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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식품이 많고 많은 세상에서, 직접 먹거리를 수입하면서 든 생각 중 하나 '눈으로 직접 생산지를 보고, 생산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온라인에 공개된 정보는 선택되고 다듬어져 있어서 매끈하고 좋은데, 정말 실제로도 그럴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 외에도, 나와 내 가족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가진 철학이나 마음도 한 번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생산자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흔쾌히 환영한다는 답장이 왔다. 감사와 기대의 마음을 안고 출발! 포르투갈 남쪽에서 생산되는 꿀의 생산지에서 양봉가를 만났다. 그와 먹거리를 기르고 제품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물론, 자연에 항상 가까이 있는 입장에서 느끼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많이 배우고 생각한 시간이었다.[기자말]
산불 지역을 지나 시골로

세라멜(Serramel)은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포르투에서 약 260km 정도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전 방문지인 아쿠실라 농장에서는 남쪽으로 170km.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내가 사는 포르투갈 남쪽과는 달리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은 외려 한국과 비슷하다. 낯설고도 어느 정도는 친숙한 풍경을 감상하는데 앞쪽에서 심상치 않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인다. 옆자리에 앉은 택시 아저씨가 혀를 차면서 외친다.

"Fogo!"(불!)

산불 9월 중순 경, 포르투갈 북쪽을 휩쓴 대규모의 산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산불9월 중순 경, 포르투갈 북쪽을 휩쓴 대규모의 산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 라정진

지난 9월 15일부터 시작되어, 포르투갈 북쪽을 말 그대로 휩쓸고 있는 산불이다. 중부 유럽에선 물난리라는데, 포르투갈은 불바다가 되었다. 북쪽 해안가 위주로 몇 십건의 화재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소방관 5천 명이 동원되어서 진화작업 중이다(9월 말 기준, 다수 진압되었다. 하지만 소방관 3명을 비롯,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5일 만에 십만 헥타르가 전소되었다. 불로 인한 거대한 연기가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였단다).

한참 산불이 크게 번진 쪽은 해안 쪽, 우리가 있는 곳은 비교적 내륙 쪽인데, 여기도 예외는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 신고를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보려고 하는데, 검고 탁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앞쪽에 벌써 경찰차가 한 대 서 있다. 휙 지나치면서 보니 경찰관이 바쁘게 핸드폰을 두드리는 중이다.

가용 소방인력이나 헬기는 다들 진화작업으로 이미 정신없을 텐데, 제발 제때 필요한 인력이 올 수 있기를 바라며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는 이쪽까진 불이 잘 안 온다면서도, 몇 년 전에 큰 산불이 나서 난리였다고 위로와 불안을 오고 가는 말을 던진다.

멸종 위기 동물 보호구역의 원조귀농부부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세라멜은 말카타 산지를 내려다보이는 곳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사무실과 CEO인 프레데리쿠의 집, 창고가 서로 가까이 오손도손 위치해 있다.

말카타 자연보호구역(Reserva Natural da Serra da Malcata)은 멸종 위기종인 이베리안 링스를 (스라소니 과) 보호하기 위해 지정되었는데, 무척 외지고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다. 수풀과 히스 꽃이 무성하고, 생물학적 다양성도 높으며 특히 다양한 새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차에서 내려 CEO인 프레데리쿠와 그의 아내이자 마케팅 매니저인 리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이 닿는 곳에 프레데리쿠의 증조 할아버지 초상화가 멋들어지게 걸려 있다.

19세기 말, 처음 양봉을 시작하셨는데 반은 취미 삼아 하셨다고. 가족들이 꾸준히 조금씩 양봉을 하다가, 1974년 당시, 20대의 젊은 프레데리쿠와 형이 본격적으로 양봉을 이어받는데 시장 반응이 꽤 좋았단다. 둘은 사업을 더 키우기로 하고, 양봉하기에 이상적인 곳을 찾아 떠난다.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말카타 자연보호구역.

