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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낙수 효과. 부자들이 돈을 더 벌수록 아랫것들도 떡고물로 그 혜택을 보게 된다는 경제이론이다. 부유층 감세 정책의 명분으로 종종 거론되는데 현실과 전혀 들어맞지 않아 이론적으로 파산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어디서나 예외는 있는 법. 수년 전 우리 집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브랜드 아파트 롯데캐슬 단지가 들어서니 나에게도 떡고물이 낙수처럼 떨어졌다. 일조권 및 조망권 침해로 적지 않은 보상금이 입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낙수 효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롯데캐슬 상가에 속속 입점한 때깔 나는 상점들을 손쉽게 이용하게 되었다. 그중에 독립서점이 있는데, 구립도서관의 동네서점 바로대출 서비스로 그 멋스러운 책방에서 뜨끈한 신간을 쏠쏠하게 빌려보고 있다. 책 한 권 사면 와인 한 병을 줄여야 하는 서푼짜리 작가한테는 이 대출 서비스가 지속 가능한 와인 생활에 여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움과자와 과일 그리고 와인

그날도 서점에서 신간을 대출해 나오는 길이었다. 마침 맞은편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까눌레, 휘낭시에, 마들렌 같은 프랑스 과자를 판매하는 곳이다. 우리 둘째가 여기서 만든 까눌레를 먹고는 그 황홀한 겉바속촉에 반해 종종 까눌레 노래를 부르는데 말이야. 어찌 아빠로서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까눌레 외에 종류별로 몇 개씩 구매했다.

결제 후 출입문을 나섰는데 바로 옆에 조각 과일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이 있네? 프랑스 과자 가득 찬 꾸러미를 든 상태로 망막에 과일 이미지가 새겨지니, 조건반사적으로 모스카토 와인이 떠올랐다. 달달한 디저트와 모스카토 와인의 조합은 언제나 올바르지 아니한가. 피로와 권태로움으로 축 늘어진 미각에 강렬한 자극을 제공하기를 원한다면, 단 음식과 단 와인의 조합은 한 여름밤 면상에 직격하는 에어콘 바람만큼이나 즉효성을 보장한다.

그래! 구강 호강을 위해 과일 사러 들어가자. 메뉴를 살펴보고 주문한 후 잠시 대기했다. 정성스럽게 썰려 가지런히 정돈된 과일 포장을 받아 들고서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까치와 까마귀들이 영역 다툼 중인 듯 서로를 향해 시끄럽게 울어댄다. '후훗. 너네는 메추라기한테 안돼!' 뜬금없이 무슨 메추라기냐고? 좀 있다 마실 와인의 라벨에 그 생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라 스피네타 브리코 콸리아 모스카토 다스티'다.
 
와인 좀 아는 애호가들이 한결같이 강추하는 모스카토 와인이다.
▲ 라 스피네타 브리코 콸리아 모스카토 다스티 와인 좀 아는 애호가들이 한결같이 강추하는 모스카토 와인이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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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스피네타는 이탈리아의 와인 회사명, 브리코 콸리아는 제품명, 모스카토 다스티(d'Asti)는 아스티 지역의 모스카토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의미다. 제품명의 콸리아는 이탈리아어로 메추라기를 의미한다. 와인 좀 아는 애호가들이 한결같이 강추하는 모스카토 와인이다. 가격대는 여타 모스카토 와인보다 비싸서 대략 3만 원 정도다.

매운맛 안주보다 단맛 디저트

집에 도착하니 둘째가 까눌레를 보고서는 환하게 웃으며 포장을 뜯으려고 달려든다. 진정시키고서는 밥 먹고 후식으로 먹자고 설득했다. 기왕 와인을 열기로 결심했으니 달달한 모스카토에 어울릴 만한 요리를 고민하다가 마라샹궈를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단맛 나는 와인은 매콤한 음식과 궁합이 제법 좋기 때문이다. 재미삼아 챗GPT에게 모스카토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물어보니 매운 아시아 요리(Spicy Asian Cuisine)도 놓치지 않고 알려준다. 와인 마셔본 적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나만큼은 참으로 오지구나.

음식이 준비되었지만 일단 메추라기 와인부터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 농도 5%의 부담 없는 도수, 경쾌하게 올라오는 탄산, 신선한 파인애플 향을 품은 상큼하고 밸런스 좋은 산미. 역시 훌륭한 모스카토 와인이야. 몸값을 납득하게 되는 풍미다.

