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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5월 30일,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은 에투섬 수비대의 전멸을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에투섬 수비대 전멸 발표는, 일본군의 패배를 축소/은폐해왔던 그동안의 정책을 뒤집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때, 대본영은 에투섬 수비대의 전멸을 '옥쇄'(玉砕), 즉 옥이 깨지듯 아름다운 최후로 예찬했다. 이 옥쇄 문구가 총력전 체제의 전면으로 등장한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넘어 일본사, 그리고 동아시아사 위에서 커다란 함의를 가진다.

개전 초기, 아시아 식민지 지역 각지에서 서구열강을 축출하며 승전보를 울리던 제국 일본의 팽창은 스스로도 걷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팽창의 기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군은 미 해군 기동함대와의 결전 후보지 중 한 곳이자, 미국 본토라는 상징성을 갖는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에까지 손을 뻗게 된다. 특히 일본과 가까운 이 지역은 추후 일본 본토 공습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표적으로 설정되었다.
  
제공권과 제해권의 상실로 고립된 에투섬 수비대는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결전에 임해야 했다.
▲ 에투섬의 일본군 수비대 제공권과 제해권의 상실로 고립된 에투섬 수비대는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결전에 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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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일본군은 알류샨 열도의 에투섬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섬을 제압하였다. 이제 에투섬 수비대는 비행장을 건설하여 연중 악천후가 계속되는 이 절해고도의 섬을 일본 측의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탈바꿈시킬 참이었다.

그러나 국력의 한계를 초과한 팽창은 결과적으로 제국 일본에 독이 되었다. 한정된 병력과 자원으로는 아시아 태평양 각지에 걸친 방대한 전선을 유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 해군의 우세는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로 꺾이고 말았다. 1942년 하반기에서 1943년 초에 걸친 과달카날 전역의 절망적인 소모전은 제국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는 것과 같았다. 결정적인 전투들에서의 승리와 압도적인 생산력에 힘입어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선 미국은 본격적으로 탈환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니, 미국 본토에 해당하는 알류샨 열도의 탈환은 당연히 지상과제로 설정되었다.

이미 1943년에 접어들면서 에투섬 등 알류샨 열도의 일본군 점령지에는 미국의 거센 압력이 엄습했다. 일대의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국에 넘어가면서 에투섬으로의 보급선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1943년 5월 12일, 에투섬 수비대의 5배에 달하는 규모의 미군이 상륙전을 개시하자 일본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에투섬에 상륙한 미군은 압도적 전력으로 일본군을 몰아붙였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는 일본군의 행태는 미군들 입장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에투섬에 상륙한 미군 에투섬에 상륙한 미군은 압도적 전력으로 일본군을 몰아붙였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는 일본군의 행태는 미군들 입장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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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상륙 후 격전이 시작되자 에투섬 수비대의 지휘관 야마자키 야스요(山崎保代) 대좌는 전보를 통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대본영에 보고했다. 야마자키 대좌의 보고에 대본영은 즉각 답신을 보냈다.
 
대본영은 에투섬을 확보하고 적의 의도를 분쇄하기 위해 모든 방도를 강구하고 있음. 긴급히 필요로 하는 병력, 군수품 등을 즉각 보고할 것.
 
대본영이 에투섬 사수에 굳은 의지를 보이고 지원을 약속한 것은,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인 수비대를 이끌고 분투를 이어가던 야마자키 대좌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낭보였다. 야마자키 대좌는 1500명 규모의 지원병력을 비롯해, 식량과 탄약, 의약품 등 전투 계속에 필수적인 물자들을 대본영에 요청했다. 곧 본토에서 지원이 당도한다는 철썩 같은 약속에 수비대 병력들 역시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도 실낱 같은 희망을 붙들 수 있었다.

그러나 대본영이 약속했던 지원은 없었다. 무기가 마모되고 탄약이 소진된 가운데, 에투섬 수비대에 의한 유의미한 방어전은 사실상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땅으로도, 바다로도, 하늘로도, 탈출구는 없었다. 혈로 없는 막다른 길 앞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戦陣練 : 1941년 1월 8일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의 명의로 시달된 군인 행동규범)의 강령만이 생존 장병들을 옥죄고 있었다.

