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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처음이라는 시작의 떨림과 설렘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공개한 신인 작가 '수이'가 있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의 끝자락 4월 10일, 인사동 <리수갤러리>에서 마주한 그의 그림은 한 권의 동화를 펼쳐놓은 듯했다. 그림에 담긴 고즈넉한 풍경은 앞으로 달려가는 데 지친 이들에게 작은 쉼을 선물했다.

수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고 싶다며 기자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했다. 회색빛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수이 작가의 공간은 그의 그림처럼 베이지색으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나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찾았던 프랑스
 
수이작가는 기자들을 초대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수이작가 수이작가는 기자들을 초대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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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작가는 10년 전 미대에 입학했다. 그때 처음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왜'라는 질문은 언제나 인생을 당황하게 만든다. 쉽게 길어올릴 수 없는 대답이다. 이곳, 저곳을 뒤지며 답을 찾았지만 결국은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잊게 됐다. 의미없는 시간에 소진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회색 먼지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이 문제일까?"

프랑스로 떠날 결심은 그때 했다. 3년간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20대 중반이 돼서 다시 학생이 됐다.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프랑스에서 그를 먼저 맞이한 건 쨍쨍한 햇볕이었다. 사는 곳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댔다. 거리가 그림인지, 그림이 거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영상에서 보던 에펠탑과 몽마르트 언덕, 몇백 년 전에 지은 건물들. 스스로 그림 속 모델처럼 느껴졌다. 이 행복한 그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난 영화로 바뀌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프랑스 말을 하는 것도 어설픈데, 락다운이 반복됐다. 당도 보기 힘들었고 며칠 동안 같은 음식을 먹기도 하며 집에 갇혔다. 다시 거리를 걷게 됐을 때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그녀를 다시 집에 가둬버렸다. 길을 걸을 때마다 누군가 나를 때릴 수도 있다는 생각,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파리 전체가 감옥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소외는 오히려 내게 편안함을 준다 
 
프랑스 '에꼴 데 보자르'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삽입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 작품 <그들의 밤> 프랑스 '에꼴 데 보자르'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삽입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 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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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갔지만, 학생은 아닌 것 같은 느낌. 이방인이 돼버린 수이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애매해 보였다. 계절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 같기도 하고 봄 같기도 하고 여름이며 가을같은 시간들. 작가의 상태를 알아본 건, 친구들이었다. "넌 어떤 사람이야?", "너는 너무 애매해." 그녀는 스스로 캐릭터가 되는 게 싫었다.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저를 밝히라고 말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을 하고 싶어했어요. 아마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사람을 사귀기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이해는 하지만 저한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에요. 사실 사계절은 뚜렷할 수 없어요. 더워졌다가 추워졌다가, 다시 더워지는 과정일 뿐이잖아요. 저는 그냥 그런 흐름에 있고 싶었어요. 세상은 애매한데 왜 사람은 확실해야 할까요? 인권 선진국이라고 불리던 프랑스에서 저는 아시아 인종이라는 이유로 맞을 뻔 했어요. 파리도, 친구들도, 저도 다 애매한 상황에 있었죠. 그런데 저보고 어떤 사람인지 밝히라니..." 


수이 작가는 정체성을 밝히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항상 고통스러웠다.

"예술 교육이 다 그런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잖아요. 다른 나라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정체성이 중요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수업 중에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해 써야 하는 에세이 과제도 많았어요. 글을 쓰며 꽤 힘들었어요."  
 
여름과 가을 사이의 풍경을 담아 낸 오베르슬로의 숲은 유학 시절 자주 갔던 숲의 모습을 담고 있다.
▲ 작품 <오베르슬로의 숲> 여름과 가을 사이의 풍경을 담아 낸 오베르슬로의 숲은 유학 시절 자주 갔던 숲의 모습을 담고 있다.
ⓒ 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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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 입시도 비슷하다.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주제로 몇 편의 에세이를 써야 한다. 성장 과정과 책 리뷰, 사회 활동 모두 내가 누구인지 밝히는 일이다. 한국 교육제도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질문이다. 어쩌면 한국 사람들이 MBTI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에세이는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다음 수업에서 에세이를 읽은 담당 교수가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세라비!(C'est la vie!)" 

그게 인생이다. 잠시 나마 프랑스에서 느꼈던 공포와 차별의 시간을 잊게 됐다. 그리고 그녀는 답을 찾았다.

애매한 것, 그것이 인생이다!
 
캐릭터 '클로에'의 초창기 모습
▲ 작품 <클로에의 달밤> 캐릭터 '클로에'의 초창기 모습
ⓒ 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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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지 않기로 했어요. 누군가에겐 아시아인, 누군가에겐 혼란을 겪는 학생, 누군가에겐 아리송한 사람이겠지만, 그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정의할 수 없는 게 인생이죠. 그러니 '그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거겠죠. 저는 대명사지, 명사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클로에'를 만들어냈어요. 그림 속의 대명사죠. 자꾸 자기를 드러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대명사로 답하고 싶었어요. 클로에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누가 저에게 어떤 사람인지 물으면 이제는 자신있게 대답해요. '난 애매한 사람이야.'"


클로에는 표정이 잘 읽히지 않는다. 몇 살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기 어렵다. 스스로 규정하기를 바라지 않는 작가의 마음을 클로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클로에는 눈을 감고 있다. 

"사람들이 클로에를 보며 기쁨도 느끼고 슬픔도 느꼈으면 좋겠어요. 모든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을 클로에에 담고 싶었어요.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나머지는 관람객의 몫이지만, 저처럼 애매한 분들에게 느낌이 전달되면 좋겠어요."

작가는 20대 내내 답을 찾았다. "왜?" "누구?"라는 질문에 좌절했다. 프랑스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풍경은 행복과 함께 공포와 불신을 몰고 왔다. 그리고 스스로를 소진시키며 회색의 재가 됐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잿더미 속에서 발견한 희미한 불빛. 

클로에는 불씨처럼 눈을 감고 우리를 보고 있다. 작가는 답을 강요하는 사회의 지친 사람들에게 클로에를 보내줬다. 다시 활활 타오를 수도 있고, 영원히 재가 될 수 있는 불씨, 애매함은 가능성의 다른 말이다. 

"클로에와 니노를 주인공으로 한편의 동화를 만들고 싶어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싶은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요."

* 클로에와 니노를 보고싶은 분들께 : 수이 작가는 지난 4월 1일부터 6일까지 인사동 리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했다. 지금은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제주에서 열리는 '제주 바람전'과 6월 29일부터 7월 2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2023 아시아 일러스트 페어전' 참가 준비를 하고 있다. 7월 24일부터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하랑 갤러리에서 8월 6일까지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지냈던 집과 비슷하게 그려냈다.
▲ 작품 <클로에와 니노의 오후> 프랑스 유학 시절 지냈던 집과 비슷하게 그려냈다.
ⓒ 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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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수이, #일러스트, #미술, #신인화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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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교육원 취재기자 24기 김지원입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는 이소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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