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중심인 서울, 그것도 각종 대기업 본사 사옥들이 즐비한 서울 강남역과 역삼역 주변에서 전국에서 운집한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기후 시민' 3만여 명이 모여서 "기후가 아닌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으로 '907기후정의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올해 기록적인 폭염을 경험하고는 다가올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함께하는 마음으로 이런 이상기후현상으로 인해 이제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토로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중심인 강남에 모여서 기후위기 극복의 몸부림을 친 것이다.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이들은 기후위기는 오로지 이윤밖에 모르는 탐욕적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있다고 보고 "기후가 아닌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즉 탐욕의 자본주의를 종식시키지 않고서는 이 가공할 위험의 기후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날 강남역에서부터 역삼역 선릉역과 포스코사거리를 거쳐 삼성역까지 행진하면서 "기후 대신 세상을 바꾸자!" "기후 대신 자본주의를 바꾸자!"라고 외쳤다. 이외에도 이들은 작금의 윤석열 정부가 폭주하고 있는 핵진흥 정책에 대해서도 '아니오'로 분명히 답하면서 '탈핵 세상'을 외쳤다.
또한 이날 다양한 환경 의제를 내선 현수막을 앞세우고 행렬의 곳곳에서는 전국 환경 의제들이 불려나왔다. 국립공원 설악산에서까지 케이블카를 건설하려는 이 정부를 성토하고, 새만금과 가덕도에 불고 있는 신공항 건설 계획을 비판했다. 또 4대강사업으로 녹조로 뒤덮여 죽어가고 있는 낙동강을 비롯한 4대강의 현실에 대해서도 토로하고, 울산 신불산에서도 건설하려 하고 있는 울산신불산케이블카 반대 목소리도 나왔다.
이들은 행진 전에 오후 3시부터 907기후정의행진 본대회를 열였다. 서울 강남대로 일대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본대회에서 울려퍼진 선언문은 기후재난이 일상화된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올해 여름에도 역대 최고 평균 기온이라는 '재난 기록'이 경신됐다. 기후재난이 수많은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며 이날 기후정의행진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정록 907기후정의행진 공동집행위원장은 여는 발언에서 "노동, 인권, 여성, 환경, 반빈곤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세상을 일구기 위해 분투해온 우리는 '기후정의운동'으로 서로를 넘나들며 연결됐고, 이렇게 모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착한 자본이, 녹색기술이 온실가스도 감축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거라는, 지난 30년 국제기후체제의 거짓과 위선의 역사가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했다"며 "기후정의운동의 다양한 현장들을 조직합시다. 일터에서, 지역에서, 거리에서 동료들과 시민들을 만나며, 다른 세계를 열어가는 대중투쟁을 조직하자"고 호소했다.
정 집행위원장의 발언처럼 907기후정의행진은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라는 슬로건으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온실가스 감축을 넘어, 기후 불평등·부정의에까지 맞서는 기후정의운동을 천명했다.
행진의 세 기조 역시 '기후위기 시대 존엄한 삶을 위한 투쟁'부터 '탈핵·탈화석연료·공공재생에너지 전환', '신공항·국립공원 케이블카·4대강 개발사업 등 생태계 파괴 사업 중단'에 이르기까지 기후정의의 폭넓은 의제를 포괄했다.
발언자로 나선 김준영 한국노총 금속노련 위원장은 "기후재난은 노동자의 생명도 위협하고 일자리도 위협하는 말 그대로 재난"이라고 지적하며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와 더불어 취약계층이 더 큰 피해를 받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한수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신도시, 신공항, 발전소 등 개발행위를 내심 바라야 하는 것이 건설노동자들이기에 이 자리에 서는 게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면서도 "부정한 개발이익 앞에 서있는 나쁜 굴착기가 되지는 않겠다. 건설과정에 폐기물 무단투기와 같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를 바라만 보지는 않겠다."고 연대의 말을 전했다.
