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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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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단계 하도급의 맨 밑바닥에 임금 하한선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불법 페이퍼컴퍼니나 브로커들이 중간에 치고 들어와 70년째 먹고 살 수 있었던 거예요. 분신한 노동자도 생전에 조합원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는데, 우리도 미국이나 독일처럼 적정임금제만 도입하면 건설노동자들의 고용불안 문제까지 같이 해결할 수 있다니까요."

경제학 박사로 28년간 건설산업을 연구해 온 심규범(58)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은 '적정임금제'만 있었다면 최근 분신한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이 죽음까지 내몰리진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노동정책을 연구하는 노동연구원(6년)과 원청 사업주 단체인 대한건설협회 산하 건설산업연구원(16년)을 두루 거친 심 위원은 국내에 손꼽히는 건설 분야 전문가다.

심 위원이 제시한 적정임금제란 일종의 건설업 최저임금제로, 노동자들의 임금 하한선을 법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심 위원은 "건물을 만드는 데 분명 100원이 드는데도 입찰자들이 80원, 70원, 60원을 불러 어떻게든 낙찰을 받고, 또 그다음 단계에서 50원 심지어는 45원을 부른 하수급자가 낙찰을 따가는 다단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맨 아래 단계에 있는 건설노동자들의 임금을 후려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며 "특히 저가의 불법 외국 인력(미등록 이주노동자)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제살 깎기식 저가 경쟁이 도를 넘어서는 시장 실패가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심 위원은 "임금 하한선이 없으면 건설사들은 저숙련이든 불법이든 어떻게든 저가를 찾기 위해 움직이지만, 임금 하한선이 생기면 같은 값이면 일 잘하는 노동자를 쓰고 싶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숙련노동자들을 먼저 채용하게 된다"라며 "고용 문제도 자연히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새 아파트인데 물이 새고, 2022년 광주 사고처럼 공사 중인 아파트가 무너져 인명 피해가 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소모적인 저가경쟁 때문"이라며 "적정임금제를 해야 품질과 안전도 확보될 것"이라고 했다. 심 위원을 5월 26일 서울 중구에서 만났다.

"불법다단계 하도급, 적정임금제로 막을 수 있다"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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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일, 건설사에 건설노조 조합원 채용을 요구하던 양회동(49) 지대장이 공갈 혐의를 받자 항의하며 분신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현장에선 그만큼 국내 건설노동자들의 실업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다른 산업과 달리 건설업은 생산물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주문이 들어올지 알기 어렵다. 일하는 사람들도 다 흩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일자리를 연결하는 구인구직이 필요한데, 이건 원래 공공도 하고 민간도 하고 노조도 하는 것이다. 노조가 단체협약이라는 이름으로 구인구직 역할을 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건설산업 일자리가 중요한 이유가 뭘까? 코로나19로 여기저기 가게들이 문을 닫았을 때, 자영업자들, 대학로에서 연극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나. 건설현장으로 가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나. 즉 건설업은 서민 일자리의 보루다.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일자리가 지금 저임금 외국 노동자들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노조에서는 '외국인력 채용하지 말라', '내국인을 채용하라'고 하는데, 오히려 외국인력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우하는 게 맞다. 외국인에게도 똑같은 임금을 주고, 체불하지 않고, 사회보험의 혜택을 줘야 한다. 그렇게 적정임금제를 하면 도리어 국내 노동자들의 고용이 안정될 것이다."
 
- 무슨 뜻인가.


"건설사 입장에서는 임금을 깎는 게 허용되는 순간 무조건 저임금을 찾아 나서게 돼 있다. 그러다 보니 불법 체류자(미등록 이주노동자)까지 고용하게 된 거다. 말도 안 통하고, 숙련도 없지만 저임금이라는 무기가 그걸 다 상쇄하니까. 강자가 약자의 단가를 후려치려는 건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문제는 그걸 자제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느냐 없느냐다. 적정임금제가 그 장치다. 하한선이 있으면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자를 찾는 게 아니라 숙련 노동자를 찾게 된다. 같은 단가면 숙련 내국인을 쓰지 비숙련 외국인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다.

