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 <메기>에 등장하는 대사다. 익명의 누군가가 엑스레이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찍었다.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사진 한 장을 시작으로 이 영화는 계속해서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한다(정작 누가 찍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이 진짜일까 아닐까를 따져가며 혼란스러워하는 등장인물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언이 진실인지,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진실을 왜 알아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세탁소 사장님이 맡긴 옷을 제대로 세탁하지 않아 주머니에 넣어뒀던 종이가 여전히 빳빳하다면? 병가로 무단결근한 직원이 알고 봤더니 꾀병이었다면? 같이 일하는 동생이 없어진 나의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것인 양 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심지어 내가 그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여러 번 말했음에도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 알고 보니 전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가했던 사람이라면?

데이트폭력
 영화 <메기> 스틸 이미지.

영화 <메기>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CGV 아트하우스

 
내가 활동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종종 영화모임이 열리곤 하는데, 이번 영화는 <메기>였다. 오래전에 본 적 있는 영화지만 당시에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있어 신청하고 모임을 다녀왔다. 다시 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았다. 그래도 줄거리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당시에 스쳐가며 놓쳤던 장면들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대사들이 유독 눈과 귀에 들어오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에피소드는 다양하지만 유독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내용은 데이트 폭력이다. 주인공 윤영은 현재 동거하며 사귀고 있는 자신의 남자친구 성원이 전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야기를 성원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듣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녀의 의심은 점점 확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작은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그가 나를 죽이려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지경에 이르며 일방적인 헤어짐을 고한다. 결국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것들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내버린 것이다. 이별 후 윤영은 다시 성원을 찾아간다. 성원은 윤영에게 말한다.
"음, 내가 같이 일했던 동생을 의심했던 적이 있는데 그게... 그게 지금 생각해 보면 나 혼자 생각하고 막 부풀렸던 것 같아. 너도 혹시 뭔가를 부풀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혹은 생각하면 엄청 큰 바늘로 찔러 주고 싶다. 안 아프게."
"(헛웃음) 여자 때린 적 있어?"
"어"
"뭐?"
"전 여친 때린 적 있어."

이 대화를 끝으로 싱크홀이 생기고 그 구덩이에 성원이 빠진다. 윤영을 애타게 부르는 성원을 뒤로한 채 윤영은 도망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장면에 대해 감독은 우리에게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가 왜 전 여자친구를 때렸는지, 때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다. 그저 관객의 추측으로 이 퍼즐을 맞춰갈 뿐이다. 영화 초반부터 등장했던 남자주인공 성원의 모습을 가만히 돌아본다. 그는 다소 어리숙한 모습으로 비칠때가 많았고, 여자친구인 윤영에게 '연인으로서 저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만날 수 있다고?' 싶은 모습을 계속 보인다. 성원은 일방적인 윤영의 폭력(언어)에도 대체로 타이르거나 풀어주기에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성원의 이러한 어리숙함에 내가 잠깐 흔들렸다 생각했던 것은 모임장님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행해져서는 안 되는 행위(특히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더더욱)고, 그 행위가 가해진 이상 그 어떤 이유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왜 폭력을 행한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아야 다음번에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가해자의 입장은 그저 가해자의 입장일 뿐인 것이다. 사실 주변의 기사와 뉴스만 봐도 가해자의 입장을 알았다고 해서 그런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똑 부러진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임장님은 '사실'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편집되고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고 우리가 왜 그들의 서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고, 나 또한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과거가 떠올라 어떤 말도 더 이상 덧대기가 어려웠다.

피해자가 되는 경험

철저하게 피해자가 되어본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그때의 일들을 날것으로 담아낼 자신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피해자였던 그 사건들의 가해자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그는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가해자를 옹호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대는 그럴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었고, 그들의 삶이 불행하고 힘들었기에 우리는 가해자의 가슴 아픈 서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소리는 듣고싶지 않다. 가해자의 행동이 동정으로 인정받는 순간, 피해자는 더 이상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너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해를 가해본 적이 없냐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말이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느꼈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까지 고려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에서 감독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모임을 끝으로 더 이상 성원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전 여자친구를 어떤 이유에서 때렸든, 반드시 때려야만 했던 엄청난 이유가 있었든 그것은 이제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바람과 폭력은 나에게 다 똑같다.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했고 안 했고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영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했던 대사처럼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온 것이다.

나는 자꾸 흔들린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 싶지만 그럼에도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의 전 연애들을 돌아봤을 때, 상대의 어떤 행동들이 때로는 폭력적이었고, 때로는 바람을 의심할 만한 상황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망설이는 순간이 많았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되뇌었다. 그러면 안 된다.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과 시작은 같아야 한다는 말처럼, 다시 한번 이 대사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 본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폭력 가해자 데이트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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