에투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살아남은 타카하시 토미마츠 씨는 2010년 NHK와의 인터뷰에서 죽음이 강요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군대의 규칙이니까 이것(전진훈)만큼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죽으라는 말이 전진훈에 있으니까, 그니까, 살아남으면 적에게 잡혀가니까, 그니까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직 목숨을 이어가고 있던 장병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그리고 최후의 총공격에 참가하는 것. 부상으로 인해 움직일 수조차 없는 부상병은 이 두 가지 선택지조차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살해되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꿈조차도 꿀 수 없었다.

5월 29일, 야마자키 대좌 이하 에투섬 수비대 잔존 병력은 미군을 향해 총돌격하였다. 수류탄이나 군도를 들고 '만세'를 외치하며 무모하게 돌격하는 일본군 병력들은 미군에게 손쉬운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에투섬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나게 되었다. 에투섬 수비대의 전멸을 전하는 대본영 발표는 그 다음날 라디오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군 잔존병력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자살'과 '돌격' 뿐이었다. 살아남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 최후의 돌격을 벌이다 전멸한 일본군 잔존 병력들 일본군 잔존병력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자살'과 '돌격' 뿐이었다. 살아남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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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섬을 수비하던 우리 부대는 결국 모두 옥쇄했습니다. 야마자키 부대장은 단 한 번도 병사 한 명의 증원도 요구한 적이 없고, 또 한 발의 탄약 보급도 원한 적이 없었습니다. (중략) 아, 이 얼마나 장렬하고 또 장렬합니까.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저 전진훈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지원을 약속해놓고는 섬을 구원하지 않았던 대본영의 책임은 온데간데없었다. 에투섬 수비대는 지원을 구걸하며 본토에 부담이 되는 대신 옥쇄했다는, 즉 옥이 부서지는 것과 같은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했다는 미사여구만이 대중을 흔들고 있었다. 대본영은 단 한 명도 포로가 되지 않고 2638명의 장병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에투섬 수비대의 예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국민전의 고양에 이용하고자 했다.

수비대 병력 모두가 전사했다는 대본영 발표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26명의 병사들이 중상을 입고 미군에 생포되었다. 그러나 대본영은 필요에 의해 생존자들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들은 대본영에게 있어 살아남아서는 안되는 존재들이었다. 에투섬 수비대는 반드시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멸한 모범 사례'로 남아야만 했다.

옥쇄한 장병들이 '군신'으로 추앙되는 가운데, 모래가 든 유골함을 앞세운 대대적인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미디어에서는 앞다투어 '영령들의 뒤를 이어 일억총옥쇄를 각오할 것'을 호소했다. 전후방의 구분이 없는 총력전 체제 아래서, 옥쇄를 각오하는 것은 이제 군인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있어서도 당연한 의무이자 미덕으로 설정된 것이다.
   
에투섬 수비대의 전멸은 옥쇄로 선전되며 국민전의 고양에 이용되었다.
▲ 모래가 든 유골함을 두고 에투섬 수비대의 넋을 기리는 학도들 에투섬 수비대의 전멸은 옥쇄로 선전되며 국민전의 고양에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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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대좌는 에투섬 옥쇄를 상징하는 인물로 전시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추앙되었다.
▲ 에투섬 수비대를 지휘한 야마자키 야스요 대좌 야마자키 대좌는 에투섬 옥쇄를 상징하는 인물로 전시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추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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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섬 수비대의 옥쇄 발표 이후, 아시아와 태평양의 전선 각지에서는 계속해서 옥쇄 소식이 날아들었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국한 영령들의 위패가 늘어날수록, 살아남은 이들이 순국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도, 제어할 수 없는 전쟁의 폭주기관차는 그렇게 파국의 길로 달리고 또 달렸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설 자리는 없었다.

80주기를 맞은 에투섬 수비대의 옥쇄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군가 '전선을 간다'),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군가 '브라보 해병') 등, 순국선열들을 예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죽음의 운명공동체로 묶는 사상은 여전히 우리군의 정신 문화 속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인권의 가치가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촌 각지에서 전란이 반복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 위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개인의 신념을 빚어내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태그:#에투섬, #옥쇄, #전멸, #선전,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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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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