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3일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1인당 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현재까지 형성된 국제 관습법상 일본국에 대한 대한민국의 재판권을 인정함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또한 법원은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인 '국가면제'를 영토 내 불법행위에 한해서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일본 외무성은 23일 저녁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 명의로 "이번 판결은 국제법상 '국가면제' 원칙의 적용을 부정했다"며 담화문을 발표했다.
외무성은 "국제법과 한일 양국 간 합의에 명백히 반하는 것으로 매우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스스로의 책임으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강구할 것을 재차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국가면제 제한이 국제법 위반? 오히려 세계적 추세
하지만 일본의 주장과 달리 법원이 밝힌 대로 국가면제 제한은 세계적 추세다. 법원 역시 판결문에서 이탈리아, 브라질, 우크라이나 등에서 국가면제를 제한한 판결들을 언급하며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면제 제한은 국제적 흐름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탈리아의 '페리니 판결'을 살펴보면 국가면제의 제한뿐만 아니라 배상의 일환으로 자국내 타국 자산의 압류 조치 또한 실현되고 있다.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로 강제이송돼 강제노동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인 루이지 페리니가 독일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 대해 국가면제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피렌체 법원은 독일에 피해보상을 명령했고 독일은 이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2012년 ICJ는 이탈리아의 판결에 대해 국제인권법상 중대한 위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제관습법은 국가면제를 인정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이후 ICJ 판결에 따라 이탈리아 대법원은 이탈리아 법원이 해당 문제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고 판시했고 이탈리아 국회 또한 이탈리아 법원의 관할권을 부정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하지만 피렌체 법원이 이를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청구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피렌체 법원은 중대한 인권 침해 피해자를 희생하면서 국가면제를 부여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한 권한은 이탈리아 법원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ICJ가 정의한 국제법과 개인에 대한 불가침 권리와 개인의 사법 권리를 규정한 이탈리아 헌법 제2조 및 제24조는 분명한 모순을 야기한다"며 "국가면제가 헌법의 기본원칙과 저촉되는 한, 이는 이탈리아 법질서에 수용되지 않고, 거기서 어떠한 효력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인권 강조하는 새로운 국제관습 형성 흐름에 동조한 것
이러한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힘입어 이탈리아 대법원 또한 최근 실제로 이탈리아 내 독일 자산 압류 조치를 국가면제에 따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시했다.
지난 2019년 9월, 이탈리아 대법원은 국가면제에 따라 자산 압류 조치를 막아달라는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치반의 주장에 대해 "국가면제 적용은 이탈리아 헌법의 기본 가치 수호를 위하여 국제법의 침투 여지를 배제한 헌법재판소 결정의 이름으로 배제된다"고 판시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국제범죄는 기본적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인 만큼 본질적 인권의 수호를 위해서는 국가 면제를 포함한 규범 간의 우열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심각한 인권 침해에 있어서는 국가면제라는 국제관습법보다 인권 수호를 위한 헌법이 더 우위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이탈리아를 포함한 최근 국제사회의 국가면제 제한 판결에 전문가들은 국가면제 등 국제관습법은 결코 불변한 것이 아니며 인권의 보호를 강조하는 새로운 국제관습의 형성을 시도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국제법 위반의 중대성에 따른 주권면제 부인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황명준 동아대 교수는 이탈리아의 국가면제 제한에 대해 "자국민의 보호를 위한 이탈리아의 헌법적 질서를 전후의 국제인권법 관철의 측면에보다 부합되는 방식으로 이를 풀이한 것은 중요한 시도"라며 "주권면제(국가면제)를 확보하려는 시도에 대한 국제법적으로 유의미한 문제 제기"라고 평가했다.
이번 서울고법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번 판결은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기존의 국제관습법을 대신해 인권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관습 질서를 형성하려는 최근의 세계적 흐름에 우리 법원 역시 함께한 것이라고 봐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