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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급격한 퇴행이 진행 중이다. 작년 이맘때쯤엔 '이명박 시즌 2'라는 말이 회자되더니, 이젠 '군부 독재정권 시절로의 회귀'라는 말까지 공공연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 언론에서 사실 확인도 없이 '유서 대필 의혹'까지 제기하는가 하면, 법무부 장관이 헌법에 적시된 집회의 자유마저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올해로 26년차 현직 교사인 내 눈에 비친 퇴행의 증거는 따로 있다. 아이들이 책과 멀어지고 도서관이 빠르게 무력화하고 있다는 것. 지금껏 도서관과 동아리 활동이 활성화한 곳이 좋은 학교라고 확신해왔건만, 당장 도서관부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뒷방 신세로 밀려나고 있다.
 
요즘 아이들 대부분은 책 읽는 즐거움을 모른다. 심지어 '독서'와 '재미'를 양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의 관계로 여긴다. 하물며 같은 책을 돌려 읽고 함께 소감을 나누는 자발적인 독서 모임은 아예 사라지고 없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학교마다 개설돼있는 독서 동아리는 실상 자습 시간으로 운영된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사라진 도서관. 결국 교과 수업이나 교직원 회의 등에 주로 활용되는 학교의 공용 공간으로 용도가 바뀌고 있다. 책이 차지하는 공간은 시나브로 줄고,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누워서 쉬거나 인터넷 검색을 위한 휴게 시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양새다.
 
독서실에서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사람들
 
실제로 아이들조차 "종이책은 끝났다"고 선선히 말한다.
 실제로 아이들조차 "종이책은 끝났다"고 선선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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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학교 도서관만의 문제도 아니다. 마을의 한 중심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해오던 공공 도서관도 존재감을 잃어가긴 매한가지다.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는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다양한 문화 체험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왔는데, 요즘엔 주민들이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독서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마저도 '독서실'이라는 이름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가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낯선 풍경이 됐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독서실'에서 책을 읽는 사람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피시에 열중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책이 꽂힌 개가식 열람실은 주말에도 한산하다. 반면에 노트북과 태블릿피시가 설치된 공간은 주중에도 늘 만원이다. 이쯤 되면 도서관인지 피시방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명색이 공공 도서관인데, 먼지가 세월의 더께처럼 수북이 쌓인 서가의 책들을 보노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책을 멀리하는 세태 속에 도서관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책이 꽂혀있던 자리에 대형 프로젝션 TV가 설치되고, 책상이 가지런하던 열람실은 노트북이 즐비한 정보검색실로 바뀌는 추세다. 이른바 '스마트 기기'가 책을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도서관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누구는 사람들이 도통 책을 읽지 않으니 도서관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도서관이 제 역할을 못 해서 사람들이 책으로부터 멀어졌다고도 한다. 흡사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논쟁 같기도 하다. 이 와중에 책 읽기 중심의 도서관 기능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종이책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뜻이다.

'사전'을 직접 본 적 없단 아이가 태반
 
실제로 아이들조차 "종이책은 끝났다"고 선선히 말한다. 작년 역사 수업에 교과서 속 사건을 다룬 소설 작품을 활용할 요량으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봤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해당 작품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와 조선 시대 병자호란을 다룬 소설 <남한산성>이었다.
 
두 작품 모두 수십만 부가 팔려나간,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우리 역사 등 배경지식을 잘 모르는 해외에서조차 호평과 수상이 이어졌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누구 말마따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둘 다 읽어봤다는 아이가 225명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둘 중 하나라도 읽어봤다는 경우가 한 반에 한두 명 있을 따름이다. 출간 후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다면, 웬만한 집마다 한 권쯤 꽂혀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개중엔 책 대신 영화를 봤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마저 올해에 만난 아이들은 책을 읽기는커녕 소설의 제목조차 낯설어했다. 한번은 내 인생을 바꾼 책이라며 소설 <태백산맥>을 소개했더니, 대뜸 10권짜리 책을 어떻게 다 읽을 수 있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웹툰 북도 여러 권이면 읽기 꺼려진다고 입을 모았다.
 
