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지나온 자리마다 달팽이 진액 같은 애쓴 자국도 보인다.
- '시인의 말' 중에서
달팽이는 느림의 달인이다. 그런 달팽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달팽이의 진액'이라는 시어를 통해 느끼는 것은 사뭇 다르다. 시의 맛이라고 해도 좋고 시의 힘이라고 해도 좋겠다.
전재복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을 통해 '달팽이의 진액' 같은 시를 읽는 즐거움이 컸다. 생이 어찌 즐겁기만 할까. 즐겁기만 하다면 굳이 시를 쓸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즐겁지 않은 인생사도 시로 읽으니 즐겁다. 다음 시가 하나의 예가 되겠다.
향기는 사라지고
짓눌린 삶의 무게에
시들어버린 남자
처진 어깨 애잔하다
거친 손, 성근 머리칼
잎새 몇 개 간신히 붙잡고는
큰 소리로 호기롭다
가슴 짠한 겨울나무
- <겨울나무 당신> 전문
재밌는 시다. "성근 머리칼/잎새 몇 개" 지나 "가슴 짠한 겨울나무"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늙어간다는 것은 애잔하고 짠한 일이지만 화자의 남편과 겨울나무를 동류항으로 묶은 자리에서 생긴 즐거움이다.
겨울나무는 감정이 없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다. 감정이 없는 사물을 빗대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T.S.엘리엇은 이를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라는 유명한 말로 개념화했다. 주관적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다음 시를 보자.
솜털 하나하나에/돌기가 있어/스치는 바람 한 올에도/벼린 칼인 듯 베인다//가지가 부러져야만/아픈 건 아니지/끝내 지키고 싶은 한 음/가장 가늘고 높은 현이/끊기는 날카로운 비명/허공을 긋고/툭 심장에 떨어진다//(...)//참, 못 났다/남은 현을 챙겨야지/주저앉은 허풍선이 인형에/바람을 채워 세우고/아직 내 안에 건재한/G선을 연주하자 - <G선을 연주하자> 부분
시의 화자는 "가장 가늘고 높은 현이/끊기는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난 뒤에 때늦은 후회지만 "아직 내 안에 건재한/G선을 연주하자고" 자신을 독려한다. 바하는 하나 남은 선으로, 'G선상의 아리아' 같은 불후의 명곡을 남겼다. 그것도 가장 낮은 음을 내는 선으로. 화자도 그러겠다는 뜻이리라. 다만, 그 뜻을 바이올린의 'G선'이라는 훌륭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피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음 시를 보자.
푸른 비를 맞고/아이 하나 낳았으면/땡볕에 입술 까맣게 타다가/쩍쩍 갈라지는 가슴패기/거칠게 밟고/우레로 오시는 靑雨/부끄러움도 잊은 양/온몸 던져 뒹굴며/푸른 아이 하나 배고 싶다//헛구역질 입덧도 요란하게/시들지 않는/아이 하나 낳고 싶다
- 시 <푸른 비를 맞고> 전문
비는 색깔이 없다. 그런데 왜 푸른 비라고 했을까? 아마도 푸른 신록을 촉촉하게 적시며 내리는 비라서 푸른 비라고 했을 성싶다. 거기에 푸른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반영되기도 했을 것이다. 주관과 객관의 호응이랄까.
아무튼 '靑雨'라는 시어에서 느껴지는 신선함이 좋다. 더 신선한 것은 시인이 푸른 비를 보면서 "헛구역질 입덧도 요란하게" 하면서 "아이를 하나 낳고 싶다"는 대목이다. 화자의 남편이 겨울나무에 비유할 만하다면 시의 화자 역시 대동소이하리라. 그럼에도 아이를 낳겠다니! 시를 읽은 마음이 어찌 즐겁지 않으랴.
전재복 시인은 군산에서 살고 있다. 시에서도 바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바다에는 당연히 섬도 있다. 어떤 섬은 "너무 고요해서/아무도 섬의 익사溺死를/알아채지 못한다('<익사하는 섬>")고 했는데 "어디에나 있고/어디에도 없는/섬 하나, 나 하나"로 시가 끝난다. 이 시에서도 섬은 시인의 고독과 부재를 대변한 하나의 비유, 곧 객관적 상관물임을 알 수 있다.
군산에는 해망동과 이어진 "째보선창"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군산항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이 주변에 어판장이 들어서고 고깃배들이 드나들며 활황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매년 초에 풍어를 기원하던 모습을 재현하는 당산제가 이곳 선창가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건물들은 모두 정리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잃어버린 꿈이지만 시에서는 이렇게 다시 살아나고 있다.
조석으로 한 번씩/황토물에 누런 베옷을/벗어 빠는 서쪽 바닷가/선잠 깬 어둠이 방파제를 어슬렁거린다//찰진 어둠을 벅벅 문지르며/밤새 잠 못 들어 뒤척이던 물의 악보엔/분질러진 음표들만/오르락내리락 파도를 두들기는데//멀리 점 하나/점, 점, 점 커지더니/만삭의 배 하나 몸 풀러 온다//서해 해풍과 우격다짐 끝에/별처럼 파닥이는 멸치 떼 쓸어담고/꽃게 쭈구미 새우 박대/휘몰아 돌아오는 돛대 위/산티아고 노인의 늙은 깃발이 부시다 - <째보선창의 꿈> 부분
서해를 황해라고도 부른다. 누구라도 바람 부는 날 서해에 가면 황토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황토물에서 "누런 베옷"을 떠올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담이지만 바람 없는 날 서천에 갔다가 맑은 바다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맑은 바다가 바닥이 뒤엎어져 더럽게 된 것은 바람 탓이다. 군산도 바람이 많은 지역이다. 자연의 바람도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의 바람, 곧 외세도 만만치가 않았다.
전재복 시인의 시가 건강한 것은 지역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시로 형상화를 해온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다음 시는 "조선왕조 500년을 딛고/왜놈에 짓밟힌 치욕의 세월"을 감내해온 600살 잡수신 팽나무가 주인공이시다.
다 떠나도 나는 못 가리/600살 쇠고집으로 뿌리를 지켰네만/허허 이제는 우리 동네 땅 주인이 미쿡이라네/언제 우리가 꼬부랑 국적을 달랬던가//장죽 담뱃대로 대청마루 땅땅 두드리며/여기는 내 땅이여/내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단 말여/쩌렁쩌렁 호통 한 번 치셔야겠다 - <할아버지 팽나무의 큰 기침> 부분
전재복 시인은 전북문학상, 바다와펜문학상, 샘터문학본상, 교원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 시인이다. 나이도 지긋하여 "다 저녁에 노망老望이"들었단다. 그런데 한자가 이상하다. "하긴 老妄과 老望이 별것이겠는가?"라고 시인은 시작노트에 적고 있다. 어떤 시일까?
두 번은 다시 오지 않으리
이생에 미련이 없다
다짐을 두었는데
다 저녁에
노망老望에 들었다
한 번은 더 와야겠다
사랑, 그놈 하나
온전히 잡아 길들이든지
원도 없이 활활
불꽃으로 타오르든지
- <노망老望>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