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경사입니까.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을 우리 글로 읽는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 김신성(87)씨
"이번 정부에서 도서 예산을 줄였다면서요? 한국 정치가 반대로 가고 있네요." - 김은미(40)씨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다음 날, 대형서점부터 동네책방까지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저서를 구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는 희비가 교차하기도 했지만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과거 정부가 한강을 '블랙리스트'로 올렸던 일과 현 정부의 도서 관련 정책을 지적하며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강 책 있나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는 한강의 책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특별매대 앞 입구의 줄은 바깥까지 길게 이어졌다. 책 구매에 성공한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실패한 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서점 관계자에게 "재고는 언제 들어오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현재 온라인 서점에서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그의 주요 저서가 이미 품절돼 출판사는 추가 제작에 나선 상황이다. 출판계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 이후부터 이날 오전까지 한강의 저서는 예스24에서 7만 부, 교보문고에서 6만 부 등 총 13만 부 이상 판매됐다. 저서에 따라 400~3000배 단위로 판매가 폭증하면서 소비자의 예약을 소화하기 위한 출판사의 증쇄도 이어지고 있다.
영업 시작 시각인 9시 30분께 찾은 교보문고에는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문구와 함께 특별매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서점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전날 남아 있던 책들은 모두 팔렸다.
텅 빈 매대 앞에서 만난 이진희(31, 남)씨 손엔 마지막 남은 <희랍어 시간> 영문본이 들려 있었다. 경북 울진군에서 온 이씨는 "저보다 먼저 오신 분들이 진열된 책을 5~6권씩 구매했다. 저도 겨우겨우 한 권 집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시각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만난 이아무개(51, 여)씨는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았다"며 "그동안의 수상자들과 달리 젊은 아시아 여성 작가가 받은 게 멋지다. '살면서 이런 날도 오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남은 책을 찾지 못한 그는 "<채식주의자>를 사고 싶어서 개점 시간 맞춰서 왔는데 품절되어 아쉽다"고 했다.
<소년이 온다>를 사러 온 김영빈·김창엽(18, 남) 학생도 서점 관계자에게 "한강 작가의 책이 남아 있는지" 물었으나 "없다"는 답을 듣고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들은 "한국 작가들이 인정을 받는다는 생각에 기뻤고 너무 존경스럽다"면서 "이번 기회에 한강을 포함한 여러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보자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10시 20분께 특별매대에 <검은 사슴>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흰> 등이 입고됐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줄을 지어 책을 손에 집었다. 가장 앞줄에 서서 추가 입고된 책을 종류별로 구매한 이서윤(60, 여)씨는 "어제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밤새 작가님에 대한 영상을 봤다"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다"고 했다. 이어 "함께 시 낭송을 하는 분들과 작가님의 책 낭송을 해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이천에서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온 김신성(87, 남)씨는 "과거 <채식주의자>를 읽고 '아 이 작가는 분명 빛을 볼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며 "한강 작가의 글에는 인간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느껴진다"고 했다. 또 "한국의 드라마와 음악에 이어 한국 문학도 세계적인 반열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사인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우리 글로 읽는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생긴다"면서 "자녀들과 지인들에게 오늘 구매한 책을 선물할 것"이라고 했다.
한강 운영하는 서촌 책방도 '북적'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서촌에는 한강이 운영하는 책방이 있다. 책방 영업 시작 시각은 오후 1시부터였는데, 이곳 역시 문을 열기도 전부터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이 동네에 살던 주민들과 지나가던 관광객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이 한강의 책방을 유심히 살펴보며 눈에 담았다.
"책을 사기 위해 성북구에서 왔다"는 김은미(40, 여)씨는 <소년이 온다>를 구매한 뒤 서점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김씨는 "그간 노벨문학상이라는 말을 듣고는 세계문학을 떠올리곤 했다"며 "이제 우리 문학도 세계문학이 됐다는 느낌이 들어 기뻤다"고 전했다.
그 바로 옆 갤러리에서 일하는 서병학(66, 남)씨는 처음 보는 광경에 멀리서 한강의 책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여기가 작가님 책방인 걸 어떻게 알고들 왔는지 평소와 다르게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며 "최근 근처 다른 식당도 <흑백요리사>라는 넷플릭스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이 일대가 붐비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가지고 오는 것 같다. 이 골목이 기운이 좋나보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주변 책방 역시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7년째 서촌에서 책방을 운영해 온 하영남씨는 "어제 책방에서 독서 모임을 하던 중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다"며 "그 자리에서 손뼉을 치고 눈물도 흘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부해서 취득하는 지식에 한계가 있는 번역서와 달리 한강 작가님의 책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 담겨 있다. 한글로 쓴 책이 노벨문학상을 타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라고 강조했다.
근처 또 다른 책방에서 책방지기로 8년간 일해 온 최범석씨는 "한강 작가 뒤에 붙는 '한국인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너무 신기하다"며 "한국 문학이 세상에 주목을 받게 됐다는 사실과 작가님의 노력을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전했다.
"반대로 가는 한국 정치... 블랙리스트 없어져야"
시민들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지난해 경기도교육청 공문에 따라 학교 현장에서 <채식주의자>가 폐기되는 등 한강이 겪은 부당한 사건에 대해서도 비판의 말을 보탰다.
하영남씨는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당시 (축전조차 보내기를 거부한) 박근혜 정부의 태도를 보고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언론도 한강 작가보다 번역가만 조명해 분노했던 것이 떠오른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한국 문학계에 (부조리함을 없애는) 바람이 불면 좋겠다"고 했다.
김은미씨는 "한국 정치가 (가야 하는 방향이 아닌) 반대로 가고 있다. 이번 정부에서도 동네책방이나 도서관 관련 사업 예산 지원을 줄였다고 들었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사회가 더 나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창엽 학생 역시 "문학 작품을 규제한다는 것은 작가의 표현의 자유를 막겠다는 것"이라며 "이제 그런 (블랙리스트 같은)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