하긴 스마트폰을 통해 읽는 가십거리조차도 일단 글이 길면 패스하는 게 불문율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내용이라면 모를까, 굳이 스크롤 해가며 끝까지 읽진 않는다는 거다. 중간에 관련 사진이나, 하다못해 눈길 끄는 광고조차 없는 '맨 글'은 '인내력 테스트용'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모르는 한자나 영어 단어를 찾을 때 유용한 두툼한 사전은 숫제 그런 게 있었느냐는 투다. 사전을 공부하는 데 활용하기는커녕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없다는 아이가 태반이다. 얼마 전 국어사전을 사러 동네 서점에 갔다가 주인으로부터 '웃픈'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사전을 찾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다. 그가 '최신판'이라고 건넨 사전도 2017년에 인쇄된 것이었다.
 
책 냄새 가득한 도서관이 절실하다

"종이책이 끝났다"는 말은 '스마트 기기'가 종이책을 대신한다는 뜻일 테지만, 실제론 '글을 읽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정확하다. 뉴스나 정보도 영상을 통해 얻고, 소설도 요약본을 읽는다. 국내외 문학 작품들의 핵심 내용을 발췌해놓은 책이 시중에 대입 수험서로 판매되고 있는 현실이다.
 
긴 글을 자주 접해야 문맥을 이해하고 요지를 파악하는 훈련이 될 텐데, 어려서부터 이미지와 영상에 길들어진 탓인지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어려운 한자어라도 몇 개 나올라치면 이내 글 읽기를 포기해버린다. 믿기 힘들겠지만, 한자로 된 제 이름을 쓸 줄 아는 아이가 거의 없다. 이는 제 이름에 담긴 의미가 뭔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영화 <기생충>에 대한 한 평론가의 한 줄 평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고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현학적이라는 질타가 이어졌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명징'이나 '직조', '신랄'과 '처연' 등의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사어'라는 거다.
 
불과 한두 해가 지난 지금, '사어'가 하나 더 늘었다. '우화'라는 단어조차 그 뜻을 몰랐다. 고작 여섯 개의 단어로 구성된 문구에서 모두 아는 단어가 '계급'뿐이었다. 아뿔싸. 의인화 등의 방법으로 풍자와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더니, 의인화가 뭔지, 또 풍자가 무슨 뜻인지 질문이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졌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이러다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자랑하는 우리 글의 힘이 위축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려운 단어를 하나둘 외면하다 보면, 종국엔 은어와 비속어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글을 통한 신구 세대 간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현실이 이렇듯 삭막한데도, 정부와 지자체들은 청개구리 마냥 거꾸로 가는 정책만 내놓고 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은 올해 관내 고등학교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스터디 룸'을 구축했다. 남는 교실을 대입 준비를 위한 '독서실'로 꾸미도록 한 것이다. 방해받지 않도록 두꺼운 칸막이를 쳤고, 자유롭게 인터넷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첨단 기자재를 갖췄다.
 
이외에도 서울의 한 지자체가 관내 구립 도서관을 축소할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도서관이 애꿎게 혈세를 낭비하는 곳으로 낙인찍힌 모양새다. 그곳들 역시 조만간 서가에 꽂혀있던 책이 치워지고, 인터넷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스터디 룸' 간판이 내걸릴지도 모른다. 
 
거듭 강조하건대, 열쇠는 책 읽기에 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책을 읽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책이 놓여있어야 한다. 지금 아이들에겐 '독서실'이 아니라 책 냄새 가득한 도서관이 절실하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건, 기실 책의 효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스마트 기기'의 자극적인 눈맛을 제어하는 건, 결국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책 냄새다.

태그:#공공 도서관 폐관, #스터디 룸, #이정선 광주광역시교육감, #박강수 마포구청장, #종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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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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