신지연 여성농민회총연합 충남연합 사무처장은 "정부의 농업을 살릴 정책이란 자본의 스마트스토어산업에 농업예산을 투여하고, 농산물 수입을 늘여가는 것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농업은 하나의 '산업' 아니라 생명이 이어져온 우리 역사 그 자체"이며 "공장에서 생산하고, 다른 나라에서 돈 주고 편리하게 사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후재난의 대안도 우리 여성 농민에게 있다. 우리가 지난 시간 꾸준히 해왔던 토종 지키기와 농생태는 상시적인 기후재난에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자리에선 국제연대를 호소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마리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활동가는 "기후정의는 인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가자지구의 해방은 그저 군사점령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필요한 땅, 물, 공기를 되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후위기 시대의 존엄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연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생태 파괴가 곧 기후위기를 불러와... '생태 파괴 멈춰!'
2부 발언에 나선 김현욱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이 좁은 국토에 전국 15개의 공항도 모자라 10개의 공항"이 더 지어지려 한다며 삶의 지속성을 방해하는 생태계 파괴를 멈춰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임희자 보철거를위한금강낙동강영산강네트워크 집행위원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세종보 재가동 정책을 비판하며 "세종보 수문의 재가동은 금강의 죽음"이라고 일갈했다. 또한 그는 4대강사업과 세종보 재가동을 추진한 이명박, 윤석열 정부의 범죄를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그는 또 낙동강에서 창궐하고 있는 심각한 녹조 현상을 지목하면서 "낙동강이 저 상류 안동댐에서부터 부산 하구까지 낙동강 전역이 녹조로 뒤덮였다"면서 "그로 인해 영남주민들은 수돗물과 농산물에서 그리고 공기 중에서도 녹조 독이 검출되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맞고 있다"면서 "하루빨리 4대강 보를 철거해 녹조 위험 없는 안전한 세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혜리 '새벽이생추어리' 운영활동가는 축사에 갇혀 도살될 예정에서 구출된 돼지 '새벽이'의 이름을 부르며 "동물이 기후위기의 피해당사자이자 투쟁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했다. 그는 기후정의행진이 차별적인 체제를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이라면 "이 투쟁 현장에 올 수 없는 이들", 동물을 기억해줄 것을 요청했다.
윤현정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는 지난 8월 29일 헌법재판소가 '탄소중립 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사실을 상기하며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길 선택"한 청소년 기후운동의 역사를 회고하며 "우리 삶을 지킬 최전선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제안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선 에너지의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
가장 많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가진 에너지 부문의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발언들도 이어졌다. 박진영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 집행위원장은 "전기 한번 쓰자고 나오는 고준위 핵폐기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되돌아가는 복원을 생각해볼 때"라며 "윤석열 정부의 핵폭주 정책을 막아내고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기후정의를 위해 탈핵을 앞당길 것"을 주장했다.
이어 강석헌 홍천송전탑반대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동해안 강릉과 삼척에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짓고, 거기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장거리 초고압 송전망을 추가로 건설"하고 있다면서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 농촌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는 부정의한 에너지 시스템을 비판했다.
마지막 발언자로 나선 박규석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장은 "석탄발전소 폐쇄로 인해 생존권을 위협받는 발전노동자들이 있다"면서도 "노동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석탄발전소 폐쇄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너지 시스템의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공공재생에너지를 통한 총고용보장을 요구한 정의로운 전환의 국내 첫 파업"이 성사됐음을 알리고 연대를 요청했다.
907기후정의행진은 본집회·행진 외에도 다양한 부대행사와 퍼포먼스를 통해 요구사항을 표현했다. 36개 단체가 사전부스를 운영했고, 사전 오픈마이크에서 다양한 참가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들이 위치한 역삼역(구글코리아·GS 칼텍스)에서는 이윤에 의한 생태파괴에 맞서는 행동이, 선릉역(쿠팡로켓연구소)에서는 기후재난과 불평등에 맞서는 행동이, 포스코 사거리(포스코) 앞에서는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요구하는 대형 만장을 펼치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