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순이'. 어릴 적 나와 추억을 함께 했던 개 이름이다. 당시엔 지금과 달리 대개가 이름이 없었을뿐더러 기껏해야 거멍이‧노랑이‧덕구라 부르던 시절, 요즘으로 치자면 셔리‧챨리‧지민이 부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이름이었다.
야무지고 똑똑했다. 굳이 대문이 필요 없었다. 쥐도 잘 잡았다. 새끼를 많이 낳았는데, '개순이'를 흠모한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갔다. 그때마다 이별이 서러워 며칠을 눈이 퉁퉁 부어 지냈다.
개순이는 16년을 살았으니, 사람 나이로 거의 90세였겠다. 천수를 누린 셈이다. 눈을 감을 때 개순이 이웃이기도 했던 집 뒤 암자 스님이 불경을 외웠다. 하얗게 눈부신 진도개였다.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 안 나는, '섬'
진도(珍島)는 섬이다.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그런데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진도대교(珍島大橋) 때문이다.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울돌목이다. 물살이 세고 거칠다. 한자로는 명량(鳴梁)이고, 옛 이름은 돌맥이다.
병목처럼 생겼는데, 큰 물결과 커다란 파도가 좁은 해협을 만나 요동을 치며 격렬하게 소리친다. 이 거친 물살을 타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1984년에 다리가 놓였다.
8월 24일 토요일, 진도대교를 건넜다. 예불여진도(藝不如珍島), 예술로는 진도만 한 곳이 없다, 는 섬에 들어섰다. 밭일하는 아짐은 남도들노래 한 자락 애간장 녹이게 뽑아내고, 논일하는 아재도 육자배기 정도는 할 줄 안다고 하니 그 비유가 당연하다 싶다.
이 섬에 세 가지 보물과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삼보(三寶)는 진도개와 홍주와 미역이고, 삼락(三樂)은 글씨와 그림과 노래란다. 미역이 아닌 구기자라고 했지만 내겐 미역이었다.
첫 여정(旅程)은 벽파진(碧波津)이었다.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항구다. 진도와 육지를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울돌목이지만, 물살이 거칠어 배를 띄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을 오가는 배는 벽파항이 최상이었다. 목포와 완도‧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였으며, 제주 사람들이 미역과 귤을, 쌀과 소금으로 바꾸어 간 곳도 이곳이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조선 모든 수군 이끈 채 배 12척이 전부였지만, 이곳에서 명량해전 최후의 전술을 고민했다. 뒤로 높지 않은 바위 언덕에 정자 하나가 풍경처럼 서있다. 벽파정(碧波亭)이다. 1207년(고려 희종3) 처음 세워졌다. 2016년에 다시 지었다.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들어온, 제주도로 건너가는 이들의 사연과 시구가 서리맞은 감나무에 홍시처럼 주렁주렁 걸려있다.
정자 위쪽 정상에서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忠武公 碧波津 戰捷碑)가 웅장하게 바다를 내려다본다. 눈맛이 시원하다. 해무가 낮게 깔린 바다가 한 폭의 수묵화 같기도 하다. 전첩비는 1956년 진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바위 언덕 정상을 깎아 만든 거북좌대가 볼만하다. 동양 최대 높이란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이긴 것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순절자들을 기록했다.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소전은 진도 출신이고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소전은 '소전체'로 일가를 이룬 당대의 명필이었다. 서화 수집가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도 높았다. 무엇보다 추사의 '찐팬'이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 치카시도 추사에게 진심이었다. '세한도(歲寒圖)'는 말할 것도 없고 편지까지도 열심히 수집했다.
추사가 조선의 명필에서 동양의 명필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도 그의 공이다. 태평양전쟁 중임에도 일본까지 온 소전의 정성에 감복하여,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양보했다. 얼마 후 후지쓰카의 연구실이 공습을 받아 불탔다.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부친이 소장하고 연구했던 1만여 점에 이르는 추사 자료 전부를 과천문화원에 기증했다. 추사기념관인 과지초당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소전은 국회의원을 지내며, 정치자금을 마련하느라 집념으로 가져온 세한도를 저당 잡혔단다. 끝내 돈을 갚지 못해 품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어떠했을까.
붓글씨를 서도(書道)에서 서예(書藝)로 끌어 올렸다고도, 추사 이래 최고라고도 평가받는 소전이다. 읍에 소전미술관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인, 전첩비 앞에서 생각이 많았다. 글씨를 만끽했다.
