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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후쿠시마의 아이'였던 한 소녀가 던진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12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는 엄마가 되어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그들'은 안녕할까요? '그들'의 삶, 일상, 활동과 목소리를 따라 '우리'로 얽힌 사람들, 그 인연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연결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원불교환경연대 탈핵기록단이 한 달에 한 번, '그들'과 '이웃'을 만나러 갑니다. 4화는 영광에서 농사지으면 30년 넘게 핵발전소 반대투쟁을 해온 농사꾼 노병남씨의 탈핵이야기를 싣습니다. 무시무시한 한빛 핵발전소 사고이야기가 이어집니다.[기자말]
[기사수정 : 31일 오전 10시 45분]
 
2017년 8월 한빛핵발전소 앞에서 영광군의회, 농협, 기관단체장 등이 총체적 부실을 지적하며 한빛핵발전소의 폐쇄를 요구하고 있다. 맨 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노병남 회장.
 2017년 8월 한빛핵발전소 앞에서 영광군의회, 농협, 기관단체장 등이 총체적 부실을 지적하며 한빛핵발전소의 폐쇄를 요구하고 있다. 맨 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노병남 회장.
ⓒ 원불교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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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30일 영광고창주민 100여 명이 서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앞에서 한빛 4호기 재가동 반대 항의집회를 열었다. 지난 4월 초 기자와 만난 노병남 회장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날도 겁나게 춥드만요. 핵발전소는 18개월 돌리고 40~60일 동안 세워서 점검해요. 2017년 계획예방 기간에 한빛 3호기에서 82개, 4호기에서 102개의 구멍이 발견됐어요. 그것도 방사능누출을 막는 최일선에 있는 격납시설에 구멍이 숭숭 뚫린 거지요. 핵마피아들이 입만 열면 5중 방호벽으로 방사능 누출 가능성은 없다고 선전해 왔던 그 방호벽이 뚫린 것이에요. 그런데 5년 7개월 동안 진상조사하고, 구멍 때우고, 녹슨 철판 오려내고 땜질해서 다시 돌린다는 거예요. 게다가 상부 돔은 구멍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로 가상검사를 했어요. 전수 조사 안 하고 가상으로 괜찮을 거야. 뭐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한수원과 규제기관 원안위가 이런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해요."(노병남 회장)

한빛 3·4호기는 우리나라 최초로 국내 기업인 현대 건설이 주도하여 건설하고 1995년부터 상업가동을 시작한 핵발전소다. 한국 순수기술로 건설해 드디어 핵발전 강국으로 발돋움했다고 핵마피아들이 침 튀기며, 선전해 대던 한빛 4호기 격납건물 콘크리트 벽체에서 부실시공이 확인된 것은 2017년 6월 26일의 일이다. 둥근 벽체를 감싼 내부철판(CLP)에 부식 흔적이 있어 일부를 걷어냈더니 원주 방향 전체에 약 20㎝ 깊이의 빈 구멍(공극)이 나 있었다. 한빛 3·4호기 격납고에 184개의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고 난리가 났지만, 공사할 때부터 부실공사라고 소문이 났었어요. 영광사람들 사이에서 저러다 반드시 사고 난다는 이야기들이 나돌았어요."(노병남 회장)

한빛 3·4호기의 부실공사는 이를 실제로 목격한 제보자들과 건설 당사자들이 고발한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17년 8월 10일 발표한 환경운동연합 성명서에 따르면 당시 한빛 3·4호기 공사에서는 녹이 슨 철근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강도가 떨어지는 철근을 설치하여 철근이 매우 조밀하게 설치되었다. 그리고 규격 이상 크기의 자갈이 많아 골재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등 콘크리트 다짐 작업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건설 당시 불법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현장에는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 한국전력의 개입이 없었다. 그리고 격납건물 건설에 대한 관리·감독 부실, 품질 검사의 실패가 연이어 발생했으며 격납건물 콘크리트 다짐 작업을 미숙련 노동자가 진행했다는 제보 등이 잇따랐다.

영광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빛원전안전성확보 민관합동조사단'이 꾸려져 2019년까지 특별점검을 벌인 결과 4호기 벽체에서 발견된 공극은 140개나 됐고 이 중 깊이가 157cm나 되는 것도 있었다. 한빛 3·4호기 상황은 동굴이라고 불릴 정도로 더욱 심각해졌다. 또한 192곳의 내부철판 부식, 23곳의 철근 노출이 확인돼 한빛 4호기는 재가동은커녕 조기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2019년 당시 가동 중인 핵발전소 24기에서 발견된 공극은 332개이고 공극의 90%는 한빛 3·4호기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철근 노출은 한빛 3호기에서만 184곳으로 23%를 차지했다. 원자력계 인사들로 구성된 안전점검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킨스)조차도 시공업체가 애초 설계상 제거해야 하는 임시보강재를 그대로 둔 상태로 야간에 자주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한 사실을 확인하고, "공기 단축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경영 문화가 공극 발생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결론 냈다.

