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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는개(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조금 가는 비)가 내리고 있다. 점심도 거른 채 배 시간에 맞춰 는개를 맞으며 청산행 배를 탔다. 

"여보세요? 홍연심 씨 좀 부탁합니다."
"그런 분 안 계신 데 누구세요?" 
"어디 가셨나요?"
"홍연심씨 그런 분 안 계신다고요." 


사실 며칠 전 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전화번호를 알려줘 쉽게 만날 줄 알았는데 만남은 어려웠다. 

청산항에 도착하여 다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해녀와 통화가 가까스로 이뤄졌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디..."
"그런데 집에 전화하니 홍연심 씨는 그런 분 안 계신다고 하던데."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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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연심이 아니고 송연심이여."
"저번에 홍연심이라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하도 귀찮게 하니까 거짓말로 둘려댔지..."
"그래도 50여 성상을 물질로 살아오셨는데 할 말이 많으실 거잖아요."


한눈에 봐도 긍정의 힘이 넘치는 송연심 해녀는 지난 10여 년간 몇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얼굴에 항상 밝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미소 천사였다. 

고른 이와 뚜렷한 이목구비 일흔을 넘긴 나이라고는 누가 봐도 믿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송씨는 제주 건국 신화가 깃든 성산읍 온평리가 고향으로, 물질은 20세에 뛰어들었다. 

"우리 온평은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수영은 많이 해도 물질은 그다지 하지 않았어요. 농토가 많아 농사일에 매달릴 때가 많았거든요. 저도 처녀 때는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거의 도맡아 했어요."

제주 출신 해녀가 어릴 때부터 갓물질을 시작으로 해녀의 길로 접어든 반면 송씨는 늦은 나이에 해녀로 출발하였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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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잘해서 스무 살 때 물질을 잠깐 배우고 바로 원정 물질을 부산 다대포로 떠났어요. 거기에 이모가 터를 잡고 계셨거든. 처음이라 경험도 없고 물질도 서툴러서 고생만 하다 돈도 못 벌고 추석 때 돌아왔어요." 

대부분의 해녀가 봄이면 원정 물질을 떠나 추석이면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송씨는 물질이 서툴러 고생만 하고 돌아온 것. 그러나 그는 이듬해 마을 해녀회에서 바닷속을 읽는 법과 잠수기술을 배우고, 스물두 살에 청산도로 두 번째 원정 물질에 나섰다.

"몇 명이 객선을 타고 완도로 와서 청산도로 들어왔어요. 다 아시겠지만 그때는 나이도 나이이지만 한창 예쁘고 그럴 때라 나도 청산도에 오자마자 우리 아저씨가 막 쫓아 다녀요.

아저씨 나이가 한 살 어린데 거짓말로 나이도 숨기고 그랬죠. 그래서 오자마자 아저씨와 데이트를 시작했어요. 우리 아저씨가 참 순하거든요. 그런데 진짜는 우리 시 할아버지가 제주에서 청산으로 가족들과 이주하여 살고 계셔서 금방 정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송씨는 그 해 물질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가 다음 해 청산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신식 결혼식이었어요. 청산도에도 사진관이 있어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죠. 이듬해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송씨는 그동안 고생한 것이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데 애들 키운 것은 아직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가슴은 안 아프단다.

"저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인데 애들이 엄마의 사랑을 많이 못 받았어요. 물질은 가야하고 애들은 젖먹이 갓난아이고 그래서 물질을 갈 때만 보모를 구했어요. 보모라고 해봐야 시간이 되는 이웃집 사람들이었는데 당시에 5000원 정도를 주면 믿고 맡길 수 있어서 그렇게 애들을 키웠어요. 그때(1970년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어요."

청산바다도 이제는 바닷속에 해산물이 많이 고갈됐다고 한다.

″30대 때는 물질을 하면 500g~1kg 전복을 쉽게 잡을 수 있었어요. 제주 해녀가 200명 정도 활동했을 때도 해산물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전복은 가뭄에 콩나기로 아예 없어요.″  

아직 난바르(배를 타고 3~4일씩 배에서 먹고 자며 하는 물질)를 해보지 않았다는 송씨는 언제까지 물질을 할 계획이냐는 물음에 "언제까지는 언제까지여 청산 바다에 물건이 없어질 때까지 해야지"라고 답한다. 

아직도 일흔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씩씩해 보이는 송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는개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태그:#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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