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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맞물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중국의 타이완 침공 가능성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곤 한다. 거기에 최근에는 북한의 정찰위성발사와 이에 따른 서울시의 경계경보 발령 소동까지 있었다. 당연하게 누렸던 평화가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 불안정한 질서 위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지구 반대편 딴 세상의 이야기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높아지는 긴장 속에서 각국의 정치군사적 움직임도 분주하다.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위협에 대한 방비로 이른바 한미일 삼각동맹 구상이 현실화되어 가는 듯하다. 대외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일본과의 밀착을 지향하는 국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으로는, 과거사 문제를 들어 현 대일정책에 반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지나간 전쟁,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전쟁의 담론이 뒤엉켜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만 같다.

역설적으로,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도, 지나간 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들도, 대부분은 전쟁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전쟁에 대한 방비를 논하거나 혹은 전쟁책임 추궁에 힘을 쏟는 오늘날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이야 말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전쟁체험 세대의 목소리를 더더욱 되새김질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필자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옛 일본군 출신자들의 전쟁체험 청취에 진력해왔다. 이를 토대로 석사논문을 썼고, 한국에도 그 결과물을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오월의봄, 2022)라는 책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6월 1일에 102번째 생일을 맞이한 히로토 아키라(廣戸章)씨는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에 등장하는 주요 인터뷰이다.
  
1921년 6월 1일에 출생한 히로토 씨는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다. 그의 해군병과예비학생 동기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102세 생일을 맞은 히로토 씨 1921년 6월 1일에 출생한 히로토 씨는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다. 그의 해군병과예비학생 동기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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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생인 히로토씨는 일본에서 이른바 '결사의 세대'(決死の世代;제국 일본이 전황 악화로 붕괴되어 가던 시점에서 나라를 위한 순국을 강요받았던 세대)에 속한다. 주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그는 1943년 말 이른바 '학도출진'이라는 명목으로 징병되었고, 이후 해군육전대 장교가 되어 중국 하이난 섬에서 종전을 맞았다.

수많은 동기들이 전쟁 중 '옥쇄'나 '특공' 등으로 전사했고, 살아남은 동기들 역시 현 시점에는 모두 고령으로 별세한 상황. 동기들이 세상을 떠나간 그 세월 너머로, 히로토씨는 지금도 스스로 거동하고 또렷한 의식으로 대화가 가능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02세 생신 축하를 위해 히로토씨를 방문한 필자는, 그동안의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전쟁과 역사문제에 관한 보다 더 솔직한 감상을 들을 수 있었다.

히로토씨의 허락을 구하고 저서의 출판을 진행한 이래, 그는 늘 한국 독자들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이번 생신맞이 방문에서도 히로토시는 어김없이 한국 독자들로부터 '비판적 평가'가 있는지를 질문했다. 상대가 기분이 상할까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친밀도가 형성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히로토씨가 나가신 전쟁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는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침략을 시작으로 일본이 벌였던 그 전쟁은 정당하지 않은, 그야말로 '나쁜' 전쟁이었는데, 그 전쟁에 참전하신 것에 대해 반성하시는 게 맞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히로토씨는 낮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와서 보면, 일본의 전쟁이 비판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사고능력을 가질 수가 없었네요.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저는 소학생이었고, 태평양전쟁 즉 대동아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딱 스무살이었습니다. 전쟁을 예찬하는 군사주의적 교육만 받으며 자라다보니,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비판능력이라는 것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도륙하라! 미영, 우리의 적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성조기가 찢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오른쪽에 실린 만화에서는 서구 연합군을 약체로 폄하하고 있다.
▲ 연합국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는 일본의 전시간행물 "도륙하라! 미영, 우리의 적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성조기가 찢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오른쪽에 실린 만화에서는 서구 연합군을 약체로 폄하하고 있다.
ⓒ 아사히구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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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사상의 교육과 전시 미디어의 선동은 국민들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오늘날 무자비한 독재자로 비난받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 역시, 독일과의 동맹을 예찬하던 미디어의 그늘 아래 히로토씨에게는 '별세계'의 '영웅'으로 보였다고 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역시, 당시의 히로토씨에게는 일본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으로 생각되었다. 가령, 진주만 공습 뉴스를 들었을 때의 감상에 대해 히로토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정보통제가 있었으니까요. '이겼다, 이겼다'라는 보도 외에는 정보가 없었잖아요? 처음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12월 8일이었나? 어디 어디 점령했다는 보도가 나오면, 일본이 강하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군 전함 여러 척을 박살냈다고. 대단하구나 하고.

