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4 19:45최종 업데이트 23.06.0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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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에 대항하는 논리 중 하나가 '다 지난 일'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과거지사가 아님을 잘 증명한 이들은 다름 아닌 친일파들이다. 일제 패망 뒤에 친일 청산을 훼방하고 대일 굴욕외교를 부추긴 세력들의 배후에 친일파가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 당시 과거사를 미화하는 국정교과서를 추진한 집단들 중에 예비역 장성 모임인 대한민국 성우회가 있었다. 국정화 추진에 활용된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프레임이 성우회 부설 기관인 성우안보전략연구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2015년 11월 보도됐다. 이 단체가 일본 극우단체인 사사가와 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일 군사 교류 협력을 진행했다는 2018년 보도도 있었다.


성우회 자체는 친일 단체가 당연히 아니지만, 기존의 성우구락부가 성우회로 재창립될 당시에는 친일파들이 이 단체를 주도했다. 성우회로 거듭난 1989년 이후에 제1대·제2대 회장을 지낸 인물은 친일파인 백선엽과 유재흥이다.

성우회 재창립을 주도한 그들의 의도도 불순했다.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친목회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1987년 6월항쟁에 맞선 정치적 대응을 모색했다. 1987년에 승기를 잡은 민주화 세력을 좌익 폭력 세력으로 몰아 기를 꺾으려는 동기에서 이들은 출발했다.

1989년 12월 2일 자 <경향신문> 4면 우상단 기사에는 그해 11월 29일 성우회 창립 발기인대회에서 백선엽 발기인대표가 "우리가 피와 땀을 흘려 지켜 온 조국이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매일 화염병·최루탄이 난무하고 그 틈을 타서 좌익 폭력 세력이 온 사회계층에 확산되는 상황을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라며 성우회 발족 배경을 설명한 일이 보도됐다.

해방이 되고 나서 44년이나 흐른 뒤에 친일파가 민주화에 대항하고자 성우회를 재창립했다. 친일이 과거의 문제인지 현재의 문제인지를 음미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성우회가 성우구락부로 출범한 1965년 2월 26일에 제1대 대표지도위원으로 선출된 인물은 독립운동가 출신인 김홍일 장군이었다. 대표 밑의 지도위원 6명 중에 친일파 이응준·정일권·김정렬이 있었지만, 이때의 성우구락부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맞서는 단체로 비쳤다. 1965년 3월 1일 자 <동아일보> 4면 좌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 단체 대표인 김홍일 장군이 한일협정을 정면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성우구락부가 얼마 안 가 변질됐다. 1968년 2월 25일 자 <조선일보> 2면 상단은 "성격도 꽤 변질됐다"라고 한 뒤 "완전히 친목단체가 되었다"라고 평했다. 이 단체는 1972년에는 박정희의 유신 독재까지 지지했다. 잠깐이나마 김홍일 장군이 리더일 때와는 판이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성우구락부를 그렇게 변질시킨 핵심 인물이 김홍일 장군과 함께 초대 지도부를 구성한 이응준이다. 박정희의 숙원 사업인 한일협정을 반대한 김홍일은 1965년 상반기에 물러나고 7월 1일부터 이응준이 대표 직을 수행했다.

이응준은 1969년 3월 9일 친일파 정일권이 제3대 대표가 되면서 물러났다. "완전히 친목단체가 되었다"는 비웃음을 산 1968년 2월 당시에는 이응준이 대표였던 것이다. 이응준이 취임하면서 이 단체는 창립 당시의 궤도에서 이탈해 역사 발전과 사회 진보를 저해하는 단체로 변모했다. 친일이 해방 이전의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님을 이 시기의 이응준도 잘 보여줬던 것이다.

