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실이 부족한 사람이 외형에 몰두한다.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 이런 취향은 더욱 심해진다. 고종의 경우도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소시적에 왕위에 올라서 만고풍상을 겪었다. 초기에는 아버지에게, 왕권탈환 이후에는 왕비와 민씨 척족에게, 이후에는 친청·친러·친미·친일파의 등에 업혀 등신 노릇을 해야 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왕 대신 황제 칭호를 씀으로써 청국과 전통적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된 것임을 선포하였다. 1863년에 즉위했으니 임금이 된 지 34년, 46세 때이다. 임금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자는 칭제건원은 정지상·묘청 등 고려조 이래의 꿈이었다.
근래에 들어 청국이 '대청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가끔 침략을 받았으나 여전히 몇 끝발 아래로 치부해온 일본이 '대일본제국'이라 호칭하였다. 조선에서도 수구파와 독립협회가 칭제건원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이를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겼다. 그런데 독립협회와 민간단체들을 강제해산시킨 뒤 선포한 대한제국의 국제에서는 황제가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장악하도록 하는 황제권을 강화할 뿐 독립협회 등에서 제의한 군주공화제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국방보다는 황실의 호위 병력을 증가하고 황제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도록 군부와 별도로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황제를 대원수로 삼았다. 경제면에서는 동학농민혁명 때부터 제기된 토지개혁은 외면한 채 전국의 광산·철도·홍삼제조·수리관개사업의 수입을 정부예산과 분리하여 황실의 수입으로 돌렸다.
민중의 권익은 뒷전으로 돌리고 황실 위주의 개혁사업을 위주로 한 대한국제의 선포는 국리민복과는 거리가 먼 조처였다. 따라서 백성들의 신뢰가 따르지 않았다. 강직한 선비 면암이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경장이란 것은 바로 갑오년(1894) 6월에 김홍집·유길준·어윤중·김윤식·안경수·김가진의 무리가 몰래 박영효와 결탁하여 왜적을 불러들여 임금을 내맡기고 나라를 내맡겨 버린 일(갑오변란)을 말한다.
아, 그때의 변란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군부께서 유폐되어 지낸 것은 허기 뿐이요, 종사가 거의 망하게 되어 남은 것은 허명 뿐이다. 궁궐을 유린하고 국법을 없애 4천 년 화맥이 이때에 끊어지고 5백 년 선왕의 선정이 이때에 끊어졌으니, 옛날부터 국망의 화가 한 번이 아니었으나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대저 갑오년의 변란을 훌륭하다고 하고, 나라의 전장(典章)을 없앤 것을 찬란하게 일신했다고 한다면, 박영효·김홍집·유길준의 무리는 중홍의 일등 공신이 되어야 할 것이요, 왜적이 우리 왕궁을 유린하고 우리 종사를 전복시킨 것이 도리어 크게 우리를 도운 것이 될 것이다. 문명의 조선 소중화(小中華)를 소일본(小日本)으로 만들어 놓고 천명이 새롭다고 한다면, 오랑캐를 따르는 수치는 없고 중화를 바꾸는 다행만이 있을 것이니, 이는 기만이 될 뿐이다.
당당한 천승의 나라로서 진실로 스스로 높아지고 싶으면, 이와 같이 황통이 오래 끊어진 때를 당하여 권도(權道)로 황제라 불러도 그다지 의리에 해롭지 않은데, 구구히 서양 각국의 예를 모방하였으니, 이는 욕이 될 뿐이다. 무욕(誣辱)이 이와 같을진대, 성상께서 바야흐로 거만하게 스스로 큰 체하여 오직 서양 각국과 함께 동등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위령(威令)이 금문(禁門)을 나가지 못하면서도 실상이 없는 명칭만 가지고 있고, 위망(危亡)이 조석에 이르렀는데도 아첨하는 말만 믿으시며, 유식한 사람의 비웃음을 불러들이고 후세의 조롱거리를 남기니, 성상께서 장차 무엇을 영화롭고 귀하게 여기시려는가.(<면암집>)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