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이OO, 김OO, 최OO, 박OO, 노OO..."
7일 오전 10시 부산지법 303호 법정. 사건만 7건, 합쳐서 수십 명의 원고 숫자에 판사가 이름을 부르는 데에만 10여 분이 소요됐다. 일부는 다 앉지도 못한 채 서서 판결을 지켜봤다. 호명을 마친 판사가 선고이유부터 설명에 들어가면서 법정 안이 더 조용해졌다.
"형제육아원, 형제원 또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시설에 수용됐던 이들이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피해자들은 정당한 근거없이 수용됐고, 기간없이 감금당해 반인권적 통제 속에 생활하며 가혹행위·노동력을 착취당했다."
한국 현대사의 최악의 인권유린 중 하나로 꼽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의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피고인 정부·부산시는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했지만, 부산지법 민사 11부는 "과거사정리법에서 정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라며 원고들의 손을 들었다.
서울지법 이어 세 번째 재판, '국가 배상책임' 또 인정
형제복지원 피해자 70여 명이 제기한 7건의 소송에서 이날 재판부는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명확히 인정했다. 판결은 당시 수용의 근거가 된 내무부 훈령 410호가 위헌·위법하며,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끌려가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자행됐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한 수용시설의 관리감독 책임까지 국가와 부산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적법한 법령에 따르지 않고,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이 증명됐으므로 원고들에게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이유가 있다"라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원고별 수용기간 1년당 8천만 원을 기초로 위자료를 지급하라"라고 주문했다.
결과를 보면 정부가 지급해야 할 손해배상금액은 1인당 최소 수천만 원에서 최대 6억 원 정도다. 원고별 형제복지원 수용기간, 당시 미성년자 유무, 신체·정신적 피해와 현재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액수를 정했다.
그러나 원고 승소에도 선고 직후 법정 밖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내용적인 부분에서 국가의 책임이 인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를 환영만 할 수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6년 가까이 구금됐던 유아무개(63)씨는 "지난 판결과 다르게 화를 내는 이들이 많다. 기간이 제대로 산정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부가 항소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법무부는 같은 내용의 서울지법 판결에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했다. 피해자 단체 대표들은 부산 판결에서도 이런 사태의 반복을 우려하고 있다. 이향직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는 "한동훈 전 장관 시절 과거 국가가 잘못한 것은 항소하지 않겠다더니 전혀 딴판인 상황"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인권침해 사건을 놓고 다시 법정다툼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박경보 형제복지원피해자협의회 대표도 "수십 년 고통 속에 지내왔는데 국가가 우릴 외면하려 하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항소심이 정당한 판단을 하겠지만, 국가가 지금이라도 항소를 포기하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을 변호한 법률대리인 역시 법무부 항소의 문제를 지적했다.
"1987년 참상이 드러난 이후로 47년 만에 일부나마 피해자들을 위로할 선고가 나왔다. 재판부의 어려운 결정에 감사하다. 그런데 국가가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한다. 항소를 안 해야 한다. 조속히 피해배상하고 명예회복 조치를 하는 게 필요하다."
원고의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이언학, 김건휘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에 "국가가 1심 재판에 승복에 하는 게 맞다. 아직도 힘겨워하는 이들이 이번 재판을 통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부산시 주례동 형제복지원 사건은 1960년대 시설 설립 이후 권위주의 정부 시기 부랑자 수용을 명분으로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벌어진 것을 말한다. 당시 수천여 명이 시설로 끌려가 구금과 강제노역·구타·가혹행위 등을 당했다. 이를 놓고 2기 진실화해위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는 진실규명 결과를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