미국과 독일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도 똑같이 저가의 외지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시기에 지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적정임금제를 도입했다. 대공황 시기였던 1930년대 초 미국 뉴욕주가 병원을 짓기로 했다. 실업자가 늘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뉴욕 노동자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실제 수주를 따간 곳은 저가의 흑인 노동력을 앞세운 앨라배마 주의 건설사였다. 정작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뉴욕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때 고안해 낸 것이 공공부문 적정임금제(Prvailing Wage)다. 임금 하한선을 둬 저가경쟁을 막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지역민 채용을 유도한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유럽연합 출범 등 유럽이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면서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임금이 높은 독일로 몰려왔다. 독일 노동자들이 참다 참다 파업을 했는데, 그때 슬로건이 '내국인·외국인 같은 임금 지급하라'였다. 명분상으로도 거부할 수 없고, 자국 건설노동자 보호에도 효과적이었다. 독일 건설업 최저임금제의 출발이다. 이 제도로 독일은 자국민 실업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건설산업의 불법다단계 하도급을 줄이고 직접고용 구조까지 만들어 내게 된다. 실제 현재 독일 건설 노동자의 80%가 정규직이다. 상상이 되나."

사라진 다단계 하도급, 늘어난 정규직 숙련공... 독일의 성공 사례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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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정임금제로 어떻게 다단계 하도급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건가.

"중간에 페이퍼컴퍼니, 브로커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건설업은 생산물이 너무 크고 고가다 보니 제조업처럼 생산물을 이미 만든 상태에서 시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주문생산 방식이다. 생산물이 없는 상태에서 약속만 갖고도 매매가 이뤄진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생산 능력이 없는 부실업체와 브로커들도 중간에 낙찰만 받으면 다시 하도급을 주는 방식으로 이윤을 챙길 수 있다는 맹점이 있다. 적정임금제가 없는 현재 한국 시스템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이 바로 이 페이퍼컴퍼니와 브로커들이다.

하지만 적정임금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나. 몇 단계인지조차 모를 끝없는 하도급의 맨 아래에 있는 건설노동자들에게 일정 임금 이상을 지급해야 되니 단가 후려치기에도 한계가 생긴다. 들어가는 비용이 어느 정도 고정되고 투명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제외한 자신의 몫을 계산하게 되고, 그것을 상위 단계에게 요구할 수 있게 된다. 하도급 업체 간 출혈경쟁이 줄어든다. 전화 한 통만 놓고 도급 따낸 다음에 시공능력 없으니 밑으로 내려주고 중간 이익 떼가던 부실업자들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 그렇다고 건설노동자들의 정규직까지 보장되나.

"독일은 건설업 최저임금제에서 시작해 건설사업 낙찰 방식에 기능공들의 숙련을 반영했다. 우리에게 페이퍼컴퍼니가 그토록 많은 이유가 뭘까? 발주자가 정한 건설 가격을 가깝게 맞출수록 낙찰 점수를 높게 주는 이상한 시스템 때문이다. 가격을 여러 개 부를수록 그만큼 낙찰 확률이 높아지니까 페이퍼컴퍼니를 마구 만들어서 가격을 내보는 거다. 얼마나 심하면 운으로 낙찰된다고 해서 '운찰제'라고 부르겠나. 이 짓을 70년 넘게 해왔다.

거기다가 대학 나온 '기술자' 인력은 평가기준에 넣으면서 대학 안 나온 '기능공' 인력은 평가기준에 넣질 않는다. 현장소장이 되려면 기술자 자격증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실제 현장소장 중 기술자 자격증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현장 상황을 정말로 알고 시공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기술자가 아닌 기능공들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 공사 현장에 가보면 현장소장에 그 지역 대학 건축·토목과 졸업생 중에 주부를 찾아서 월 500만 원 주고 이름만 올려놓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평소 일할 땐 기능공들이 현장소장 역할을 하고, 감사가 나올 때만 자격증 가진 주부를 데려다 앉혀놓는 식이다.

반면 독일은 입낙찰 때 건설사들의 시공 능력을 실질적으로 평가하고, 이때 그 회사에 숙련 기능공 인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과거에 이 회사가 A건물을 잘 지었는데, 그 건물을 만들었을 때의 기능 인력들이 아직도 회사에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고 실제 '사람이 재산'이 된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숙련 기능공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정규직으로 채용할 유인이 생긴다.

또 독일은 공사를 할 수 없는 겨울철에는 고용보험으로 '계절적 조업 단축수당'을 지급해 건설사들의 정규직 채용을 뒷받침한다. 건설업 특성상 겨울에는 작업이 힘들어 계절적 실업이 발생할 경우,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에게 실업수당을 주느니 차라리 고용상태를 유지하면서 계절 수당을 주는 것이 사회적 비용이 더 적게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인 노력들로 독일에선 건설 노동이 정규직 일자리로 자리잡았다. 우리의 '노가다'처럼 독일에서도 건설업을 '노동자들의 마지막 정거장'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적정임금제 등의 노력을 통해 성과를 낸 것이다."