벽파진은 삼별초 대몽항쟁의 중심이었던 용장성의 관문이기도 했다. 고려 무신정권은 몽고군에 쫒겨 강화도로 들어가 39년을 머물렀다. 원종이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삼별초군은 이를 거부하고 왕온(溫)을 황제로 추대했다.
총지휘관 배중손(裵仲孫)은 일천여 척의 배를 이끌고 1270년 6월 2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2개월 17일 항해 후 벽파진에 도착했다. 용장성에 터를 잡았다. 상륙하여 적응하기도 벅찼을 터인데, 짧은 시간에 13km 성벽 쌓고, 궁궐까지 짓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만약을 위해 후방기지를 준비해 놓은 듯하다.
1271년(원종 12)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정부군과 홍다구의 몽고군도 벽파진에 상륙했다. 5월 15일 여몽연합군은 삼별초를 깨뜨렸다. 진도를 남으로 휩쓸며 남도진성까지 몰아붙였다. 왕온도 배중손도 죽었다. 김통정(金通精)은 생존자를 이끌고 제주도로 후퇴했다. 세력을 키우지만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에게 완전 진압되었다. 삼별초 전쟁은 진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많이 죽고 많이 끌려갔다.
용장성 홍보관을 나와 진도읍 쪽으로 4km 남짓, 왼쪽 언덕에 꼬막 껍데기를 엎어 놓은 듯한 묘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유재란 순절 묘역'이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곧바로 북상하여 신안 당사도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진도로 상륙하였다. 이때싸우다 죽은 이들이 묻힌 곳이다.
약 230여 명의 죽음, 그 232기의 무덤 중 그러나 딱 16기 이외에는 주인이 없다. 삶의 터전을 지키며 이름도 채 남기지 못한 죽음들이다. 도로표지판이 없어 겨우 찾은 인적 끊긴 사당 뜰을 따가운 햇살만 서성거렸다. 나라를 위해 일본과 싸우다 맞이한 저 죽음이 당당해야 하는데, 왜 자꾸만 쓸쓸하게 느껴지는지.
내 다시는 '개 팔자 상팔자'란 말 하지 않으리
운림산방에 가기 전 '진도개테마파크'에 들렀다. 개순이의 추억 탓이라 하자. 진도개 기원설 중 한 가지. 몽고군이 삼별초군을 토벌하러 올 때, 군견들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이 진도개의 시원이라는 가설이다. 자신들을 죽이러 와서 왔던 개들이 진도를 대표하는 개들이 된 셈이다.
11시에 진도개 공연이 있었다. '개쇼'라고 했다. 붓을 입에 물고 도화지에 칠했다. 풀쩍 뛰어 링을 통과했다. 숫자에 맞추어 컹컹 짖기도 했다. 원형 트랙을 경마장 말처럼 헉헉, 뛰기도 했다. 삼복더위에도 저리 뛰었을 것이다. 땀샘이 없어 인간들보다 더위를 더 탄다는데, 땀을 흘려 체온을 식힐 줄 아는 우리는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손뼉 치며 환호했다. 너희들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내 다시는, 개 팔자 상팔자라는 말을 하지 않으마.
운림산방까지 10분 남짓, 진도읍을 벗어나니 오르막길이다. 왕무덤재라 한다. 삼별초 왕온의 묘가 있던 자리여서 붙은 이름이란다. 묘소 앞을 지난다. 무덤을 알리는 안내판이 큼지막하다. 정유재란 순절묘역과는 달랐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꼭 같게 오는데, 그렇다고 그 모습이 다 같지는 않나 보다.
삼별초 공원도 있다. 퇴각하던 삼별초군이 여기에서 큰 전투를 벌이지 않았을까. 왕온은 홍다구에게 목이 잘리고. 자주국방의 의지를 가지고 몽골과 맞서 싸웠던 삼별초를 주제로 조성되었다고 안내한다. 가족 휴양지로 좋다고 한다.
남화의 산실 운림산방(雲林山房), 조선말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말년에 거처한 화실 당호다. 첨찰산 깊은 골에 운림(雲林)이 가득한 곳에 앉은 산방(山房)이란 뜻이다. 이름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첨찰산을 병풍처럼 두른 멋진 터다. 좌측은 쌍계사다. 우리나라에 있는 여섯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다. 별 뜻은 없다. 양쪽으로 계곡을 두고 절터를 잡았다는 것이니.
