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9 13:26최종 업데이트 23.06.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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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코엑스 광장에서 열린 한국 크래프트 맥주 축제인 GKBF((Great Korean Beer Festival) 풍경 ⓒ 윤한샘


"먹고 마시고 토하는 것을 허하노라."

축제는 문화 더하기다. 문화는 사람이 모인 곳에서 비로소 빛을 반짝인다. 음악 축제가 음악의 모든 문화를 더한 것이라면 맥주 축제는 맥주 문화의 총합이다. 축제 속 맥주는 사람을 모으고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다. 맥주 축제의 주인공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태곳적 맥주 축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시대 국가의 대소사를 치르는 자리에는 항상 맥주가 있었다. 행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즐겼다. 고대 이집트 축제에서는 마음껏 마시고 토하는 것이 허락되기도 했다.

하토르 여신 축제는 귀족과 민중들이 모여 붉은색 맥주로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최고의 신 라(Ra)의 딸 하토르는 하늘과 별의 여신이며 인간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쳐 준 행복의 여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화가 나면 분노와 파괴의 신, 세크메트로 변하는 이중인격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라는 반역을 꾀하는 한 무리의 인간을 보게 된다. 라의 명령을 받은 하토르는 세크메트로 변신한 후 반역자들을 응징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인간의 피를 맛본 세크메트가 살인을 멈출 수 없게 된 것이다.

폭주하는 세크메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이집트인이 내놓은 답은 맥주였다. 이집트 왕은 피의 색깔과 비슷한 붉은색 맥주를 만들어 세크메트에게 주었고 과음 후 잠든 그녀는 하토르로 돌아왔다. 이집트 왕은 이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었고 사람들은 붉은색 맥주를 마시며 평화를 축복했다. 

맥주 자체가 주인공이 된 최초의 축제는 옥토버페스트다. 원래 옥토버페스트는 경마 대회였다. 1810년 10월 12일 독일 바이에른 왕은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경마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큰 인기를 끌었고 점차 왕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축제로 굳어졌다. 농산물 홍보 시설과 그네, 볼링 같은 놀이기구도 등장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상인들은 대회장 주변에 가판대를 펼쳐 놓고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맥주를 팔았다. 

1871년 독일 제국 출범과 함께 바이에른 왕국은 사라졌지만 옥토버페스트는 계속됐다. 맥주가 본격적으로 주인공이 된 시기는 1880년이다. 맥주와 음식 판매를 위한 텐트와 부스가 설치됐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비어홀이 탄생했다. 19세기는 독일 라거가 영국 에일이 쓰고 있던 왕관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던 때였다.

수십만 명이 라거를 마셨던 옥토버페스트는 라거가 에일과의 전쟁을 버틸 수 있는 힘이었고 20세기 맥주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교두보였다. 현재 옥토버페스트는 800만 명 이상의 방문객과 700만 리터의 맥주가 소비되는 최대 맥주 축제가 됐다. 현대 맥주 축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크래프트 맥주, 한국 맥주 축제를 만들다 
 

2015년 코엑스에서 열린 GKBF 모습 ⓒ 윤한샘


2015년 이전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맥주 축제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행사장 맥주 판매가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술은 주세법과 식품위생법에 의해 철저히 관리된다. 제조는 물론 판매 또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야외 행사장에서 주류 판매 허가를 받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주류 박람회처럼 실내에서 하는 행사도 시음만 가능했다. 맥주 축제를 간판으로 걸고 진행한 행사조차 맥주는 협찬으로 제공됐다. 이런 환경에서 진정한 맥주 축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장벽을 부수고 불가능에 도전한 건, 크래프트 맥주였다. 2015년 GKBF라는 이름의 맥주 축제가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지자체와 세무서를 끈질기게 설득해 야외에서 맥주를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미국 크래프트 맥주 축체(Great American Beer Festival)를 본 딴 GKBF(Great Korean Beer Festival)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한국 크래프트 맥주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당연히 GKBF는 단순히 맥주만 파는 축제가 아니었다. 맥주 토크 세션을 통해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알렸고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공연으로 서브 컬처를 내세웠다. 맥주 부스는 양조장의 개성을 뽐내는 다채로운 문구와 이미지로 장식됐다. 맥주를 궁금해하는 소비자들과 양조사들 간 대화가 이어졌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스토리가 담긴 맥주를 즐겼다. 

GKBF가 쏘아 올린 공은 전국적인 맥주 축제 붐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경험한 지자체들은 맥주를 내세워 축제를 열었다. 버려진 기차역사, 장생포 고래, 지역 특산물, 전통 시장 등 모든 것이 맥주와 연결됐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맥주 축제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노원, 수제맥주로 물들다
 

노원수제맥주축제 전경 ⓒ 윤한샘

 
지난 2일 노원구청과 노원문화재단 그리고 바네하임은 한때 기찻길이었던 화랑대 철도공원 공원에 노원수제맥주축제라는 닻을 내렸다.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 열린 첫 크래프트 맥주 축제였다.

"원래 이 축제는 2019년에 준비하던 거였어요. 시작만 하면 되던 거였죠." 

