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 ⓒ 프라이빗커브



지난 5월 27일, 수도권에는 상당한 비가 내렸다. 부처님 오신날 연휴가 무색하게, 날씨는 그다지 자비롭지 않았다. 그래도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해야만 했다. 올해 15주년을 맞은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하 서재페)' 둘째날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티켓을 수령하기 위해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페스티벌 팔찌를 손목에 찼다.

88 잔디마당에 조성된 야외 무대에 입장하자, 스페니쉬 할렘 오케스트라(Spanish Harlem Orchestra)의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이들의 공연과 함께, 나의 올해 첫 페스티벌이 시작되었음을 체감했다. '스페니쉬'라는 이름과 달리,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히스패닉들이다. 그런만큼 음악적 준거점을 쿠바나 푸에르토리코 등의 음악에 두고 있다. 맥주를 한잔 마시고, 이들이 선사하는 라틴 재즈의 그루브를 만끽했다. 우비를 입고 춤을 추는 관객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때로는 빗물도 공연이 된다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권진아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권진아 ⓒ 프라이빗커브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꾸려진 스파클링 돔 스테이지에서는 권진아가 인상적인 공연을 펼쳤다. 신곡 'Raise Up The Flag', '우리의 방식' 등 스케일이 큰 록 스타일의 노래부터 'Fly Away' 등 경쾌한 팝송, 그리고 '운이 좋았지'같은 절절한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울렀다. 무엇보다 그는 탁월한 노래로 청중을 집중시키는 가수였다. 마지막 곡 '여행가'가 마무리될 때쯤에는, 97년생인 그에게서 대가수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기상청 예보와 다르게, 저녁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거세졌다. 핸드볼 경기장에는 새소년, 이승윤 등 팬덤이 많은 음악가들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비를 피하는 관객까지 모이다 보니 입장 제한 조치가 이뤄질 정도였다. 빗물로 머리를 감다시피 했을 때쯤, 야외무대에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가 등장했다. 그는 오늘날의 재즈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주인공이다.

로버트 글래스퍼는 재즈의 명가인 '블루 노트' 출신의 피아니스트지만, 그는 2023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알앤비 앨범상을 수상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글래스퍼에게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재즈와 힙합, 알앤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켄드릭 라마의 걸작 < To Pimp A Butterfly > 에도 그의 손길이 묻어 있다.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 프라이빗커브

 
이번 공연에서도 거장의 유연함은 빛났다. 자신의 노래 'Black Superhero'와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매시업(Mashup)한 순간이 상징적이었다. 로버트 글래스퍼는 내리는 비조차도 공연의 일부로 만들었다. 잘 쪼개진 저스틴 타이슨의 드럼, 로버트 글래스퍼의 피아노가 빗소리와 만나면서 새로운 음악으로 탄생했다.  그는 'Standing In The Rain'이라는 애드립을 공연 중간에 넣기도 하고, 퇴장할 때는 팝의 전설 프린스(Prince)의 'Purple Rain'을 틀었다. 이보다 완벽한 선곡은 없다.

여러분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 다음 무대를 장식한 주인공은 빅뱅의 태양이었다. 뮤직 페스티벌에는 다소 이질적인 뱅봉(빅뱅 팬덤 '브이아이피'의 응원봉)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풀 밴드를 대동한 채 등장한 태양은 신보 <Down To Earth>의 수록곡은 물론 'Just A Feeling', '웨딩 드레스', 'Move' 등 올드 팬의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도 잔뜩 들려 주었다. 

그는 대중 가수답게, 관객이 자신에게 보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보여 주고자 했다. 명불허전의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링가링가'나 신곡 '슝'의 격렬한 춤을 추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보컬을 들려 주었다. 심지어 최근 온라인상에서 밈(Meme)으로 떠오른 '여러분, 너무 보고 싶었어요'의 앵콜도 들려 주었으니 빈틈이 없다. 태양의 무대에서도 비는 충실한 조연이었다. '나의 마음에', '눈, 코, 입' 등 진중한 발라드 넘버를 부를 때는 오히려 비가 서정성을 극대화해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브라질 음악을 상징하는 존재인 세르지오 멘데스(Sergio Mendes)는 '진정한 보사노바를 보여 주겠다'며 팔순의 나이를 잊게 했다. 국내에서 유독 많은 팬덤을 보유한 덴마크 가수 크리스토퍼에 대한 열광도 뜨거웠다. 시원한 노래 솜씨와 수려한 외모를 보고 나니, 그에 대한 열광이 납득되었다.

한편 첫째날인 26일에는 미카의 공연이 펼쳐졌다. 2020년 단독 내한 공연이 팬데믹으로 인해 취소된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스탠딩 구역 안으로 들어가 관객들과 함께 뛰었다. 마지막 날에는 아일랜드 출신의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가 헤드라이너로 나섰다. 2013년 서재페 공연 때와 마찬가지로 빗속에서 명곡 'The Blower's Daughter'를 부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노르웨이의 신성 시그리드(Sigrid), 미국의 인디팝 밴드 AJR의 첫 내한 역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크리스토퍼

2023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크리스토퍼 ⓒ 프라이빗커브

   
재즈 페스티벌에 재즈가 없다고?

뮤직 페스티벌은 더 이상 출연 뮤지션의 라인업을 달달 외우는 음악 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뮤지션의 면면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야외에 돗자리를 펴 놓고 먹거리와 음악을 캐쥬얼하게 즐기고픈 욕구, 그리고 인스타그램 등 소셜 네트워크에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만으로도 페스티벌에 갈 이유는 충분하다. 서재페가 한국 뮤직 페스티벌 중 가장 성공적인 도심형 뮤직 페스티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런 변화와 맞물렸다.

서재페는 "재즈 페스티벌에 '재즈'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고 있다. 정확히 말해 재즈는 서재페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국내외 팝 뮤지션과 록밴드, 재즈 뮤지션의 배합이 서재페의 흥행을 이끌어온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해외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페스티벌인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Montreux Jazz Festival) 역시 릴 나스 엑스(Lil Nas X)와 샘 스미스(Sam Smith)가 출연한다. 재즈 뮤지션만으로는 수만 명이 모이는 도심형 페스티벌을 꾸리기 쉽지 않다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페스티벌을 앞두고 일각에서는 높아진 가격에 대한 논란도 제기되었다. 올해 서재페의 3일권 티켓의 정가는 42만 원, 1일권 티켓의 정가는 18만 7천 원이다. 2015 서재페의 경우 3일권의 정가는 28만 7천 원이었다. 폭등한 물가와 유류비 등을 감안해도, 이 상승폭은 몹시 높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차치하고, 서재페의 흥행은 견고했다. 페스티벌 직전까지 예매처(인터파크) 티켓 판매율 최상위권을 지켰다. 공연 당일에도 우비를 입은 관객들이 올림픽 공원을 가득 채웠다. 직접 가서 확인한 서재페는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굳건한 뮤직 페스티벌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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