마루에 앉았다. 푸른 하늘에 구름 점점이 흐르고 매미 웃음소리 가깝고, 새소리 멀리서 화음을 맞춘다. 하얀 수련 사이로 잉어 펄떡이고 연못 중앙 섬엔 백일홍이 붉었다. 전통 정원이 천원지방이라 하여 사각형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원형으로 된 섬을 둔다. 이곳은 오각형이다. 창경궁 연못을 본떠 오행에 따른 오방색을 구현했다고 한다.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뜨자 운림산방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소치는 먹고 살기 힘든 진도를 떠나라고 아들에게 유언했다. 그의 손자 남농 허건은 목포에 터를 잡았다. 소나무를 잘 그렸다. 그림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지금의 운림산방은 그의 노고다. 5대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소치의 본관은 양천이다. 내력을 따라가면 조선조 광해군에 이른다. 임해군의 귀양지로 진도가 회자되면서, 임해군 처조카인 허개가 먼저 내려왔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지 임해군은 강화도로 갔지만 그는 주저 앉았다. 진도 홍주(紅酒)가 이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허씨 집안의 가양주 만드는 비법에 지초(芝草)가 합해졌다는 것이다. 유배 오신 양반님네 그 붉은색 유혹에 빠져 시름을 달래고, 한양에 돌아가 추억에 입맛 다셨을 터이다.
진도 여행의 꽃은 '토요민속여행'이다. 두 곳에서 공연을 한다. 향토문화회관은 진도읍에 있고 2시 공연이다. 국립남도국악원은 남쪽 바닷가 아리랑 마을에 자리잡고 3시 공연이다. 이동 거리는 차량으로 30여 분. 모두 무료다. 신이여,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결국 신발점을 쳤다. 향토문화회관으로 갔다.
공연의 여운을 되새기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도착한 남도진성. 삼별초군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도,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도 한다. 삼별초군이 최후까지 격전을 벌였고, 배중손도 여기서 죽었다. 임진왜란 때 무너졌던 것을 다시 쌓았다는데, 보존이 잘됐다. 1990년 초만 하더라도 성 안에 민가 있었는데 이젠 없다. 관아 건물만 들어선 성 안이 휑뎅그렁했다.
성에서 서쪽으로 바닷길을 따라 십여 리, 진도, 아니 팽목항이다. 햇살은 밝고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고, 한여름 같은 조용한 날 늦은 오후의 고요함 속에서 노란 리본이 선명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리운 사람들의 추억은 지워지지 않나 보다. 돌아오지 못한 304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항구에서, 그날도 조도로 관매도로 제주도로 배가 떠났다.
마지막 여정은 세방낙조다. 바닷길을 따라 나아갔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일몰을 보려고. 중앙기상대가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전망지'라고 보증했다. 뿌린 듯 늘어선 섬들 이름도 좋았다. 손가락섬, 발가락섬, 가사도, 사자도 등. 해와 바다 사이가 두 뼘 정도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다로 가는 데크가 보인다.
발아래로 태풍이 지나간 강물처럼 바다가 흘렀다. 진도는 물길이 거칠기로 우리나라 제일이다. 이곳 전망대 남쪽, 팽목항 앞 바다에 크고 작은 섬 150여 개가 모여 있다. 새 떼처럼 많다고 해서 이름마저 새 섬, 조도(鳥島)군도다. 장죽도‧맹골도‧거차도‧독거도 수로가 모두 사납다. 울돌목 못지않다. 오가기도 힘들고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세월호도 이 물살에 잠겼다.
자연산 돌미역 중 으뜸이 진도곽(珍島藿)이다. 해남윤씨도 탐냈다던 미역이다. 조도군도에서 건져 올렸다. 물살이 빨라 오염된 바닷물이 머무를 새가 없고, 질긴 생명력으로 거친 물살을 이겨내고 자랐다. 줄기는 오독오독하고 이파리는 쫄깃쫄깃하다. 산모용으로 최고다. 두어 시간 폭 고아야 한우 사골 같은 진한 국물이 우러난다. 그래서 '사골 미역'이다.
주민들 경고 무시하고 훈련 강행해 참사 초래한 수장
해가 바다에 가까워졌다. 섬과 섬 사이에서 빨갛게 변하는가 싶더니 바다와 하늘을 주황빛으로 채워나간다. 주황빛 낙원길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아름다움은 때로 부담스럽다. 무어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워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노을을 보고 산에 불이 난 모습이라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해가 산들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는 거야. 내일 아침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잊지 말라고 아름다운 빛을 비춰주는 거란다"라고 했단다. 세방낙조가 저리 붉은 것은 무슨 연유인지.