말카타 지역 세라멜 사무실 앞에서 내려다 본 말카타 지역. 외진 곳이다.
말카타 지역세라멜 사무실 앞에서 내려다 본 말카타 지역. 외진 곳이다. ⓒ 라정진

"전 아내인 리타를 만나서 정말 운이 좋습니다. 우리 둘 다 시골에서 살기를 꿈꿨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프레데리쿠 옆에서 리타도 같이 살포시 웃는다. "리타, 남편과 두 분 다 리스본 토박이신데, 덜컥 시골로 이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셨어요?"라는 물음에 다시 미소가 돌아온다. 항상 시골에서 살기를 꿈꿨고,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고.

프레데리쿠는 7명, 리타는 4명의 형제자매가 있는 대가족 출신이고, 두 분 역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손자 손녀는 4명인데, 이제 곧 5명이 된다. 아이들이 잔뜩 옷을 더럽히면서 신나게 노는 것이 무척 보기 좋았단다.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따라온 우리 애들 두 명도 밖에서 정신없이 뛰어노는 중이다. 모래, 돌, 풀, 넓고 열린 공간이 있으면 애들은 알아서 잘 논다.

"봐서 알겠지만 여긴 외지고 아름다운 곳이에요. 새들이 많은데, 이런 새도 있고, 저런 새도 있고..."

눈을 빛내며 이런저런 새들 이야기를 하는 리타가 무척 빛나 보인다. 잠시 새와 말카타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하다가, 생산 시설을 직접 보기로 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위생모, 위생 가운, 위생 신발 커버까지 착용을 마치고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병입실.

소독한 병에 기계로 꿀을 병입하는데, 병입 후 실링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일일이 상태를 검수하면서 최종 실링을 하는 것이 직원들의 임무. 언젠가 TV에서 본 호두과자 포장 장인의 빠른 손놀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빠르고 빈틈없다. 동작과 번득이는 눈빛에 왠지 긴장감이 도는 것을 아이들도 느꼈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조용히 병입실을 지났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벌들

다음은 자동 온도조절장치가 되어있는 창고. 드럼통에 꿀들이 가득 저장되어 있다. 말카타에 직접 벌통을 두고 수확하는 꿀이 있고, 포르투갈 전역의 양봉가들에게서 매입한 꿀들도 있다.

야생 라벤더 꿀은 북쪽 산지, 알가르브, 알란테주 지역에서, 오렌지 꿀은 알가르브 지역에서 들여온다. 들여온 꿀은 1차로 포르투갈 내 랩(lab)에서, 2차로 독일의 랩에 보내 드럼통별로 일일이 검수를 한다. 꿀의 순도, 성분은 물론, EU 기준에 따라 각종 화학성분의 수치까지 모두 검사하고, 화분 테스트 (pollen test)를 통해 주밀원도 꼼꼼히 체크한다.

다음은 채밀실. 오늘은 오크(oak) 꿀을 채밀하는 날이다. 말카타 산지에 둔 벌통들이 트럭에 실려와 채밀기에 들어간다. 산지는 한참 시골인 이곳에서도 한 시간은 더 들어가는 곳에 있단다. 오직 벌통, 야생동물과 새들만이 자리를 지키는 곳.

주밀원에 따라 4~5월에는 야생 라벤더와 히스 꽃꿀을 수확하고, 9월 경에는 오크와 밤꿀을 수확한다. 채밀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제일 먼저 소리를 지른다.

"엄마, 꿀이야! 꿀 냄새!"

세라멜 채밀실 말카타 깊숙한 산지에서 온 벌통들. 오크꿀을 채밀하는 날이다.
세라멜 채밀실말카타 깊숙한 산지에서 온 벌통들. 오크꿀을 채밀하는 날이다. ⓒ 라정진

벌통을 발견한 곰들 저리 가라 흥분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채밀기에 좀 더 다가섰다. 벌집틀에는 따라 들어온 벌들도 가끔 있으니 조심하라고 리타가 옆에서 말해준다.