노원구 공릉동에서 19년째 맥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바네하임 김정하 대표의 표정은 감회에 젖어있었다. 코로나로 오픈 직전까지 갔던 축제가 무산됐을 때 허무함이 생각나는 듯했다. 

"노원구는 불암산, 수락산이 품고 있는 힐링의 도시예요.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해 5개 대학이 있어 젊음의 도시이기도 하죠. 구민도 50만 명이나 있어요. 이런 노원에 제대로 된 문화 축제가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노원에서 거의 20년 동안 맥주를 만들어 온 제 경험을 믿었죠. 20~30대가 많이 살고 있는 공릉동에 맥주 축제를 열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노원수제맥주축제를 기획한 바네하임 김정하 대표 ⓒ 윤한샘


2023년 코로나의 그림자가 희미해지자 김 대표는 묵혀뒀던 축제의 설계도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녀는 노원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특징과 문화를 축제에 꼭 담아내고 싶었다. 먼저 지역 크래프트 양조장이라는 장기를 살려 노원수제맥주축제 전용 맥주를 만들었다.

노원 전통 시장 음식을 접목시키는 것도 이번 축제의 핵심이었다. 노원 맥주와 전통 시장 음식을 매칭시켜 지역성과 진정성을 축제에 녹여내고자 했다. 전국에 있는 크래프트 양조장들도 초대했다. 안동, 동두천, 속초, 안동, 부산, 파주, 인천을 대표하는 작은 양조장들이 노원의 부름에 화답했다. 

"친환경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안내를 통해 텀블러를 가지고 오시도록 했습니다. 텀블러에 맥주를 구매하시면 할인을 해드렸어요. 다회용 잔을 준비해 맥주를 드렸어요. 그동안 맥주 축제는 일회용 플라스틱 잔들이 넘쳐났거든요. 다회용 잔 수거는 노원구 관내 어르신행복주식회사에서 맡아주셨어요. 아, 그리고 사람들에게 맥주 문화도 알리고 싶었어요. 그냥 먹고 마시는 축제가 아니라 맥주를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바랐거든요. 그래서 맥주 축제 최초로 비어도슨트도 함께했습니다."

한국맥주문화협회 이사로 맥주 문화 활동에 진심인 김 대표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맥주 축제와 관련해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과 독일에서는 많은 자원봉사자가 함께 한다. 이들에게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보람이자 자부심이다. 특히 맥주 전문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맥주를 알려주고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건, 축제의 스펙트럼을 넓혀준다. 
 

맥아를 설명 중인 김병일 비어도슨트 ⓒ 윤한샘


"비어도슨트는 맥주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들이 맥주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문가입니다. 이번 노원수제맥주축제에서는 시민들께 크래프트 맥주를 소개하고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 드렸어요. 재료나 제조 과정도 알려드려 맥주에 대한 이해도 도와드렸지요."

김병일 비어도슨트는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맥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뒤에는 맥주 양조 과정과 맥주와 음식의 조화를 보여주는 그림이 보였다. 일반인은 흔히 볼 수 없는 홉도 준비되어 있었다. 홉 향을 맡은 사람들은 예상보다 강렬한 냄새에 놀란 얼굴이었다. 
 

맥주를 설명하고 있는 이주환 비어도슨트 ⓒ 윤한샘


"지역성을 가져가야 한다고 봐요. 맥주 축제는 지역 문화를 품어야 진짜 축제라 할 수 있죠. 이런 문화가 더욱 활성화된다면 지역경제도 맥주와 더불어 발전하지 않을까요? 많은 소비자들에게 맥주가 즐겁고 특별한 음료로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어린아이에게 맥아 설명을 마친 이주환 비어도슨트는 맥주 축제의 구성원으로 참가한 소감을 말해달라는 요청에 지역성을 꺼냈다. 그 이유를 축제에 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노원수제맥주축제는 첫날부터 노원구가 예상한 인원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밀려들었다. 젊은 연인부터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 심지어 70~80대 노인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화랑대 철도 공원이 서울 동쪽 끝에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분명 대부분 노원구 주민들이었다. 
 

매진된 노원 전통시장 음식 ⓒ 윤한샘


노원수제맥주축제는 그동안 있었던 어느 축제보다 지역성과 진정성을 추구하는 모습이었다. 노원에 있는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축제 운영을 담당했고 노인회는 뒷정리를 책임졌다. 지역 양조장은 맥주를 만들었고 전통 시장은 음식을 제공했다. 지역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지금 살고 있는 노원을 축제를 통해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외지 사람들 또한 그동안 몰랐던 노원을 다양한 메시지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축제 속에서 크래프트 맥주는 지역과 전통 그리고 사람을 연결해 주는 문화 매개체였다. 맥주 축제가 치적 쌓기와 홍보에서 벗어나 지역 사람과 문화를 녹여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노원수제맥주축제는 말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렸지만 질서는 정연했고 다행히 큰 사고도 없었다. 처음 시행하는 행사라 부족한 면도 있었지만 노원수제맥주축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맥주 축제가 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지역을 품고 문화를 말하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노원은 어느덧 맥주로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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