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에 나가야 잡을 수 있는 참치. 누가 먼저 참치 원양 어업에 나섰을까?
수년 전 거문도를 답사하다가 삼호 바다를 내려보는 언덕에 거해(巨海) 남상규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공적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비문에 새겨진 거해(巨海)라는 범상치 않은 그의 아호와 참치 원양을 이끈 경력이 내 눈을 사로잡았고 지역에서도 잘 알려진 바 없는 그에게 급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19년 거문도 서도리에서 남화순씨 장남으로 태어나 21세에 2년제 여수 수산학교 어로과를 18회(1940년)로 졸업하였다. 이어서 3년제인 청진 수산학교와 지금의 부산수산대학교 전신인 4년제 부산고등 수산학교까지 3개의 수산학교를 졸업하는 향학열을 불태웠다.
해방 후에는 부산 중앙수산시험장(현 수산과학기술진흥원) 어로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수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원양어업 시험조업 단장을 맡아 원양어업을 개척한 공적은 두고두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남상규 선생은 해외 생활 중 급서하셔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친인척과 여러 경로를 통해 발굴해 왔다. 수산인의 위상을 높여준 남상규의 길을 따라가 본다.
원양어업의 태동
어려운 형편에서도 정부는 원조자금의 20%인 거금 32.6만 달러를 들여 미국 시애틀 수산시험장에서 시험선으로 쓰던 중고 선박 워싱턴(Washington)호(219톤)를 매입하기로 했다. 저인망 어업과 연승 어업이 가능한 냉동설비와 어군탐지기 등 당시로서는 최신 전자장비를 갖춘 종합 시험선이었다.
1949년 우리나라 예산은 1억 8천만 원으로 국민 소득은 70달러가 넘지 않은 가난한 나라였다. 미국의 ECA(경제협력처)의 원조 자금에 크게 의존하던 시절이었고 같은 해 미국 원조 자금은 1억 5천만 달러(환율 450원, 약 68억 원)였다. 그냥 퍼주는 공짜 돈이 아니고 미국의 통제와 불평등한 내정 간섭을 받기로 한 대가였다.
한국 정부로서는 무모한 모험이었지만 배만 있으면 고기를 쉽게 잡아 올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이야 경제 부흥으로 여수 국동항에도 더 좋고 값비싼 선박들이 수없이 정박해 있지만 당시에는 소형 동력선도 귀한 시절이었고 바람을 이용한 범선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다.
군함도 아닌 어선 워싱턴호를 넘겨받기 위해 대한민국 초대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소장과 10명의 해군이 직접 미국 시애틀로 건너갔다. 한국인 중에는 그렇게 큰 디젤 엔진 선박을 구경조차 해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18일 드디어 미국 시애틀을 출발하여 40일 만인 11월 28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많은 국민이 부두에 나와서 환호하였고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뿐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가서 부(富)를 건져 올려라'라는 뜻으로 배 이름을 손수 지남호(指南號)라고 명명까지 해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름 지어 준 원양어선 지남호
12월 6일 부산 제1 부두에서 지남호 명명식에는 3부 장관과 미국 사절단까지 참석하여 성대한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작은 어선 한 척이 항공모함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오늘날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랐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해방 직후 우리의 국력이었고 한계였다.
남쪽에서 부를 건져 올리려 했던 지남호는 해무청에서 관리하면서 도입 의도와는 다르게 운영되었다. 해상순시선 겸 제주도 출장용으로 단순 임무만을 수행한 것이다. 어선으로 활용하려 해도 배를 운용할 만한 인재와 어구들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6.25를 겪으면서 궁핍한 국가 재정으로 단순한 업무에 매월 거액의 관리비가 큰 골칫거리여서 매각에 나서게 된다. 다행히 원양어업을 통한 외환 획득 조건이었는데 임자가 나타났다.
23만 9천 달러에 불하받은 이는 마산에서 몽고간장을 운영하면서 원양어업의 활로를 찾던 제동산업의 심상준 사장이었다. 심 사장 역시 배를 인수하여 6년간이나 활로를 찾아 연근해 어업과 대일 활어 운반선으로 투입하였지만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서 부를 건져 올려라!
