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서 활동가로 3년째 일하고 있다. 작은 도서관은 말 그대로 규모는 작지만 하는 일은 많은 곳이다. 그 중 오늘은 우리 도서관에서 참여하고 있는 '교육 후견인제' 사업에서 일어난 사례 한 가지를 공유할까 한다(서울시교육청 에서 도입한 이 제도는, 복지 사각지대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도 지원받게 돕는 제도다).
26일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작은 변화이지만 아마 모두가 같이 기뻐해 주실 듯해 동의를 얻어 공개하게 되었다.
아침을 깨운 카톡... "누가 민철이 좀 깨워주실 분 없나요"
며칠 전 아침, 교육 후견인제 단톡방에 교육복지센터 소속 보라쌤(가명)이 급한 듯 메시지를 띄웠다. '누구, 민철이(가명) 집에 가셔서 민철이 좀 깨워주실 수 있는 분 있나요?'란 내용이었다. 이곳 톡방에는 센터 담당자와 지역공동체 멘토 선생님들이 함께 하고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몇 시까지 가면 되나요?'라고 답장했다. 답을 받고 차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지금부터 26분이 걸린다고 한다. 출근 시간이라 분명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 각오를 하며 출발했다.
교육지원청 산하인 교육복지센터는 지역의 유-초-중-고 돌봄이 필요한 학생들을 관리 지원하는 곳으로, 학생 한 명당 월 10만원 정도의 후원금이 나오는데 이는 아이들의 식사, 물품, 의료비로 쓰인다. 센터는 또 지역공동체 즉 키움센터, 아동지역센터, 작은 도서관 등에 협조를 요청해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만난 초등학교 6학년 민철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 도서관과 인연을 맺게 된 초등학생이다. 교육복지센터가 학교와 연계하여 지역 내 유·초·중·고 학생들 중 복합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선정했다.
선정된 학생들은 센터가 지역공동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학생-성인을 1:1 매칭하여 멘토링을 진행한다. 공공도서관이 아닌 이곳 작은 도서관에서도 올해 6명 청소년의 명단을 받았다.
그런데 민철이는 밤새워 게임을 일삼는가 하면 가장 기본적인 등교조차 들쑥날쑥, 학교에 아예 안 가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친구가 없고, 학교 생활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건 물론 교우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아이는 마음 붙일 곳이 없는 듯했다.
아이는 무분별한 인터넷 정보에 노출되었고 게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그런 민철이는 센터에서 특히 관심과 애정을 쏟는 아이 중 하나이다. 이곳저곳 돌봄 기관들에 보내봤지만, 매번 뛰쳐나오고 어디에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작년에 우리 도서관 금요 축구 놀이터 시간에도 민철이를 몇 번 데리고 왔지만, 아이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밥이라도 챙겨 먹이자는 마음에 우리가 직접 도시락을 싸서 준 적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마치 낚시꾼이 던진 미끼를 알아챈 물고기마냥,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다.
안타까웠지만, 민철이는 주로 어른들, 성인들을 거의 다 불신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쉽게 내주는 법이 없었다. 가정 형편상 아버지가 혼자 키우는 한부모 가정인데, 아버지가 늘 일이 바쁘다 보니 혼자 방치된 시간이 많아 보였다.
아직은 초등학생일 뿐인 아이
하지만 아이가 거부한다고 해서 관심을 끊어버릴 수는 없다. 식사, 등교 거부, 게임중독, 방치 등 어린아이인 민철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이는 초등학생, 아직은 가능성이 충분할 뿐더러 보호 받는 게 마땅한 나이였다.
학교 담임선생님도 애를 태우기는 마찬가지였다. 등교만 제때 해도 점심은 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고, 최소한 학교 머무는 동안에라도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교 일수가 졸업과도 연관된 문제이므로 학교에서는 아이의 등교 문제에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 민철이가 오늘 2학기 첫 등교 날을 맞았다. 보라쌤은 타지역으로 워크숍을 가 있는 와중에도 민철의 첫 등교를 위해 모닝콜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한다. 분명 어제 밤을 새워 게임을 했을 것이고 아침잠에 빠져 있는 관계로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방학 동안 보라쌤은 민철에게 많은 공을 들였다. 푹푹 찌는 더운 여름날 민철이가 좋아한다는 선짓국을 사서 싸 들고 갔고, 자전거를 배우고 싶다는 민철에게 뙤약볕 아래에서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 주었다. 민철의 유일한 친구 카시(가명, 다문화가정 아이)를 같이 불러내어 자전거를 타게 했다.
아마추어 축구, 풋살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보라쌤은 좀 멋지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다. 무조건 돕고 본다. 그러니까 보라쌤이 민철을 맡는 일은 마치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되었다.
보라쌤은 몇 개월 동안 지극정성으로 민철에게 다가가려고 애를 썼다. 민철은 그러나 여전히 투박한 말투로 보라쌤의 말을 삼켜버리고, 전화 받기를 거부했단다. 집 안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예 열어주지 않을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민철이가 투박한 사기 그릇 같다면, 보라쌤은 마치 거친 뚝배기 같다고나 해야할까. 그러니 사기 그릇이 뚝배기를 어찌 당해낼 수 있으랴. 그간 보라쌤의 끈질긴 구애가, 알게 모르게 민철의 마음을 조금씩 달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결국 36분 정도 걸려서 민철이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문자 벨이 경쾌하게 울렸다. 보라쌤이었다.
'민철이, 학교에 도착했다고 담임선생님한테서 문자 받았어요.'
교육복지센터와 도서관 맨토 선생님들이 함께하는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와~너무 기뻐요", "민철의 2학기 무사 등교를 응원합니다" 등등 여기저기서 환호를 보냈다.
어찌보면 별일 아닐 민철의 등교 소식, 그럼에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환호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날 첫 등교에 이어 민철이의 2학기 등교가 쭉~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등교를 한 민철, 민철의 오늘 하루는 어땠을까 궁금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에 애써 미소를 감추면서도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을지 상상해 본다. 오늘 일로 민철의 자신감이 한 뼘쯤 자랐길 바란다. 무뚝뚝한 민철은 그날 이후 별다른 얘기도 없단다.
민철이 직접 가방을 챙겨 학교엘 다 가다니. 아침부터 급히 차를 몰고 간 일이 헛수고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직접 민철을 깨워 학교를 보낸 것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기뻤다. 자칫 성급히 개입해 아이 혼자 할 수 있는 기회를 뺏을 뻔한 건 아니었나 아찔하기까지 했다.
아이의 작은 '홀로서기 몸짓'이 차후 커다란 파도로 이는 그날까지 우리는 간절히 염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건 몰라줘도 괜찮다. 단지, 이 넓은 세상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민철이가 마음으로 느끼길 바랄 뿐이다.
마음을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는 일, 진심을 내보이는 일에 아이들은 결국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보답 받는다.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이 땅의 모든 아이는 보호 받고 사랑 받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이 자리를 빌어 작은 도서관에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 마을 공동체를 위해 함께 해 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