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는 1982년 가수 이용이 부른 '서울'의 가사 일부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종로에는 귤나무를 심고, 을지로에는 망고나무를 심어보자고 바꿔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날이 곧 올 것 같다.
어릴 때 4계절이 뚜렷했던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웠다. 1년 내내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리지도, 1년 내내 추워서 손발을 떨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봄의 따스함, 여름의 무더움, 가을의 화려함, 겨울의 포근함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4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뚜렷했던 4계절이 점차 변하고 있다. 봄과 가을은 점차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있는 것 같다. 올 여름을 보내면서 어쩜 겨울도 없어지고 여름만 남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전 세계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기후 변화가 심상치 않다.
밤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일 때를 말하는 열대야 기세가 무섭다. 서울을 기준으로 열대야가 한 달 넘게 지속되면서 2018년 26일 기록을 가뿐히 갈아치웠다. 더위가 한풀 꺾여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라는 처서(處暑)가 지났지만 아직도 전국 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고 있다. 대구의 더위 때문에 붙은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 별명을 전국 어느 지역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이렇게 더운 원인은 지구온난화 때문이고 주범은 이산화탄소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산업혁명 당시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어쩌면 올 여름이 앞으로 있을 여름 중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는 예상도 한다. 우리는 지금 기후위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기후위기는 노동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먼저 노동자는 기후위기로 고용 불안과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고 정부는 2036년까지 전체 58기 석탄화력발전소 중에서 28기를 폐쇄하기로 했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고용이 불안정하다. 발전노조에 따르면 폐쇄가 결정된 석탄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공공과 민간부문 노동자는 총 2만 5천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딸린 식구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10만 명에 육박할 것 같다.
그래서 석탄화력발전소를 바람, 태양, 물 등 재생에너지발전소로 전환하여 노동자들의 고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이유다. 이처럼 기후위기와 산업전환은 별개가 아니라 정의롭게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기후위기로 위험에 처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구해야 한다.
또한 기후위기로 인한 폭염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강력한 살인 무기와 같다. 뙤약볕에서 일하거나 폐쇄된 채 찜통 더위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온열질환을 겪게 된다. 그런 대표적인 업종이 건설업이다.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는 잠깐 쉴 그늘막도 없이 내리쬐는 땡볕에 그대로 노출된다. 오죽하면 땀으로 배출되는 소금기를 보충하기 위해 식염정을 따로 먹겠는가.
정부는 폭염 때는 건설노동자들이 작업중지권을 행사 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어떻게든 공사를 빨리 끝내려는 사용자의 요구로 현장에서 지켜질 리 만무하다. 노동자의 건강에는 관심없고 공사 기간 단축으로 더 많은 수익을 내려는 사용자들의 욕심이 도를 넘었다.
이밖에 폭염 속에서 환기도 되지 않는 찜통같은 배 안에서 작업하는 조선 노동자, 아스팔트의 뜨거운 지열을 견디며 헬맷까지 쓴 채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배달 노동자, 그늘 한점 없는 들판과 사우나 같은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농업 노동자 등 우리 주위에는 기후위기에 취약한 노동자들이 많다.
국제노동기구(ILO)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 34억 노동자 중에서 70%가 넘는 24억 명이 폭염에 노출되어 있고 매년 2만 명 정도가 폭염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폭염에서 일하다 온열질환으로 쓰려져 사망하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다. 거제도 조선소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 2명이 고온의 밀폐된 곳에서 작업하다가 사망하였고,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 청년 노동자가 구토 증상을 보인 뒤 쓰러져 가족 곁을 떠났다. 2023년 한 해에만 폭염에 따른 온열질환자가 총 2818명이었고 이 중 32명이 사망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여름 징역살이는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기후위기로 인한 폭염은 증오를 넘어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아간다. 노동자들은 기후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가만히 있으면 정부가 잘 해결해 줄거라고 믿는 낭만적인 시대는 끝났다.
특히 노조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철저히 사용자 이익을 대변하는 지금의 정부하에서는 더 그렇다. 노동자가 직접 나서서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노총은 이번 '907기후정의행진'에 27개 산별연맹과 150만 조합원이 연대하여 세상 바꾸는 일에 적극 참여하려 한다. 2024년 9월 7일 강남대로에서 한국노총 150만 조합원과 일반시민이 어우러져 기후위기로 위험에 빠진 지구, 대한민국 그리고 노동자를 구하는 행진에 함께 할 것이다.
'2000만 노동자여 단결하자.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행진에 참여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우상범 님은 한국노총 정책 1본부 국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