남상규 어로과장이 근무하던 중앙수산 시험장에는 OEC(주한 경제조정관실) 수산 고문으로 모간(A. M. Morgan)이 파견 나와 있었다. 남 과장과 전직 참치잡이 선장 출신이었던 모간은 업무적으로 자주 만나다 보니 농담을 나눌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되었다.
남 과장을 만나기만 하면 " 한국도 참치 원양어업에 서둘러 진출해야 한다"고 부추겼고 자기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고 다녔다. 이를 유심히 들어 왔던 남 과장은 고심 끝에 제안서를 올려 국가적 사업으로 "투나 연승어업 시험조업 단 인도양 출어"라는 사업을 인가받기에 이른다.
1957년 6월 26일은 국가적인 관심이 쏠린 역사적인 날이었다. 서둘러 준비한 행사장에 장맛비가 쏟아지자 행사장을 해양경찰대 강당으로 옮겼다. 경찰악대의 경쾌한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상공부 장관과 해무청장 등 귀빈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참석 귀빈들의 축사가 끝나자 단장을 맡은 해무청의 남상규 어로과장의 답사가 이어진다.
우리가 가는 어장은 무더운 적도 부근의 인도양입니다. 수천 마일이나 되는 먼 바다로 기후도 다르고 항해와 조업에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험난한 여건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이상의 실적을 거두어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해외 어장 개척에 국운을 건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은 전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주 특별한 출어식이었다. 앞으로 60일간의 장도에 올라 인도양에 참치어장 개척과 15만 불의 외화 획득이라는 비장한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실제 출어는 이보다 3일 늦어진 6월 29일에야 이루어졌다.
당시 연승참치어업은 일본이 세계시장의 50%인 20만 톤을 독점하는 주력 산업이었다. 시험조업 단장은 남상규 해무청 어로과장이 맡았고 선장은 제동산업의 윤정구씨가 맡아 27명이 승선했다. 기술 고문을 맡은 모간은 대만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드디어 온 국민의 희망을 가득 실은 초라한 어선 한 척이 부산항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지남호 선원들은 부산수대 어로과 출신의 최고 엘리트들이었다. 남상규 단장과 이제호 지도관만 겨우 상어 연승어업을 경험했을 뿐 누구도 투나(참치)를 보았거나 잡아본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원양을 나가 본 적도 없고 인도양도 모두가 초행인 선원들뿐이었다.
부산항이 멀어지자 남 단장은 행사에 전념했던 긴장이 풀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국운이 걸린 중차대한 사업이 이제부터는 모든 게 내 책임이다 싶으니 그 압박감이 대양의 황파가 되어 밀려든 것이었다. 멀리 일본의 시모노세키항이 눈에 들어왔다. 지남호는 엔진 수리와 급유, 선수품을 준비하기 위해 시모노세키항에 잠시 기항할 예정이었다.
배가 정박하자 남상규 단장은 가장 먼저 요시미 수산대를 찾아 나섰다. 혹시나 부산수대 출신 일본인 동문이라도 만난다면 참치 연승 자료를 구하고 싶었다. 다행히 동문을 만나 기본 자료를 얻었고 서점에도 들러 일본 참치 연승 책자인 <원양수산>도 구입하였다.
7월 11일 배 엔진 정비를 마치고 어구들과 식량, 연료를 채워 시모노세키항을 빠져 나왔다. 항해하는 내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벼락치기 참치 공부를 하면서 모간과 합류하기 위해 대만 기륭항을 향한다. 7월 17일에는 임시기지로 사용할 대만 기륭항에 입항하였다.
기술 고문인 모간을 태우고 대만 동쪽 해상에서 어장 탐색을 위한 첫 투망에 나섰다. 빈 낚시만 올라왔다. 게다가 조업 시범을 보여준다는 모간은 첫 투승을 시연하다 허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곧바로 하선하고 말았다. 참치 연승 어법을 지도해 줄 모간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의 갑작스러운 하선은 선원들을 황당하게 했다. 선원들은 당장에 계획대로 인도양으로 가자는 의견과 철수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남상규 단장 주재로 긴급회의가 열렸고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나도 몹시 힘들다. 이대로 포기하고 빈손으로 되돌아간다면 환송 나온 사람들에게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빈손으로 돌아가느니 참치를 잡지 못한다면 인도양에서 남겠다는 결의로 임해 달라.
