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아. 누가 잘못했는지, 또 누가 너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지켜보고 꼭 벌을 내려주라. 그래서 바로 서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게 하고 대한의 아들들을 지켜다오." - 고 홍정기 일병 어머니 박미숙씨
고 채상병이 세상을 떠난 지 딱 1년째가 되던 날 밤. 광화문 일대는 천여개의 촛불(주최측 추산)이 모였다. 시민들은 "마땅히 이뤄졌어야 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대통령의 '격노'에 가로막혔다"며 분노했고, "대통령의 '격노'보다 큰 '애도'의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10년이 지났지만 대체 무엇이 바뀌었나"
2024년 7월 19일, '채상병 1주기 추모 촛불 문화제'가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렸다. 군 사망사건 유가족과 현역 병사의 어머니를 비롯해 남녀노소 시민들과 야당 정치인 등이 채상병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주최 측이 마련한 300개의 의자는 빈자리 없이 가득 찼고, 그보다 많은 시민들이 바닥에 앉거나 서서 행사를 지켜보며 마음을 보탰다.
참석자들은 행사 시작 전부터 채상병에게 추모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왜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셔야 했는지 국민들이 밝혀내겠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속상해요. 이런 나라에 지금 내가 있다는 게. 꽃다운 청년의 목숨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입 꾹 닫고 있다니요...'
'진실이 드러날 시간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며 함께 연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후 6시 30분이 되자 사회자가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념을 한 뒤 손에 든 초에 불을 켰다. 곧이어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이 무대에 올라 채상병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 2014년 군에서 발생한 집단 괴롭힘으로 세상을 떠난 고 윤승주 일병의 어머니 안미자씨는 "딱 10년 전 여름에도 용산 국방부 앞에서 우리 승주와 군에서 별이 된 아이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있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자리에 정말 착잡한 마음으로 섰다"고 말했다. 이어 "여전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아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우는 유가족이 한둘이 아니"라며 "10년이 지났지만 대체 우리 사회는 무엇이 바뀌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매번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으니 죽음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리를 헤매며 같은 이야기를 외칠 수밖에 없는 저희는 애타는 마음으로 고 채상병의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지난 2016년 군 복무 도중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고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씨는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채상병 어머니의 편지글을 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걱정이 많았다"며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에 우리 유가족들도 할 수 있는 몫을 다 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씨는 채상병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OO아. 그곳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너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지켜보고 꼭 벌을 내려주라. 그래서 바로 서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게 하고, 대한의 아들들을 지켜다오. 군복무로 인한 억울함이 없는 대한민국이 되고 OO이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1년이 넘었는데도 진실 규명 안 되고 있으니 이 땅의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또 부끄럽구나. 하늘에서 OO이가 편히 영면할 수 있도록, OO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명확한 진상 규명이 될 수 있도록,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 제공자가 꼭 처벌받아 다시는 이 땅에 죽음이 없도록, 그래서 OO이가 편안히 영면하는 날이 빨리 오도록 힘 보탤게."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한편 이날 행사에는 현재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무대에 오른 한 신병의 어머니는 "자대 배치받은 지 2주도 안 된 아들이 적응이 힘들어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어 "얼마 전 수료식에서 아들이 태극기 앞에서 맹세할 때 저도 아들에게 '너의 군 생활이 빛날 수 있게 항상 함께 뛰고, 뒷받침해 주고, 보호해 줄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면서 "국방부는 부모가 아들에게 한 이 맹세를 새겨들어야 한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아이들이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책임지라"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진아무개씨도 "21살짜리 아들이 군에서 일병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군이 피해자가 아닌 지휘관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추모제에 참석했다'며 "이런 세태를 우리 때 근절하지 않으면 끝없이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이런 행태를 끊어내기 위해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 오승환(25살, 남성)씨 역시 "군대를 다녀온 사람으로서 채상병이 상부의 지시를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두려웠을 채상병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참석했다"고 전했다.
추모제를 주관한 군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은 "얼마 전 채상병의 어머님께서 너무 많이 우신 나머지 몇 번을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채상병과 함께 급류에 휩쓸렸던 생존 해병 A씨도 여전히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채상병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알렸다.
이어 "그런데도 이 사건 책임자인 임성근 전 사단장은 오늘도 국회 탄핵청문회에 나와서 거짓말을 반복하고 현직 검사인 사촌 동생의 법률 조언까지 받고 있다"며 "수사 외압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거짓말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경고했다.
이후 생존 해병 A씨가 1주기를 추모하며 보내온 입장문 대독이 이어졌고, 채상병을 기리기 위한 추모 공연이 이어졌다. 촛불은 쥔 사람들은 '채상병 사망사건 진상을 규명하라', '무리한 수중수색 책임자를 처벌하라', '채상병 특검법 거부권을 거부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