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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기록된 중사지 발굴 

매납유구(埋納遺構)는 장도청해진유적의 서쪽 사면에서 발굴되었는데 유구에서 수습된 유물의 대부분은 제사용기로 유물을 인위적으로 뭍어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였다. 

매납유구는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전해오는 청해진 조음도(助音島)에서 중사(中祀)를 거행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구로 발굴당시 직경 1m, 깊이70cm 정도 되는 원형구덩이 속에 회색대호(大壺)를 가운데 두고 주변에 4명편병(四面扁甁)2점, 솥(鼎) 2점, 철제소반(鐵製小盤)2점, 청동병 1점을 넣고 매장하였으며 유구를 중심으로 주변은 기단부 석축 건물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철제 소반은 복원결과 1점으로 밝혀졌다.

굴립주 건물지 발굴 

굴립주건물(屈笠主建物址)은 섬의 중앙에 위치한 사당을 중심으로 남측과 북측에 각각 하나씩 위치하는데 남측 건물지(建物地)는 정면 3간 측면 1칸 규모이며(가로12.6m×세로4.8m) 북측은 정면 2칸, 측면 1칸(7.8m×4.5m)으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목심(木心)의 규모로 보아 높이 10m이상의 높은 건물로 추정되며 주변 해역을 조망하는 시설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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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와무지 발굴

장도유적 전체에서 많은 와편(瓦片)이 발굴 되었지만 특히 사당북쪽 굴립주 건물지 주변의 2곳에서 발굴된 폐와무지(廢瓦무지)는 당시 청해진이 얼마나 번영했는지 알 수 있는 유적으로 3만여점이 넘는 와편이 발굴되었다. 

고대에는 기와의 생산이나 사용이 개인이 아닌 국가적인 조영 사업의 하나로 궁전이나 사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사용자체가 권위와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기에 이는 청해진이 화려한 건물을 지었다는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특히 삼국사기「옥사조」(屋舍俎)에 골품제에 따른 기와 사용에 대한 언급되고 있는데 청해진에 발굴된 많은 기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청해진발굴에서 비록 하려한 치미(雉尾)나 마루기와등은 발굴되지 않았지만 궁궐이나 사원건축에서 사용되었던 당초문(唐椒紋)이나 연화문(煙花紋)의 암․수막새가 발굴되었고 대(大), 왕(王), 본(本), 사초(史草), 관(官), 동(東), 천(天), 사(寺)등 여러 점의 명문와(名文瓦)와 다양한 문양의 통일신라시대 기와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의 기와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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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井)발굴

장도청해진유적에는 그동안 식수가 없어 많은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논쟁이 학자들간 심했는데 발굴 마지막 해에 섬의 입구「ㄷ」자형 판축유구에서 우물이 완벽하게 발굴되었다. 이 우물은 청해진성의 서남쪽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치우는 과정에서 지하 150m정도에서 발견되었다. 

우물의 모형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이나 기반부는 방형이고 위로 올라가면서 원형을 이룬다. 규모는 지름 150~180cm정도이고 깊이는 대략6m(580m)정도이다.

발굴 당시 기반부에는「」자 모양으로 상변을 치목한 지름 20~24cm의 소나무(130×120×130×121cm)를 반드시 깔고 그 위로 판석과 활석(70×20, 53×18, 37×14cm)을 이용하여 아주 정교하게 쌓아 올렸다.

기반부 아래로는 맑고 깨끗한 물이 나올 수 있도록 5~10cm 두께로 길고 둥근 자갈이 깔려 있었으며 여기에서 주름무니병, 토기류, 철제대각, 청동대접, 어망추, 방추차, 숫돌과 함께 목제품과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또한 우물의 중간층에서도 소, 돼지, 사슴의 뼈와 함께 다수의 청자, 중국계 해무리굽, 청자편이 출토되었으며, 우물은 인위적으로 매립하여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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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가 꿈꿨던 새로운 세계, 신라에 점령된 백제 땅은 점령지라는 특성상 신라골품제도에 편입되어 이곳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동물에 버금가는 취급을 받았던 곳. 어떻게 보면 당나라에 팔려간 신라노예나 신라에 있으면서 골품제 하에서 노예 취급 받는 것이나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한을 풀듯 아시안들이 자유롭게 꿈꾸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청해진, 유적 발굴에 관한 고찰을 마친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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