다시금 항해가 이어졌고 필리핀 근해와 싱가포르 근해로 조업지를 옮겨가면서 시험 조업에 나섰으나 가는 곳마다 빈 낚시만 올라왔다. 그 와중에 가져온 달러는 남아 있지 않았고 연료마저 떨어져 싱가포르에서는 발까지 묶여 버렸다.
남 단장은 점점 초조해졌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낯선 이국 땅에서 수소문 끝에 싱가포르 교포 무역회사였던 한국무역진흥회사를 찾아냈다. 현지에서 2,500달러를 빌려서 간신히 연료와 식량 등 선수품을 보충하여 다시 인도양으로 향한다. 8월 14일 부산을 출발한 지 50일째였지만 여전히 빈손이었다. 아직껏 참치는커녕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다. 넓은 인도양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이었다.
지남호는 다시 이동하여 인도양 니코발제도의 니코발아일랜드 해역에 도착했다. 밤을 새우고 먼동이 터오는 새벽 5시 50분이었다. 스피커에서 선장의 투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좌표! 동경 94도 29분, 북위 7도 48분! 자~ 투승!
그동안 연속된 실패에 마음들은 조급하였고 그물을 잡아 올리느라 부르튼 손짓은 한없이 서툴렀다. 낚싯줄이 내려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길게 쳐진 낚싯줄이 팽팽해진다.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더니 줄을 올릴 때마다 처음 보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고생과 지루함이 일시에 사라지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와~고기다!" 하는 선원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공교롭게도 8월 15일 광복절 새벽에 대한민국에 주는 큰 선물 보따리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원양어업 사에도 길이 남을 첫 투승이었다. 조타실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상규 단장은 급히 무전으로 낭보를 날렸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드디어... 투나를 잡았습니다"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전을 받은 해무청 직원들과 제동산업 관계자들의 환성이 터져 나왔고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즉시 보고되었다. 이날 어획량은 0.5톤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 손으로 이뤄낸 첫 수확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곧바로 새로운 지시가 내려진다. 이제부터는 하루라도 더 조업하기 위해 물이 부족할 테니 세수와 샤워도 금지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15일 남짓 10여 톤을 추가로 잡았고 어획물에는 고가인 투나와 눈다랑어, 새치가 섞여 있었다.
참 좋은 물고기라는 뜻에서 탄생한 고기이름 '참치'
투나를 처음 잡고 보니 우리말 이름이 필요했다. 선원 모두 작명에 참여하였다. 누군가 등에 줄무늬가 있으니 다랑논 같다고 하여 다랑어로 부른 게 최초의 학명이 되었다. 이어서 누군가가 제안한 '참 좋은 물고기다!'라는 의미의 '참치'로 부른 이름이 지금까지 속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랑어와 새치도 구분을 못 했던 시절이었다. 경무대로 선물을 보낸다는 게 가장 큰 청새치를 참치로 잘못 알고 비행기에 실려 보냈다. "우리 어선이 원양에서 직접 잡은 물고기를 먹어보고 싶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소연 때문이었다 한다. 이 대통령은 외국 대사들을 초청하였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청새치를 흐뭇하게 만졌다.
제동산업 심 사장은 미군정시절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윔스의 도움으로 사모아 통조림 제조업체인 밴 캠프(VAN CAMP)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어획물 50톤 중에서 참치 5톤을 첫 수출하여 1,750만 환의 외화를 획득한 것이다. 해무청은 보유 어선들을 대거 원양 참치잡이 선단에 편성하였고 너도나도 참치 원양어업에 뛰어들면서 60년대 개척기의 문이 활짝 열렸다.
지남호의 쾌거로부터 20년 후 한국은 850척의 원양어선을 거느린 세계 3대 수산 강국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게 되었다. 원양어업은 오늘날 반도체 사업처럼 국민을 먹여 살리는 블루오션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전남대학교 동창회보'청경'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