"임금체불 같은 명백한 불공정엔 침묵"
 

- 국내에도 적정임금제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의지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이미 서울시는 2017년, 경기도는 2019년부터 시·도가 발주하는 공사에 대해 적정임금제를 도입했다. 2018년 올림픽대로 인근 서울시 공사현장에서 30년 경력의 형틀목공 반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반장님 말이, 적정임금제를 해서 단가 걱정을 안 하게 되니 그간 업계에서 봐온 에이스들만 모아서 팀을 꾸렸다는 것이다. 일 잘하는 숙련공들에게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니, 빨리빨리 하라는 말도 안 했는데 평소에 단위 면적당 성과급을 걸고 노동자들 압박했을 때보다 속도가 더 잘 나오더라는 거다. 우리도 적정임금제가 가능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매일매일 떨어져 죽는 공사현장 안전 문제도 마찬가지다. 안전 연구를 위해 현장 소장님들 만나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한 소장님이 그랬다. '아니 우리도 여기 짬밥이 30년씩인데 안전고리 하면 안 떨어진다는 걸 몰라서 안 하겠어요? 하도 단가가 안 맞으니 안전고리 묶었다 풀었다 할 시간도 없어서 이렇게 하는 거 아니예요'라는 거였다. 기가 막혔다.

결국 지금의 체계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팀반장·오야지, 건설사 등이 모두 불행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지불능력이 없으니까 안전 문제나 휴게실·화장실 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조합과 만나봐야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럴수록 노사관계는 극단적으로 된다. 결국 적정임금제를 통해 기업들도 제 몫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면, 현재의 갈라진 노사관계도 풀릴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본다."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경영전략본부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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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건설사들은 적정임금제를 반대한다.

"대한건설협회 등 사용자 단체들을 만나보면 제도 취지에는 동의하는데 회원사들이 반대한다는 식으로 토로한다. 그건 사실 협회 회원사 중 상당 부분이 페이퍼컴퍼니들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다. 각 구성원들에게 이익이라고 해서 꼭 조직 전체의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단가를 후려쳐왔는데 건설사들도 죽겠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엄살도 있겠지만 제대로 된 건설사들에겐 현재의 방식이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고, 불법 부실 페이퍼컴퍼니들만 배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적정임금제를 보러 갔을 때 그곳 대형 건설업체 이사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배들도 처음엔 적정임금제에 반대했다. 지금은 적정임금제 덕분에 우리도 먹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우리 건설사들은 진실을 외면한 채 애초 발주 시점부터 돈을 많이 내려주면 저절로 밑으로 내려갈 거라고들 한다. 천만에.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 하한선이 없는 한 낙수효과는 없다. 건설사들도 이젠 어떤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인지 결정할 때가 됐다."

- 정부가 할 일은.

"얼마 전 경기도 화성 아파트 외벽 높은 데 매달려 '돈 주세요'라고 쓴 도장공 사진을 봤다. 도대체 이게 뭔가? 공정을 강조하는 정부인데, 임금체불만큼 불공정한 게 있나. 그분은 틀림없이 뙤약볕에서, 높은 데서 위험하게 일을 했을 것이다. 근데 왜 정당한 대가를 못 받고 있나. 왜 저런 불공정에 대해서는 움직이지 않나. 적정임금제야말로 공정을 담보하는 제도다.
 
5월 24일 오후 경기 화성시 반월동의 모 아파트에서 한 작업자가 밀린 임금을 달라며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작업자는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붉은 페인트로 '돈 주세요'라는 글씨를 쓰기도 했다.
 5월 24일 오후 경기 화성시 반월동의 모 아파트에서 한 작업자가 밀린 임금을 달라며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작업자는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붉은 페인트로 '돈 주세요'라는 글씨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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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건설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토부에서 불법재하도급 신고를 받겠다고 나섰다. 이미 법상으로는 재하도급이 금지돼 있지만, 그것만으로 안 된다는 걸 모두가 보았다. 신고제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포상제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10만 원, 20만 원 포상으로는 노동자들이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다. '불법 재하도급 500만 원 포상'이라면 어떨까. 건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포기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신고할 수 있을 만큼의 현실적인 포상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들을 감시자로 활용할 수 있다. 안 할 이유가 없다. 이번 분신 사건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건설업 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다. 정부가 그 힘을 잘 썼으면 좋겠다."

태그:#불법다단계, #분신, #양회동, #적정임금제,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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