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쯤 서울 서대문구 허름한 지하 음악 연습실에서 고등학교 선배들의 밴드 연습을 참관한 적이 있다. 밴드에서 색소폰을 부는 선배가 내게 자랑삼아 초대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결성 초기라 한 달에 두 번 모여 손발을 맞추기 시작하던 때다. 이때 선배들의 연주를 보고 실력보다 의지와 열정이 대단하다고 말했던 것이 어렴풋 기억난다.
당시 선배들은 은퇴를 앞두고 취미 삼아 악기로 연주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다. 이들은 서슴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전문가를 초빙해 보컬과 합주기법도 특별 지도를 받았다.
노후 대비 취미로 시작한 '고교동창 음악밴드'
이후 한동안 선배들의 음악활동과 소식은 자세히 듣지 못했다. 가끔 동문회에서 만나면 아직도 연습을 계속하느냐는 정도만 물었을 뿐이다. 이태 전에는 선배들이 동창과 가족들 앞에서 '칠순기념' 공연을 개최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들의 무대공연을 직관한 적은 없었다.
드디어 지난달 13일 선배들이 홍제천 폭포카페무대에서 동문을 초대해 공연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을 찾았다. 밴드이름은 'BB 밴드', 서울 인창고등학교 18회 졸업생(1972년 졸업)들로 나의 1년 선배들이다. 평균나이 71세 8명으로 구성된 밴드는 올해로 결성 14년째를 맞았다.
공연은 한마디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과거 초보적인 수준을 훌쩍 넘어 마치 프로 록밴드의 연주를 연상시켰다.
구경 나온 시민과 동문들은 준비한 곡이 연주될 때마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비틀스의 명곡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부를 때는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도 떼창 했다. 한 시간 동안의 공연은 내가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잠시 멍할 정도였다.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 같았다.
사실 선배들이 꾸준히 자신의 취미를 살리고 이렇게 멋진 무대를 준비하고 연출할 줄은 전혀 몰랐다. 선배들의 공연은 노년세대에게 노후준비의 희망을 주는 듯했다.
한편 그간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극복했을지 밴드의 여정을 잠시 떠올렸다. 안 봐도 눈에 그려질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 하나로 뭉쳐 공연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숭배하는 유명한 비틀스 밴드도 결성한 지 8년 만에 헤어졌다. 멤버들 간의 이견차이와 불화로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14년 음악활동의 슬픈 사연
그럼에도 선배들이 14년 동안 음악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사실 슬픈 사연이 있다. 이들은 1970년 10월 수학여행길에 열차사고로 은사와 동창 40여 명을 잃었다. 당시 언론에서도 모교의 수학여행 열차사고를 대서특필했다. 이 여파로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한동안 실시되지 않았다.
선배들은 살아남은 자신들이 먼저 간 동창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음악활동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비비밴드 공연을 지켜본 한 동문은 "선배들의 화음과 우정이 음악을 통해서도 절절이 느껴졌다"며 소감을 전했다.
이날 공연에 앞서 비비밴드는 지난해 12월 홍대입구에서 소아암 환우를 돕기 위한 자선공연을 펼쳤다. 몇 해전부터는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주관하는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3시간씩 연습하고 있다. 스스로 아마추어라 칭하지만 그 열정과 음악사랑은 프로밴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밴드의 한용희 선배는 "그간 열심히 연습해 동문들 앞에 나설 수 있어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클라리넷을 맡고 있는 김규영 선배는 음악이라는 취미 덕분인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선배들은 음악과 공연으로 노후의 멋진 삶을 보내고 있다. 음악을 취미 삼아 봉사활동까지 하는 노년의 우정이 정말 부럽다. 일부는 젊었을 때 악기를 다루기도 했지만 대부분 나이 들어 악기를 처음 잡았다. 공연을 통해 실력이 느는 걸 실감한다고 한다. 서툴더라도 무대에 자주 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길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비비밴드가 마지막 곡으로 안치환의 '사랑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를 때는 모든 관객들이 일어나 머리 희끗한 초로들을 환호했다. 나 또한 선배들의 음악과 삶을 응원한다. 노년세대를 선도하는 유명 록밴드로 발전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