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인기리에 치러지고 있는 프로 야구 경기.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TV로 시청하다가 온 가족이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우리 팀 투수가 연이어 볼넷으로 타자를 내보내다가 결국 '밀어내기'로 실점했기 때문이다. 그때, 카메라에 담긴 관중석의 모습 때문에 우리는 의문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스케치북에 담백하게 쓴 초성 9개.
'ㄱㅇ ㄴㅁ ㅇㅇ ㄴㅇㅈ'
9개의 초성이 쓰인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어느 팬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녀의 표정이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그 초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두가 투수에게 바라는 것
"공을 내 마음에 넣어줘?"
아들이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을 때 우리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했다. 언젠가 완봉승을 했던 화려한 경력이 있는 투수였기에, 그 투수를 애정하는 팬의 마음이 담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곧이어 아나운서가 알려 준 초성의 의미는 어감은 비슷했으나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공을 네모 안에 넣어줘.'
기발하면서도 너무 공감되는 문구에 탄성이 절로 터졌다. 투수를 애정하는 마음은 분명 있을 것이다. 팀을 응원하는 팬이니까. 하지만 근본적으로 투수를 각성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안타를 맞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공을 예리하게 구사해야 하는 거겠지만, 기본적으로 투수라면 스트라이크 존이라 불리는 네모 안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볼넷을 연이어 던지는 투수에게 모두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빠르게 구사하는 속구? 방향을 가늠할 수 없도록 휘어지게 하는 변화구? 속도를 느리게 함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체인지업? 그렇지 않다. 안타를 맞아도 좋으니 제발, '공을 네모 안에 넣어줘.' 이 바람은 투수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요구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에 맞는 역할을 가지고 살아간다. 투수에게 스트라이크 공을 던져서 타자를 아웃시켜야 하는 역할이 있듯이,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전업주부는 전업주부로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과도한 요구로 인해 역할 수행할 마음을 빼앗는 것도 문제겠지만, 마땅히 들어야 하는 요구를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모두가 고위 공직자에게 바라는 것
프로 야구만큼이나 연일 국민의 이목이 쏠리는 뉴스가 있다. 바로 고위 공직자들의 부조리한 행보에 대한 소식이다. 국가를 대표하고 국민을 대표하는 고위 공직자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커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아마도 고위 공직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집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살림만 하는 평범한 전업주부가 정치에 대해 무얼 그리 잘 알겠느냐만 서도, '이건 진짜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마가 찌푸려질 때가 많다.
지난 10일, '반부패 총괄기관'인 국민권익위원회는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의혹 신고 사건을 '혐의없음'으로 종결 처리했다. 공직자의 가족은 적어도 300만 원까지의 뇌물은 받아도 괜찮다는 어이없는 논리가 형성되어 버렸다. 또한 채상병에게 위험한 지시를 내려 죽게 한 고위직들은 처벌 대상에서 빠지고, 오히려 제대로 수사한 수사단장이 항명죄로 재판을 받는 외압 의혹이 불거졌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고위 공직자들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역할이란 무엇이겠는가? 빠른 속구와 같은 정책?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변화구와 같은 외교? 타이밍을 빼앗는 체인지업과 같은 안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14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지도자를 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제 단 하나이지 않을까.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가치.
'ㄱㅈㄱ ㅅㅅㅇ ㅈㅋㅈ'
'공정과 상식을 지켜줘'
응원 받을 자격
현 정권의 임기 내에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할 부모로서 걱정과 불안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가고 있다. 스케치북에 9개의 초성을 써서 고위공직자들에게 영상 편지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가장 기본을 지켜주는 공직자들이었으면 좋겠다. 국민의 대표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감당해 주는 지도자들이었으면 좋겠다.
제구가 안 되는 투수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공을 네모 안에 넣으라'고 요구하지만, 실은 알고 있다. 그 공을 네모 안에 가장 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투수 자신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오늘 형편없는 공을 던졌어도, 내일이면 다시 투수를 향한 응원의 불을 지피는 것이 바로 팬들이다.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고위공직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격노의 불길을 단순한 정쟁의 도구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야를 떠나 인간적인 기본 상식으로 공정하게 사태를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국민의 삶을 가장 잘 돌아보고 싶고, 공정과 상식을 가장 세우고 싶은 사람이 그들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국민은 좀 부족하고 서툴러도 기꺼이 응원의 마음을 보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