진도를 이야기하던 진도가 고향이라던 아리따웠던 분이 아리랑 마을을 지날 때, 육자배기 가락으로 진도아리랑을 불러주었었다. 소리가 맑았다. 장독대 곁에 피어난 봉숭아 꽃잎 같았고, 샘물에 떠 있는 하얀 구름 같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진도를 땅이 기름지고 농수산물이 풍부하다며 옥주(沃州)라고 기록했다지만 그렇지 않다며, 진도 호미는 끝이 날카롭다고 했다. 뭉툭해서는 자갈밭을 팔 수 없다면서. 1970년대 초반 소포만 방조제를 쌓기 전까지 진도읍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간척지가 늘어나면서, 진도 큰 애기 쌀 두 말 먹고 시집가기 힘들었다, 는 말도 사라졌다고 했다.
진도는 제주로 유배를 떠나는 출발지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유배의 땅이었다. 얼마나 많이 왔으면 조선 영조 때 전라감사가, 진도에 유배자가 너무 많아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죄 없는 섬사람들까지 굶어 죽을 판이니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는 건의까지 했을까.
울돌목에선 조선 최대 해양 참사가 일어났다. 1656년(조선 효종 7) 추석에 전남 우수사 이익달(李益達)이 주민들의 태풍 경고를 무시하고, 수군 훈련을 강행했다. 전선들이 깨지고 떠내려가고 가라앉았다. 이때 죽은 수졸(水卒)이 1천여 명이었다. 진도군수도 빠져 죽었다. 이익달은 크게 책임지지 않았다.
죽음에도 격이 있어, 살던 집에서 가족의 품에서 예견되어 죽는 게 좋은 죽음이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살아서 지지리도 고생했는데, 죽음까지 갑작스럽다면. 거친 자연환경‧두 번의 국제전쟁‧유배의 땅, 긴 세월 시련과 한이 어찌 없었겠는가. 인간이 인간다운 건, 잊지 않으려 노력해서다. 러시아 정교회 장례 미사 때 진혼곡은 언제나 '영원한 기억'이란다. 영원히 기억 속에 살아 있으라, 이것을 반복한다고.
영화 <코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살아 있는 세계에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진도의 창은 진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진도아리랑> 부르며 삶을 자위하고, <진도씻김굿>으로 죽음을 위로하고, <진도다시래기>로 상주를 달래고, <진도만가>로 북망산천으로 가는 길을 열면서. 잊지 말라고 노을이 붉게 타오르듯 그들도 기억하려 노래를 불렀으리라.
진도 창을 들으며, 진도의 죽음은 삶에서 멀어 보이지 않았다. 고은 시인의 표현대로 '돌팔매를 하면 맞을 거리'처럼 가까워 보였다. 박구용 교수는,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했다. 씻김굿은 해남‧신안‧영광 등에도 있다. 그런데도 진도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음을 이웃처럼 여기고 죽음 그 너머까지 보듬으려는 깊이 때문이 아닐지 싶다.
진도를 다녀와서 꽤 길게 진도앓이를 했다. 이어폰에서는 진도아리랑이 끊이지 않았다. 씻김굿 공연도 여러 번 돌려보았다. 그리고 진도를 또 다녀왔다.
여행기를 쓰면서 <남도들노래>를 듣고 있다. 논에 모를 심으며 부르는 가락인데 상사소리라고도 한다. 한 떠꺼머리총각이 자기 논에서 하얀 허벅다리를 내놓고 모를 심는 처녀의 모습을 보고 그리움이 깊었다.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 길을 나서면 온통 짧은 치마 반바지다. 그 떠꺼머리총각이 환생하여 이 거리를 걷는다면, 글쎄다.
내 기억 속 섬은 드러난 낭만이 먼저였다. 기준은 멋짐이었다. 진도는 그렇게 평가할 수 없었다. 숨겨둔 나라 같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깊이 감추어 둔 무언가를 다 보지 못한 듯해서다. 남도국악원 공연이 토요일, 향토문화원 공연이 일요일. 아니 반대라도 괜찮겠다. 예전에는 남도국악원 공연이 금요일에 있었다는데.
토요일 공연 후, 세방낙조에 젖어 들고, 일요일 공연까지 즐기며 느긋하게 둘러보면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아쉬움 한 자락은 남겨 두라는 진도군의 깊은 뜻일 수도 있겠다. 진도대교가 있으니 더 자주 들르라는. 다리 건너니 해남 땅이다.
여행을 기획한 화순군 최순희, 남도한바퀴에서 만난 인연을 이어 세심한 안내를 해주신 한정숙‧용장성에서 진도 이야기를 깊게 들려준 한석호‧운림산방에서 만난 김인영 진도군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