벌집 틀은 채밀기에 넣어 꿀과 밀랍, 화분(pollen)을 분리한다. 밀랍은 세척하여 케이크 형태로 만들어, 차년도 벌집틀을 만드는 데 이용한다. 벌집을 만드는 벌들의 노동을 좀 더 쉽게 해주려는 것. 화분은 화분 꿀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벌들이 베푸는 것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리타는 벌집틀을 하나 조심스럽게 따로 들어내더니, 둘째의 손가락 하나를 가져가 쓰윽 꿀을 떠준다. 신이 난 둘째는 손가락까지 빨아먹을 기세다. 옆에서 조바심 내는 첫째, 그리고 나까지 손가락 가득 꿀을 떠서 빨아먹었다.

제일 먼저 코 뒤쪽에서 향이 퍼지는데, 희미한 꽃향기와 나무껍질 냄새 같은 향도 난다. 첫 입맛에는 달콤함이 가볍게 퍼지는 듯하다가 곧 아주 묵직해진다. 오크 꿀은 제법 꾸덕하고 진한 것이 왠지 진득하게 달인 약을 먹는 기분도 좀 든다.

채밀기에서 채취한 꿀은 바로 옆의 저장 탱크에 들어가 한 달 정도 머무는데, 그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불순물은 가라앉게 되고, 꿀은 좀 더 점성을 갖게 된다.

채취를 끝낸 벌통은 다시 말카타 산지로 보내는데, 장소는 다르다. 9월이니 말카타의 남쪽으로 보내 겨울을 나도록 하는 것. 즉 여름과 겨울을 보내는 장소가 다른 셈인데(transumância 이동방목), 포르투갈 산악 지역의 양들 역시 이렇게 계절별 이동 방목을 한다고.

말카타 남쪽은 겨울도 영상 10도 전후인데, 이 시기에 만발하는 야생화가 많아 벌들도 계속 꿀을 채취할 수 있다고. 설탕 시럽 공급 없이도 벌들이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 정도란다.

신토불이, 지역에서 얻고 생산하기

채밀실에서 나와 물류실과 창고를 둘러본 후 간 곳은 잼을 만드는 곳이다. 세척실에서는 서쪽 아잠부자(Azambuja)에서 온 싱싱한 토마토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같은 지역 농부에게서 조달할 수 있는 토마토 양이 600kg 정도 되는데, 이 양으로는 부족해서 다른 지역 농부에게서 추가로 1,000 kg의 토마토를 더 사 왔다.

그 옆 조리실에선 호박의 달큼한 향과 열기가 훅 끼친다. 호박 잼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호박 잼과 호두 호박 잼을 제조하고 있는 중인데, 미국으로 수출할 주문이란다. 호박 역시 근처 지역의 농부에게서 구매했다.

포르투갈 산보다 더 저렴한 외국산 (주로 스페인, 프랑스 등)이 있지만 가능한 국산, 특히 근교지역에서 원물을 구매하고 있다는 것이 리타의 설명이다. 가격은 조금 더 들지언정, 식품 안정성과 신뢰성 측면에서 오랫동안 알아온 지역 농부들의 생산물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물론 부득이하게 수입품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예를 들어 호두는 국산의 색이 너무 진해서 최종 산물의 색감이 깔끔하게 나오지 않기에 색이 연한 수입품을 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소수이고, 아몬드, 귀리, 과일, 잣, 꿀 모두 직접 생산과 지역 농부로부터의 원물 매입이 원칙이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포르투갈#포르투갈여행#포르투갈자연보호구역#포르투갈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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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포르투갈을 오고 가며 살고 있습니다. 좋은 글, 좋은 사람, 좋은 장소가 가진 힘을 경험해 왔기에,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나 역시 그렇게 자리매김하기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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