이렇게나 강하니까, 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물론 그렇게 될 리는 없지만.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다고 하니, 일본도 거기에 편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나치가 유럽의 패권을 쥐었으니 일본은 동양의 패권을 쥘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기분이었던 때가 한때나마 있었습니다. (박광홍,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오월의봄, 2022, 67p)
 
그렇게 히로토씨는, "일본을 위해, 모두를 위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학도출진에 나서게 되었다. 히로토씨를 비롯해, 당시 전선으로 나아간 학도병들은 온 사회의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조국으로 돌아온 패잔병들은, 출정 때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냉대를 마주하게 된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패잔병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누구에게도 이에 대한 책임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장병들의 고뇌는 말할 수 없는 한으로 남았다.  
"역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그것은, 대관절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안 그래요? 그것은 역시 일본의, 그렇게 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는 것은, 일본을 위한, 모두를 위한 죽음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모두를 위해 죽는 것이다라고. 그렇죠? 따라서 ‘모두가 나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해줄 것이다’라는 마음이겠죠. 그래서 '헤어져 죽더라도, 꽃의 도성 야스쿠니 신사, 봄의 가지에 피어 만나자’라고, 모두 노래한 것이지요. 네,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하는 거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거군요. 확실히 말하면, 그런 것입니다. 기쁘게, 기꺼이 용감하게 야스쿠니 신사에 가는 것과는 다르죠. 그렇죠? 다들 살고 싶었어요."(<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144p)
▲ 해군병과예비학생 졸업 후 소위 임관을 앞둔 히로토 씨(1944년 12월, 23세) "역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그것은, 대관절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안 그래요? 그것은 역시 일본의, 그렇게 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는 것은, 일본을 위한, 모두를 위한 죽음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모두를 위해 죽는 것이다라고. 그렇죠? 따라서 ‘모두가 나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해줄 것이다’라는 마음이겠죠. 그래서 '헤어져 죽더라도, 꽃의 도성 야스쿠니 신사, 봄의 가지에 피어 만나자’라고, 모두 노래한 것이지요. 네,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하는 거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거군요. 확실히 말하면, 그런 것입니다. 기쁘게, 기꺼이 용감하게 야스쿠니 신사에 가는 것과는 다르죠. 그렇죠? 다들 살고 싶었어요."(<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144p)
ⓒ 히로토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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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이 난지 8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당시에도 답을 찾지 못했던 전쟁의 의미에 대해, 더 나아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관한 책임을 한국인 필자와 논한다는 것은 히로토씨에게 있어 난처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역시 정책의 기획자 입장이 아니라 국가공권력에 의한 동원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국가의 책임이나 더 나아가 그 국가의 일원이었던 스스로의 책임에 대해 옛 식민지 지역 출신자의 질문으로부터 성찰해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듯했다.

처음에 히로토씨는 '도조 히데키에게 따져야 할 일을 내가 어찌 대답하겠나'며 손사래를 쳤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과거사를 두고 제기되는 정치적 요구들에 대해서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던 히로토씨는 러일전쟁(일러전쟁)의 예를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에 할말이 많을 것입니다. 일러전쟁만 해도, 가장 큰 피해자는 중국입니다. 일본은 자존자위를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전장이 된 것은 러시아 땅이나 일본 땅도 아닌 중국 땅이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던 중국인들이 두 강대국의 힘싸움에 휘말린 것입니다. 그래요. 일본이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해요."

과거사 문제로 여전히 일본에 반감을 품는 중국인들이나 한국인들의 반응을 히로토 씨는 이해한다고 하셨다. 피해를 당했던 입장에서는 지난날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 지점에서 히로토씨는 일본 사회의 무책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은 전쟁에 직접 나갔던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시대니까, 지금 세대 입장에서는 '우리가 한 일도 아닌데 왜 우리가 사죄하냐'는 입장이 되어버리는 거죠. '내가 뭘 했는데?' 이런 식으로. 우리 애들만 봐도, 학교에서 역사 교육이라는 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 무책임한거죠. 무책임하고 비겁한 겁니다. 물론 역사라는 게 승자의 역사이고 또 누가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죠. 일본에서도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교과서를 만들어서 문제가 되었잖아요. 미래지향적으로 가야하는데. 같은 인간이잖아요? 국가들끼리 교류하고 이해를 늘리며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각 국가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들 속에서, 분쟁과 전쟁을 일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히로토씨는 말했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중국인과 대만인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그 자신도 옛 전쟁에서는 스스로의 참전을 '조국'이나 '동양평화'를 위한 것으로, 자신의 전사를 '일본의 모두를 위한 것'으로 굳게 믿었으니 말이다. 각자가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충돌하는 데 어떻게 전쟁을 없앨 수 있겠냐는 것이 히로토씨의 회의적인 세계관이었다.

그럼에도, 평화를 염원하는 다음 세대의 노력에 대해 그는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전쟁체험을 들려준 이유는 미래세대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때의 전쟁이 침략전쟁이었고 거기에 나간 저의 책임에 대해 논한다고 해도, 사실 저는 뭐라 말을 할 입장이 아닙니다. 저는 살아온 지 한 세기가 넘어서 이제는 인생의 목적조차 잃은 채 죽어가는 노인일 뿐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겪었는지 말씀드릴 뿐이고, 저의 체험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미래세대의 몫입니다."

인간의 존엄성보다도 우선되던 국가와 민족의 대의명분 아래 병정으로 빚어져 전장으로 향했던 세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말고는 애당초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세대에게 역사적 책임을 논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어쩌면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결사의 세대' 당사자로서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논하는 히로토씨의 이야기에는 분명 울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울림있는 이야기를 한국인인 필자가 청취하고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를 냉정히 평가하고, 그 교훈을 우리의 앞날에 반영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제를,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 견지에서 이루어가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야 말로 필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히로토씨의 진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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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전쟁체험, #일본군, #과거사, #전쟁책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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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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