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성폭력 피해자들이 만든 '열매'의 첫 모임에 <오마이뉴스>가 함께 했다. 취재한 내용을 이날 참석한 한 피해자의 시선으로 재구성해 기사를 작성했다.[기자말] |
나는 35번이다. 보고서 속의 나는 번호로 존재한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6월에 내놓은 종합보고서 말이다.
나는 식당을 운영한다. 2024년 8월 29일, 오늘은 마음이 바쁘다. 점심 장사만 마치고 가야 할 데가 있다. 서둘러 차에 올랐지만 옴메, 약속 시간인 오후 2시보다 15분 정도 늦어버렸다.
광주 화정동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 2층 다목적실. 나처럼 보고서에 번호로 적혀 있는 이들이 원을 그린 채 앉아 있다. 빈 의자가 보여 나도 앉았다. 비로소 자리가 꽉 찼다.
나는 열매다. 내 앞의 그들도 열매다. 우리는 스스로를, 서로를 열매라 부르기로 했다. 오후 5시 18분 나는 열매의 대표가 됐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5·18 성폭력 피해자, 나아가 생존자이자 증언자이다.
나는 35번, 아니 열매 대표 김복희다.
온기
가수 임영웅의 노래 '온기'가 흘러나온다. 맞은 편 앉은 32번의 머리가 짧다. 32번, 아니 이남순은 암 투병 중이다. 항암치료 때문에 지팡이를 짚어야 했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단단했다. 자신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나 멋있지?" 한 마디를 툭 내뱉는다.
그 옆의 2번, 아니 김선옥이 그 말을 받는다. 2001년에 이어 2023년에도 암과 마주한 그는 7개월 전 항암치료를 마쳤다. 우리 모두를 주욱 둘러본 김선옥은 "이 모습도 못 보고 죽을 뻔했네"라며 암시랑토 않게 농담을 던진다.
열매는 씨앗을 품고 있다. 씨앗은 그 자체로 가능성이자, 희망이다. 김선옥은 2018년 5월 처음 얼굴과 이름을 내놓은 채 5·18 성폭력 피해를 폭로했다. 그의 용기가 열매가 돼 다른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냈고, 그 목소리가 다시 열매가 돼 국가의 진상조사로 이어졌다.
김선옥에게도 열매인 사람이 있다. 검사 서지현. 김선옥의 용기 4개월 전 서지현의 용기가 있었다. 김선옥은 서지현의 '미투(Me Too)'에서 발화의 힘을 얻었다. 오늘 이 자리에 서지현도 앉아 있다. 손석희 앞에, 카메라 앞에, 전 국민 앞에 앉았을 때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1번, 아니 최경숙도 서지현을 보고 가슴에 열매를 품었었다. 최경숙이 조심스레 서지현에게 다가간다. 서지현이 최경숙을 꽉 껴안는다. 최경숙이 서럽게 운다. 서지현도 눈물을 흘린다. 서지현은 꽃 한 송이를 가져왔다. 이름처럼 하늘을 나는 새를 닮은 극락조화가 열매들 가운데 놓였다. 비상하는 모습의 극락조화. 꽃말은 불멸이다.
목포에서 온 김○○에겐 서지현·김선옥 두 사람이 열매였다. 한때 세상을 등지려 했던 그는 두 사람 덕분에 고통을 다짐으로 바꿨고 스스로 열매가 됐다. 예명을 써왔던 그가 오늘 다른 열매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그의 두 손에 무화과 한 아름이 들려 있다. 목포와 광주 사이 영암에선 꽃이 없는(無花) 열매, 무화과가 유명하다. 그는 "무화과가 딱 우리 같아요. 함께 용기 내봐요. 죽다 살아났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열매의 열매'인 서지현은 우리에게 영웅이다. 서지현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되레 우리에게 "여러분이 제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모두가 박수를 보낸다. 함께 운다. 다 같이 웃는다. 서지현은 "존경한다"고 말한다. "사랑한다"고 되뇐다. 어째야 쓰까. 마음이 따숩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 분노, 좌절, 이런 것들과 싸워 이겨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억울하기만 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과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 서지현
용기
폭동으로 불리던 5·18은 이제 민주화운동이 되었다. 그때 발생한 국가폭력에 모두가 분노했고 공감했으며 널리 알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때의 경험을 자랑스레 여긴다.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44년 전 법전엔 '강간과 추행의 죄' 대신 '정조에 관한 죄(형법 제32장)'가 적혀 있었다. 1995년까지 그랬고 법이 바뀐 후에도 그 망령이 사방을 떠돌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가 아닌 정조를 잃은 자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해 그 자체 말고 다른 것과도 힘겹게 싸워야 했다. 사회의 편견, 주변의 시선을 쉼 없이 견뎌야 했다. 따스한 품이었어야 할 가족조차 우리에게 등을 보였다. 심지어 '내가 왜 그 길을 지났지?', '왜 그때 그 버스에 탔지?' 자책하는 스스로와도 싸워야 했다. 그런 싸움 속에서 우리는 포도시 살아남았다.
