엄마도 어제와 오늘에 걸쳐 공책과 펜 등을 잔뜩 사오셨다. 까닭을 물으니 영업종료 50% 할인 행사 중이란다. 나역시 놓칠세라 또 사러 간다는 엄마의 뒤를 따랐다.
문 닫는 문방구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조카도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참새가 방앗간 못지나치듯 들렀던 곳이다. 할머니와 이모를 출입문 앞에 마냥 세워두고서 좁은 통로를 연신 돌며 신중하게 놀잇감을 고르던 모습은, 언제봐도 사랑스러웠다.
결제 또한 당연스레 해주다 보니 적립금도 금세 만 원을 훌쩍 넘겼다. 오늘은 적립금으로만 결제하는 게 어떻겠냐며 사장님이 먼저 물어오신 날도 있었다. 물론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조카가 핑크로 잔뜩 도배된 액세서리 세트를 번쩍 집어올리며 만 원의 행복을 대신 누렸다.
조카와의 소소한 추억들이 배어있던 곳이라 그런지 문방구를 지나칠 때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큰 대로변에 싸고 없는 것이 없다는 대형 생활용품점이 들어섰지만 발걸음은 언제나 이곳으로 먼저 향했다.
필요한 만큼의 문구용품을 쓸어담아 계산대 앞에 내려놓은 후,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들기는 사장님께 그만두시는 사연을 조심스레 여쭤봤다. "동네에 애들이 없어서요."
그러고 보니 집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부터 올해 입학한 부속 유치원생이 네 명 뿐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의 각 학년 역시 스무 명을 겨우 넘긴 두 반 뿐이라며, 길 건너 초등학교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학원차를 기다리는 동안 놀이터에서 질러대는 아이들의 고성소리도 더이상 소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을 잃고 햇빛에 삭아가는 미끄럼틀에 앉아준 것만으로도 반가울 따름인 것을. 가끔 시험을 망쳤다며 아이의 우렁찬 포효가 단지 내를 흔들어도, 소파에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고개를 내젓는다. '괜찮아. 존재만으로도 소중해!'
동네 카페에서 심심찮게 오가는 말이 있다. 머지않아 초등학교 건물은 노인학교로 바뀔 것이라고. 실제로 아파트 단지 주민들 대부분이 입주 때부터 들어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중이다. 그 사이 자녀들마저 성인이 되어 하나둘 떠나보내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골이 아닌 불과 20분 남짓 서울 근거리에 위치한 동네의 얘기이다.
복제할 수 없는 존재들
정말 아이들이 사라지고 어른들만 남는 세상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덕분에' 웃을 일도 사라지겠지. 언젠가 아침 등교하는 초등학생 머리에 올려진 상어 머리띠를 보며 길 위에서 파안대소 했던 적이 있었다.
상어는 큰 아가리를 벌려 아이의 머리를 꽉 깨문 채로 함께 등교 중이었다. 머리띠를 벗겨보겠다는 듯 살금살금 접근한 또래 남학생을 향해, 여자아이는 상어처럼 똑같이 입을 벌려 무는 시늉을 하며 녀석을 쫓아보냈다. 출근길에 모두의 도파민을 풀충전시켜준 행복 바이러스 그 자체였다.
최근 AI의 형체를 위해 사람의 피부조직을 만드는 실험에 착수했다는 기사도 접한 적이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3년도 작)가 현실이 될 세상을 진정 만나게 되는 것인가. 극 속에서도 언급되었듯, AI가 사람인지 로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억 뿐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서 패턴을 추출해내는 인공지능에게,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유년 시절의 추억은 아직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의 고유영역이다.
미래에 불과한 일이라 해도 어린이까지 만드는 세상을 상상하고 싶진 않다. 어린이는 부족하다고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말이다.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 번뜩이는 천진무구한 발상을 무슨 수로 복제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완전무결한 '순수함'은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가. 부디 가능하다고 쉽게 답변하지 말아주길.
0명대 저출산율의 나라. 국가 위기라며 각종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만, 여성들은 그 속에서도 끝없는 자기검열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극도로 심화된 경쟁사회, 높은 물가, 경력단절, 사교육 부담, 가부장적 가치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는 현실적인 결론과 직면한다. 나 하나 버티고 살아남기에도 버거워진 세상 아닌가.
엄마와 잔뜩 구입한 물품들을 들고 집에 오는 동안에도 씁쓸한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물건이 빠져 구멍 숭숭 뚫려버린 진열대들을 보니, 조카와의 지난 추억들도 같이 쓸려나가는 기분이랄까. 이제 우리 동네에는 문방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