마라샹궈, 조각과일, 프랑스 과자를 벌여놓고서는 하나하나 모스카토 와인과 곁들여 먹으며 아내와 궁합을 품평했다. 일단 마라샹궈와의 궁합은 썩 괜찮았다. 마라의 총공세에 지쳐 떨어진 혀에게 다가와 '매워서 고생했지?'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위로의 단맛이라고나 할까.

한참 맛의 여운을 음미하는데 갑작스레 떡볶이+쿨피스 국룰 조합이 떠오른다. 아하. 모스카토 다스티는 이를테면 성인용 초호화 쿨피스가 아닐까? 엄격하게 평가하자면 마라샹궈와 최고의 궁합이라고 생각하는 리슬링 와인에는 살짝 밀리는 느낌이다. 만약 우리 부부가 리슬링과의 궁합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더 높게 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술과도 같은 시너지 효과는 단맛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에 온 것과도 같다.
▲ 모스카토 와인과 다양한 안주들 그 마술과도 같은 시너지 효과는 단맛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에 온 것과도 같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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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카토와 과일의 궁합은 마라샹궈보다 더욱 훌륭했다. '너 상큼? 나 상큼! 오! 브로!' 이산가족이 오랜만에 만나 서로 부둥켜안으며 열렬하게 상봉하는 수준의 케미다.

아내도 대단히 잘 어울린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나와는 살짝 결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너무 비슷한 과실 캐릭터끼리 조우하니 뭔가 동족상잔의 이미지가 떠오른단다. 아내의 사차원적 상상력에 경탄(경악)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어떻게 여기서 동족상잔이 나와!

단 와인 마시는 방법을 몰랐다

잠시 아이들 상황을 보니 단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첫째는 간만에 마라샹궈를 먹으니 맛있다며 쉬지 않고 젓가락질 중이고, 둘째는 까눌레를 야무지게 손에 들고서는 딱딱한 표면을 마치 다람쥐처럼 조금씩 아껴서 뜯어먹고 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앙증스러운 프랑스 과자 하나를 집어 들어 씹고서는 모스카토를 한 모금 삼켰다. 햐! 과일과의 궁합 뺨치는구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는데, 옆에서 한참 까눌레 삼매경이던 둘째가 불쑥 난입한다.

"아빠! 와인이 까눌레의 느끼한 맛을 잘 잡아줘서 어울리는 거지?"
"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빠가 예전에도 느끼한 음식에 와인 마시면서 그렇게 얘기했으니까."
"그…렇구나."


딸 말대로다. 모스카토의 산미가 받쳐주기만 하면 까눌레, 휘낭시에, 마들렌을 연속으로 열 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단맛과 단맛의 만남이 질리지 않는 이유는 과실 향 가득 우아한 산미가 거실에 놓은 대용량 공기청정기처럼 끊임없이 구강 내부의 상큼함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우리 둘째는 혹시 미각 영재? 아빠가 몰라봐서 미안하다. 소중한 딸의 능력 개발을 위해 앞으로 아빠가 책 열심히 팔아서 까눌레보다 더한 것도 많이 사 줄게.

갓 와인에 관심을 가진 시절에는 단 와인이 내 취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기나 생선 같은 안주와 같이 마시기에도 적절하지 않고, 너무 달다 보니 금세 물렸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밥 먹으면서 사탕 먹는 사람 없지 않은가. 맛과 맛이 겉돌고 어울리지 않으니.

나중에야 단 와인 마시는 방법을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달달한 디저트에 곁들여 홀짝홀짝 마셔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 마술과도 같은 시너지 효과는 뭐랄까, 단맛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에 온 것과도 같다.

곳곳에 놓인 놀이기구를 번갈아 타듯이, 겉바속촉 까눌레 한입, 모스카토 한 잔, 열대 해변을 연상시키는 파인애플 한 조각, 모스카토 한 잔, 소금과 캐러멜의 단짠단짠 휘낭시에 한입, 모스카토 한 잔. 아이고 침이 고여서 더는 글을 못 쓰겠다.

태그:#모스카토 다스티, #디저트, #임승수, #마리아주, #까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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