진상규명 후에도 우린 여전히 싸운다. 또 계속 살아야 한다. 넘어야 할 산이 더 있다. 국가의 사과, 명예회복과 치유, 합당한 배·보상이 필요하다. 서지현이 말한다. "당장 치유되지 않을 수도, 끝까지 고통을 잊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럼에도 서지현은 강조한다. "하지만 행복할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모였다. "혼자 있을 때 많이 우울했다"던 이연순은 "여기 오니 마음이 따사로워진다. 올여름 햇볕이 뜨거웠던 만큼 우리의 열매가 더 튼튼히 열렸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정현순은 "세포 속에 트라우마가 찍혀 있다"고 말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피해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던 그는 그럼에도 "나의 선택에 따른 나의 삶"을 말하며 이 자리에 굳게 서 있다. 그는 "한 인간을 이렇게 망가뜨린 폭력에 대해 국가가 잘못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국가폭력뿐만 아니라 성폭력 자체에 대한 사회의 성장에도 일조하고 싶다"고 강조한다.
김선옥은 2018년 폭로 후 6년의 삶이 1980년 5월과 똑같았다고 회상한다. "맨발로 제주도 바다를 바라보며 '5·18의 기억을 다 날려달라'고 빌었다"던 그 역시 "다시 다 채워져 버렸네"라며 이 자리에서 웃는다. 그는 "우린 부끄러운 일 하지 않았다. 열심히 잘 살자. 살아남아야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서 "내 딸이 내 피해를 떳떳이 말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 최미자 또한 "내가 바라는 결실은 용기"라며 "우리 용기 내 함께 나아가자"고 덧붙인다.
우리의 용기에 힘을 보태줄 사람들이 이 자리에 함께 있다. 솔찬히 든든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우리를 면담했던 윤경회 팀장과 이다감 전문위원이 열매의 활동을 지원한다. 하주희·김수아 변호사와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 치유재활팀 이미현 팀장·김문선 팀원은 배·보상 절차와 치유를 돕는다.
향기
출산을 앞둔 □□□의 첫째 딸이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어머니 대신, 언니 대신 이 자리에 온 둘째 딸이 마이크 앞에 선다. 편지를 바라보고만 있다. 한 글자도 입에 올리지 못한 채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를 상담했던 이다감이 대신 편지를 받아 든다. 그가 내뱉은 말 대부분에 눈물이 섞여 있다.
"엄마, 큰 딸이예요. 제 기억엔 어릴 때 항상 정신병동을 입·퇴원하던 엄마의 모습이 남아 있어요. (...) 올해 (제 인생) 32년 만에 엄마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희망과 미래가 없어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는 엄마의 증언을 듣고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 남은 인생 편히 사시고 당당히 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엄마라서 감사하고 많이 사랑합니다. 저희 엄마처럼 이런 피해를 겪고 살아오신 모든 분들에게 본인 탓이 아니라고,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
의 딸
그라제. 오늘 모인 열매 15명은 그러려고 한다. 열매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우린 10월 1일 다시 모인다. 그것도 국회에서. 2018년 서지현처럼, 2024년 열매는 카메라 앞에, 전 국민 앞에 선다. 열매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 또 다른 열매의 탄생을 요청하기 위해, 그리고 열매가 지닌 힘을 알리기 위해.
두렵기도 하다. 겁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린 안다. 열매는 겁나게 힘이 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