한빛 4호기와 함께 격납건물에서 공극이 발생했던 한빛 3호기는 '한빛 4호기 격납건물 상부돔 내부철판(CLP)검사', '국회 차원의 부실 공사 진상조사 및 대책 마련', '부실 공사에 대한 군민 피해보상' 등 7가지 이행사항을 약속하고 2020년 11월 14일 가동중단 2년 반 만에 재가동됐었다.

그러나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한수원은 한빛 4호기에서 발견된 공극을 모르타르로 메우고 노출된 철근을 시멘트로 덮는 등의 방식으로 보수를 진행하고 재가동을 추진했다. 핵발전소 하루 세워놓으면 10억 원의 적자 타령이 재가동의 이유였다. 땜빵, 땜질, 누더기 한빛 4호기는 영광 고창은 물론 환경단체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2022년 12월 11일 원안위 승인을 얻어 재가동에 들어갔다.

20년간 망치 품은 한빛 4호기
 
생명평화탈핵순례 501차 생명평화탈핵순례에 참석한 원불교도와 영광주민들이 영광시내에서 수명연장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생명평화탈핵순례 501차 생명평화탈핵순례에 참석한 원불교도와 영광주민들이 영광시내에서 수명연장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원불교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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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뿐이 아니에요. 2017년 8월에는 4호기 증기발전기 상부 세관 틈에서 가로 12mm, 세로 7mm의 소형 망치가 발견되었어요. 증기발생기는 원자로, 격납건물 등과 함께 핵발전소 3대 안전 방호시설이에요. 증기발생기 내부는 고온고압에 물이 불규칙적으로 흐르고 8400개의 세관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물질이 있거나 돌아다니면 세관을 건드려 냉각기를 멈추게 해서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요. 공기 단축 하려고 얼마나 밀어붙였는지 그 당시 망치를 제거하지도 않고 허겁지겁 덮어버린 거지요. 망치의 존재 자체를 20년 동안이나 몰랐던 것이 더 큰 일이에요."

증기발생기는 원자로 설계수명과 같다. 1995~1996년 상업 가동을 시작한 한빛 3·4호기 증기발생기를 2019년 교체하겠다고 하더니 한빛 4호기는 그보다 2년이나 앞당겨 2017년 교체를 서둘렀다.

"환경단체에 제보가 들어가고 문제를 제기하니까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언론에 발표한 거죠. 한수원과 핵마피아들이 핵발전소를 관리하는 것이 방법이에요. 최대한 은폐하고 축소하다가 들키면 '원자로는 이상이 없다. 방사성 물질 누출 없다'라고 발뺌하며 위험한 핵발전의 본질을 감춥니다."

노병남 회장은 이토록 위험하고 섬세한 발전소를 운영하는 집단이 양심도 없고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이 가장 핵발전소의 가장 위험 요소라고 지적한다.

'한빛원전안전성확보 민관합동조사단'에 참여한 원자력안전연구소 한병섭 소장은 2017년 8월 18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증기발생기가 중요한 시설이고 순환되는 냉각수에 의해 금속 물체가 세관을 파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혈관에 돌고 있는 물체로 심장이 손상 입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1mm의 세관 8400개가 있는 증기발생기에 망치가 20년 동안이나 돌아다녔어도 사고가 없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하느님이 보우하사'이다.

"증기발생기 교체에 3천억 원이 드는데 시공사인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에 피해보상도 제대로 못 받았다면 사업자나 시공사 규제기관 모두 한통속이라고 봐야죠. 그런데 아이러니는 교체하는 증기발생기 제작을 두산중공업에 맡겼다는 거예요."

2019년 1월에는 한빛 3호기 격납건물 내부에서 30cm 망치가 발견됐다. 한수원은 "망치가 고정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하며 안전에 문제가 없다"라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읊조렸다. 

반핵운동은 신앙고백
 
1993년 영광 3, 4호기 반대투쟁 당시 군내버스에 올라 선전전을 벌이는 청년 노병남.
 1993년 영광 3, 4호기 반대투쟁 당시 군내버스에 올라 선전전을 벌이는 청년 노병남.
ⓒ 노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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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고리핵발전소를 시작으로 월성, 울진, 영광 등에 핵발전소가 지역에 들어설 때만 해도, 핵발전소는 5·6공 정권에 의해 민족중흥의 불로 홍보되며 지역경제 발전은 물론 산업화와 문명화의 첨병으로 강요되었다. 당시 핵발전소는 2조 원대의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지역을 부흥시킬 산업으로 여겨졌고 영광군이 시로 승격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영광 1·2호기가 상업 운전을 시작한 1986년 8월 25일보다 4개월 전인 4월 26일 체르노빌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반핵운동이 세계적인 기류가 되었다.

1988~1989년 영광핵발전소 노동자 김익성씨 두 차례 무뇌아 출산, 1990년 노동자 문행섭씨 대두아 출산과 고창군 상하면 기형 가축 출산 보도가 이어졌다. 또한 1990년 영광 1호기 방호복 세탁부에서 일했던 김철씨가 방사성 물질 피폭된 뒤 얼마 후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등 핵발전소 관련 고장 사고까지 이어지면서 공포가 확산되었다.

