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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음으로 향한 도시는 사마르칸트입니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사이에는 2011년부터 고속철도가 개통해 운행 중에 있습니다. 300km 넘는 거리를 두 시간 안에 주파하죠. 옛 소련권에서는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개통한 고속철도입니다.
 
물론 저도 이 고속철도를 이용해 사마르칸트로 향했습니다. 열차는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심을 벗어납니다. 곧 중앙아시아 여행에서 기대했던 풍경이 펼쳐집니다. 시야 끝까지 펼쳐진 넓은 초원과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소와 말.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이 없는 기차 여행입니다.

그런 평원을 한없이 달리다 그 한가운데에 순식간에 도시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만나는 도시가 바로 사마르칸트입니다. 실크로드의 중심 사마르칸트는 그렇게 여전히 초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아프로시옵’ 고속열차. 철도 궤간은 러시아와 같고, 열차는 스페인에서 수입해 왔다.
 ‘아프로시옵’ 고속열차. 철도 궤간은 러시아와 같고, 열차는 스페인에서 수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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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제가 중앙아시아에서 여행한 도시는 역사가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도시 자체의 역사는 깊더라도, 한 국가의 중심지가 된 것은 근대에 접어든 이후였죠. 하지만 사마르칸트는 다릅니다. 이곳이야말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온전히 품고 있는 역사 속의 도시입니다.
 
사마르칸트는 현존하는 중앙아시아 도시 중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오아시스 도시로 그 역사는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기록에서도 사마르칸트는 번성한 도시로 등장합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핵심이 되는 도시로, 실크로드 무역의 부를 거머쥔 도시이기도 했죠.
 
물론 그랬던 만큼, 이 도시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계 민족이 있었다가, 8세기 경에는 투르크인의 도시가 되었죠. 사만 왕조, 카라한 왕조, 호라즘 제국, 몽골 제국까지 여러 국가가 이 도시를 지배했습니다.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된 뒤로는 이슬람 세계 문화와 학문의 최전선에 있었죠.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이 묻힌 영묘. 티무르 집권기 사마르칸트로 이장되었다.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이 묻힌 영묘. 티무르 집권기 사마르칸트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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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가 침체기를 맞은 것은 교역로가 변화한 16세기부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더 남쪽에 있는 부하라(Bukhara)가 수도의 역할을 했죠. 이후 해양무역이 발달하면서 무역로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갔습니다. 결국 사마르칸트도 1868년 러시아에 복속되었죠.
 
이후 소련 시대에는 타슈켄트가 우즈벡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마르칸트는 여전히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입니다. 도시 광역권 전체로 따지면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가지고 있죠. 타슈켄트에서 시작된 고속철도가 사마르칸트로 연결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덕분에 사마르칸트의 풍경은 독특합니다. 100만이 거주하는 현대적인 도시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화려한 과거의 유적과 폐허가 남아 있습니다. 4차선 도로 옆, 도심 한가운데에 성벽과 초원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과거의 흔적과 현대의 영광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라고 할까요.
 
도심 한복판의 초원
 도심 한복판의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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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는 한때 중앙아시아를 선도하던 도시였습니다. 사마르칸트를 지배하는 자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가 있었죠. 지금도 사마르칸트는 결코 작은 도시는 아닙니다. 그런 만큼, 중앙아시아에는 현대사에 접어든 뒤에도 사마르칸트를 둘러싼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실 사마르칸트의 인구 상당수는 우즈벡인이 아닌 타지크인입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스스로를 타지크인이라 칭하는 경우는 적죠. 하지만 <중앙아시아 연구>(Central Asian Survey)지 등에서는 사마르칸트 인구의 최대 70%가 타지크어를 모어로 하고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사마르칸트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사마르칸트는 처음부터 페르시아계가 건설한 도시였으니까요.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계 인구가 대부분 타지크인으로 흡수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마르칸트의 주민들도 타지크인과 동질성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마르칸트 전경
 사마르칸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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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앙아시아의 국경은 대부분 1924년 소련에 의해 설정된 것입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들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이 연대해 소련에 반발할 가능성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란이 이미 소련과 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페르시아계 인구를 배려할 이유는 없었죠.
 
당시 국경을 획정한 소련 공산당 중앙아시아국 특별영토위원회에는 각 민족별로 대표자가 참여했습니다. 카자흐인은 5명, 우즈벡인은 4명이 참석했죠. 키르기즈인과 투르크멘인도 1명씩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타지크인은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사마르칸트 뿐만이 아닙니다. 중앙아시아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도시는 대부분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습니다. 부하라, 히바, 코간트까지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니 물론 타지크뿐 아니라 키르기즈 등 다른 국가와의 분쟁도 이어졌죠.
 
레기스탄의 야경
 레기스탄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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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는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낮은 건물 사이 우뚝 선 모스크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수백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여전히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있을 것 같은 골목과 그들이 다시 길을 떠날 것 같은 초원까지 이어집니다.
 
하지만 도시의 역사는 그렇게 갇혀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분쟁은 천 년도 더 지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마침표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과거사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사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지배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패권을 가졌던 우즈베키스탄의 역설적인 지위를 보여주는 도시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슬람 카리모프 영묘
 이슬람 카리모프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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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를 걷다 우연히 어느 공동묘지를 만났습니다. 유대인의 공동묘지더군요. 다른 한쪽에는 무슬림의 공동묘지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의 영묘는 유적으로 남아 관광지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2016년 사망한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자 이슬람 카리모프 역시 고향인 사마르칸트에 묻혔습니다.
 
천여 년 전의 유대인부터, 오늘의 독재자까지. 이 사람들이 살았던 모든 시대에 걸쳐,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상징이었습니다. 과거사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현대사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무덤 사이를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이들 모두가 사마르칸트라는 도시의 역사를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도시 어딘가에는 이들이 예배를 드린 모스크가, 이들이 살았던 집이, 이들이 걸었던 골목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우리의 시간이 과거의 역사와 연결된 일직선 위에 있다는 것을 문득 생각했습니다. 사마르칸트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역사의 흔적이 짙게 남은 이 도시에서는 조금 더 눈에 띄었을 뿐이겠죠. 도시의 흔적은, 사람이 있는 한 마침표 없이 끝내 이어진다는 사실이 말이죠.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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