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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베이샌즈에서 바라본 싱가포르 야경
 마리나베이샌즈에서 바라본 싱가포르 야경
ⓒ 황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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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주위 사람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는 버릇이 생겼다.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려 했다. 중국어처럼 들리는 영어라고 할까. 자세히 들으면 영어인데 언뜻 들으면 중국어 같았다. 거기에다가 영어, 중국어가 아닌 낯선 언어들도 들렸다. 타밀어(인도의 언어)와 말레이어였다.

싱가포르는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및 서양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의 75%는 중국계이다. 싱가포르에서는 4개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영어, 표준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중 영어는 교육, 행정, 비즈니스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영국식 영어를 표준으로 삼았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싱가포르 거주 초기

싱가포르 사람들은 학교, 직장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표준 영어로 말하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개 싱글리시(Singlish)로 말한다. 싱글리시는 중국어, 말레이어의 영향을 받은 싱가포르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어를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입말(구어)로만 사용된다. 싱글리시로 말할 때 인종별로 구사하는 발음과 억양이 좀 다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모국어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식 영어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그들의 다양한 싱글리시는 낯설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싱가포르에 살기 시작한 초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가 잦았다. "Sorry, can you repeat that again? Excuse me?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라는 표현을 쓰며 되물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분명 나는 발음, 억양, 문법에 맞게 영어로 말한 것 같은데 상대방에게 내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미국에 살았을 때 영어로 소통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웠다.

특히 동네 호커 센터(노점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했을 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주인들이 많았다. 호커 센터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소통했다. 때로는 내 뒤에 줄 서 있던 사람이 나 대신 주문해 주기도 했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님께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상대방이 단번에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아이들 유치원 선생님들과 이야기할 때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중국어 억양이 좀 남아 있었지만 표준 영어를 사용했다. 나와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동네에서 사귄 싱가포르 친구들과 영어로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은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나도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참 이상했다.

현지 친구들과 조금 친해졌을 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영어 때문에 내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친구들은 하하 웃으면서 나에게 싱글리시를 배워야 된다고 말했다. 내가 분명 싱글리시를 심하게 쓰는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했다.

우선 문장 끝에 lah , ah, yah와 같은 접미사를 덧붙여 말한다. 예를 들면 Okay lah(오케이라), Thank you ah(땡큐아), Sorry yah(쏘리야) 등과 같다. 많이 쓰는 감탄사가 있다. 한국말로 '아이쿠, 이런'의 의미를 가진 Aiyo(아이요), Aiya(아이야) 등이다. 한 문장을 한 단어로 간결하게 말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Can!(가능해), Cannot!(불가능해), No need(필요 없어)와 같다. 발음을 할 때도 자음 l, d, k는 생략해서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 그 밖에도 알아 둘 게 많았다. 나는 공책에 적어가며 외웠다.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은 나와 이야기할 때 표준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 되었고 슈퍼마켓 점원들 , 택시 기사님들, 노점 식당 주인들은 강한 싱글리시로 말했기 때문에 나와 소통이 잘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중국어를 배우고 난 뒤 싱글리시가 잘 들린다

싱글리시가 귀에 익숙해졌을 무렵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중국계 싱가포르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할 때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말하는 것이었다. 분명 시작은 영어로 했는데 갑자기 중국어로 바꾸어 말했다. 두 언어를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 섞어서도 말했다.

나와 같이 있을 때는 영어로만 말했지만 그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중국어로 말할 때가 더 많았다. 친한 친구에게 또 물었다. 언제 영어로 말하고 언제 중국어로 말하는지. 두 언어를 왜 섞어서 말하는지.

친구의 대답은 이러했다. "영어는 공식적인 경우에 사용해. 비공식적인 경우에는 중국어를 많이 사용해. 예를 들면 친구들하고 이야기할 때,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음식을 주문할 때 중국어로 말해. 영어를 잘 못하는 중국계 어르신들과 말할 때도 당연히 중국어로 말해야겠지? 중국어로 말하면 상대방과 좀 더 친밀하게 느껴져. 중국어는 우리들의 모국어니까. 그리고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말하는 건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말습관이야." 그제야 나는 그들의 언어가 이해되었다. 

나는 그들의 세계로 조금 더 친밀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어를 조금 배우고 나니 싱가포르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결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중국어의 어떤 요소가 싱글리시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수 있었다.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있어서 싱글리시는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내가 평상시에는 서울 표준말을 쓰다가 가족들이나 고향 친구들과 말할 때 강한 사투리를 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싱가포르에서 18년째 살면서 나는 다양한 싱글리시에 익숙해졌다. 가끔 인도계 싱가포르 사람들이 쓰는 또르르 또르르 굴러가는 싱글리시를 들으면 아직도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잘 이해할 수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싱글리시가 이제 편안하게 들린다.

올여름 휴가를 맞아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여행 올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현지인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될 경우에는 핵심만 최대한 간결하게 말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꼭 완전한 문장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싱가포르 영어, #싱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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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정원 속의 도시' 싱가포르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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