더욱이 1988년 국회 5공 비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청문회가 열리면서 영광 3·4호기 건설 허가와 관련한 안전성과 비리가 문제 되면서 영광지역사회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1989년 3월 영광핵발전소추방협의회(아래 핵추협)가 전국조직보다 한 달 먼저 결성되면서 영광사람들이 본격적인 반핵운동에 뛰어든다. 영광 3·4호기는 건설 당시부터 문제가 불거져 '핵연료 장전 저지대회'를 비롯한 집회와 행진이 연속적으로 열렸다. 1991~1994년 사이 항의 집회 참가자는 10만 명이 넘었고 영광핵발전소는 영광군민과 전남도민에게 불안한 일상을 강요하고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1990년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자주적 농민회가 영광군농민회로 통합되면서 영광군농민회는 영광지역 뜨거운 현안이었던 핵발전소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반핵운동은 제겐 신앙고백이었어요. 기독교청년회 활동하면서 핵무기반대 평화운동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어요. 핵무기와 핵발전은 연결되어 있잖아요. 핵발전소에서 나온 플루토늄이 핵무기 원료가 되는 거고요. 종교인에게 생명·평화는 거스를 수 없는 소명 같은 거예요."

이십 대 후반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영광으로 돌아온 청년 노병남은 농사도 짓기 전에 영광핵발전소추방협의회(이하 핵추협) 간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핵공학을 전공하고 당시 영광핵발전소 설계에 참여했던 교회 선배가 기술을 배우러 미국 출장을 다녀오더니 저한테 지역에서 농사지으면서 살려면 핵발전소 문제에 관해 공부하라고 권했어요. 아마 미국 출장 가서 1979년 쓰리마일 핵사고에 대해서도 듣고 그린피스 같은 국제환경단체 활동 등에 대해서도 들었나 봐요. 영광핵발전소 공사 속도나 기술자들의 숙련도, 우리나라 기술에 대한 신뢰성 문제 등이 걱정된다고 했어요. 본인은 공사 끝나면 떠나지만, 영광에 살려면 핵 문제를 제대로 아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1992년 부임한 영광성당 박재완 신부와 원불교 영산성지 김현 교무를 중심으로 천주교, 원불교 등 종교계의 반핵운동이 활발했었다. 개신교는 반핵운동에 관심 있던 목사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영광지역 반핵운동에서 맥이 끊어진다.

"지금은 핵발전을 벗어난다는 의미로 탈핵이라고 하지만 1990년대는 핵발전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반핵이라고 했어요. 반핵운동 하려고 하니 일단 공부부터 해야겠더라고요. 이하영, 주경채씨 등 농민회원들과 김용국 가톨릭농민회원 등도 각자 핵발전소에 관해 공부를 무지하게 했어요. 핵마피아들하고 싸우려면 논리적으로 뒤지지 않아야 된께 누가 갈차 주는 사람도 없이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진짜 코피가 다 나더라니까요."

영광군 농민회 이하영, 주경채, 노병남 그리고 영광성당 김용국씨는 핵공학자 누구와도 붙어도 지지 않는 실력을 갖췄다. 핵발전소에 대해 알면 알수록 발을 뺄 수 없는 것이 반핵·탈핵 운동이다. 사고가 나면 재기 불가능할 만큼의 재앙이니 사고 나기 전 예방과 더는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40년이 넘는 동안 핵산업은 막강한 자본력으로 정·관계 전방위적인 카르텔을 형성해 난공불락, 무소불위한 권력이 되어갔다. 영광핵추협과 천주교, 원불교, 불교 등 종교계까지 3·4호기 반대 투쟁에 참여했지만 1994년 당시 사업자였던 한국전력은 영광 5·6호기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영광주민들은 영광 3·4·5·6호기 건설 저지라는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1995년 노병남 회장은 김용국, 김현수 등과 구속돼 1년 6개월 실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결국 1996년 10월 19일 영광 3·4호기가 준공식과 5·6호기 기공식이 열리고 2002년 영광 5·6호기가 상업 운전을 시작한다.

"그때의 충격으로 어머니가 심장질환을 얻어 지금까지 고생하세요. 그래도 어쩌겠소 알아버렸으니 끝까지 해야제."
 
영광성당 교우들과 1995년 1월 강화군에 위치한 굴업도를 찾아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지지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청년 노병남.
 영광성당 교우들과 1995년 1월 강화군에 위치한 굴업도를 찾아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지지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청년 노병남.
ⓒ 노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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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매거진에도 연재합니다.


태그:#한빛 4호기에 망치, #한빛 3.4호기 구멍숭숭, #한빛핵발전소 조기폐쇄, #노병남 영광농민회장, #탈핵 잇_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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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연결된 삶을 그리며 오늘도 바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갑니다. 영광에 22년 살면서 '핵 없는 세상'을 염원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빠른 태양과 바람의 나라를 꿈꿉니다. 생태와 자연, 젠더와 영성에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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