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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자화상, 1561
 피아노 치는 자화상,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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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천재 중에는 왜 여성 화가가 없을까

르네상스의 천재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리는가. 흔히 15~16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를 손꼽는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여성 미술가는 어떤 위치였을까. 여성이 미술가가 될 수는 있었을까.

르네상스 시기에는 '천재적인 예술가'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여성의 입지가 오히려 좁아졌다. 이 시기 미술은 인문학이며 공적인 활동이자 남성의 영역으로 재구성되었다. 더구나 수녀원이 축소되어 종교 활동을 하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약화했다. 중세 시대에 일부 여성은 결혼하지 않고 수녀원에 들어간 뒤 다양한 역량을 발휘하며 예술가와 지식인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로 수녀원은 그 기능을 점점 상실했다.

16세기 미술 비평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예술가 열전>에서 여성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게 몇 안 되는 여성 중에 소포니스바 앙귀솔라(Sophonisba Angussola, 1532~1625)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적인 시대에서 여성이 화가가 되기는 쉽지 않지만, 아버지가 화가라면 그나마 유리했다. 화가로서 교육 기회가 열려있지 않았기에 여성 화가 대부분은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우며 경력을 쌓았다. 반면 소포니스바는 수녀원도, 장인 계층 아버지의 작업실도 아닌 귀족 가정에서 화가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지식과 예술 전반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당시 소수의 부유하고 유명한 북부 이탈리아 가문 출신 여성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소포니스바의 아버지는 자식들 7남매 모두에게 열성적이었는데, 맏이 소포니스바가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자 그를 데리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딸의 그림을 보여주곤 했다. 소포니스바의 자매들은 모두 그림을 그렸으며 이 중 루시아와 미네르바도 화가로서 약간 알려졌다.

소포니스바는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스페인에서 주요 경력을 쌓았다.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이며 이자벨 왕비의 궁녀로 들어가 월급을 받으며 활동했다. 왕비의 신뢰를 얻은 그는 많은 스페인 귀족과 친분을 쌓았다.

일반적으로 여성 화가는 남성에 비하면 피사체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어 인물화를 그리기에 불리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이라서 접근이 용이한 점도 있었다. 신분이 높은 여성의 초상화를 그릴 때 소포니스바는 남성 화가보다 피사체에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거리를 좁혔기 때문에 세밀하게 묘사된 반신상을 제작할 수도 있었다.   
 
이젤 앞의 자화상, 1566
 이젤 앞의 자화상, 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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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숙녀'를 넘어 '전문 화가'로 남은 여성

아버지의 관심 덕분에 많은 기회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소포니스바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림 소재에 제한을 받았다. 당시 역사나 신화, 성서의 내용은 여성 화가에게 부적합한 소재로 여겨졌다.

이런 시대에 소포니스바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그림의 소재로 활용했다. 그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 1471~1528)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사이에 있는 어떤 화가보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이다. 자화상 그리기는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공적인 무대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1561년 작품 '피아노 치는 자화상'을 보자. 그림 속 소포니스바는 정숙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피아노1)*(하단 설명 참조)를 친다. 화가이면서 악기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르네상스 형 인간다운 다재다능함을 강조했다. 어둠 속에는 나이 든 여성의 얼굴이 보인다. 소포니스바의 하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녀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화상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높은 신분의 여성으로 교양 있게 악기를 연주하는 자화상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성역할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포니스바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르네상스 시대의 여성상에 부합하는 정숙한 여성으로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소포니스바의 작품 중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이젤 앞의 자화상'이다. 이 그림은 이젤 앞에 앉아 작업하는 모습으로 화가의 정체성을 드러낸 최초의 여성 자화상이다. 스물넷의 젊은 소포니스바는 자신을 정숙한 숙녀의 위치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부진 인상을 가진 전문 화가의 정체성도 드러냈다. 이 그림에서 소포니스바는 성서의 내용을 그리는 중이다.

소포니스바는 아흔의 나이를 넘겨서도 그림을 그리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가 그림으로 남긴 92세의 소포니스바는 여전히 단단해 보인다.

스페인 왕비 사망 이후 그는 왕실을 떠나지만 펠리페 2세의 배려로 왕실 연금을 받으며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후학 양성에도 힘쓰며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소포니스바는 잊혔다가 재발견되기를 반복했다. 그의 작품이 다른 남성 작가의 작품으로 귀속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소포니스바의 그림이 알폰소 산체스 코에요(Alonso Sanchez Coello),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Giovanni Battista Moroni) 등의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그의 스승이었던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의 영향을 받은 초상화들은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여겨지곤 했다.

여성 화가들은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사인을 덜 남겼다. 게다가 귀족 출신이었던 소포니스바가 그림을 파는 것이 당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작품을 거래하지 않았기에 그의 작품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소포니스바는 당시 여성들에게 여성도 전문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줬고 오늘날에는 '전문 화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최초의 여성'으로 기억된다.

1) 정확하게는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다. 하프시코드는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 피아노가 상용화되기 이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독주 및 합주 악기이다.

덧붙이는 글 |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6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앙귀솔라,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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