일제 강점 첫 날에도 '친일파'
 

국립현충원에 있는 친일파 이응준 묘. ⓒ 김종훈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4년 전인 1890년 8월 12일 평안도 안주목에서 출생한 이응준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밥을 먹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해서 일본군과 관련된 곳에서 밥을 먹었다. 액수가 많든 적든 36년 내내 친일재산을 축적한 인물이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듬해인 1906년 한성부로 이주해 보성보통중학과 육군무관학교를 다닌 그는 1909년에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했다. 일본 육군 소속인 이 학교에 재학하다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을 경험했다. 일제 강점 제1일에도 일본 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인 1912년 일본 육사에 입학하고 2년 뒤 소위로 임관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3권 이응준 편에 따르면, 51세 때인 1941년 육군 대좌(대령)로 승진한 그는 해방 2개월 전인 1945년 6월부터 원산항에서 수송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했으니, '일본제국주의 학교 36년간 개근'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셈이다.

그는 중국 전선으로 출정해 실전에도 참여했지만, 대민 작전 혹은 선전이나 신병 교육에서 좀더 두각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응준 편은 그의 28세 때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1918년 8월 열강들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일으킨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일본이 가담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된 일본 파견부 사령부에 배속되었다"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통해 러시아인, 중국인 또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파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라고 설명한다.

53세 때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1943년 초에는 중국 칭다오 교육대 대장으로 5개월 동안 현지에서 신병 보충과 교육 업무에 종사하였다"라며 "이 교육대에는 조선인 지원병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전쟁 막판에 지금의 서울 용산과 강원도 원산 등지에서 수송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일제강점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일본군 혹은 관련 기관에 몸담은 그를 일본은 칭찬했다. 1935년과 1939년에 일본은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지금 국립묘지 서울 현충원에 누워 있는 그는 일왕의 훈장을 받은 몸이었다(관련기사: "천황에게 충성을" 외치던 이가 '대한민국 군인의 아버지'? https://omn.kr/1rjf8).

그런 그도 서른쯤에 잠시 방황한 적이 있다. 29세 때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자, 그의 '애국심'은 잠시 흔들렸다. <친일인명사전>은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육사 26기 동기생인 김광서·지석규(지청천) 등과 함께 일본 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할 것을 모의했다"라며 "김광서와 지청천은 탈출했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일본은 안 되겠다 싶었던 마음을 이내 접었던 것이다.

그런 갈등은 이듬해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평양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려는 최성수에게 권총을 제공한 사건에 연루되어 평양 헌병대에서 조사받았으나, 단순한 도난 사건으로 처리되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라고 위 사전은 서술한다. '퇴학'당할 뻔한 일이 1919년과 1920년에 연달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 충실하면서도 '학교'가 안 될 듯 싶으면 금방이라도 달아날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이 1945년에도 나타났다. 위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는 그의 1945년 행적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패전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탈출하여 서울로 귀환"했다고 설명한다. 개근을 한 뒤에 하나마나한 '자퇴'를 했던 것이다.

해방 뒤 미군정청 국방사령관 고문을 거쳐 58세 때인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1949년에 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사건 때문에 총장 직을 사임한 뒤 사단장·육군대학총장 등을 거쳐 육군참모차장을 지냈다. 그런 다음, 1955년에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체신부 장관을 지낸 그는 5·16 쿠데타 이후인 1963년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 뒤 친여당 인물로 돌아서서 반공연맹 이사장과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그는 1963년에 야당 정치인이 되면서 친일파 박정희와 다른 길을 걷는 듯 했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박정희와 같은 길을 걸었다. 굴욕외교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지금보다 훨씬 강렬했던 1965년에 독립군 출신 김홍일의 색깔을 지우고 성우구락부를 친목 모임으로 변질시켰다. 굴욕외교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적 역량 하나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이응준은 친일이 해방 이전의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항상 '현재의 문제'라는 점을 잘 보여줬다. 해방 직후에 '자퇴'를 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쪽이었다. 1965년 이후에 일본이 부분적으로나마 한국에 재진입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그런 삶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망 2년 전인 1983년에는 인촌문화상이 수여됐다. 친일파 김성수를 기리는 상이 93세 이응준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사망 뒤에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안기고 그를 국립묘지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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