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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라고 하면 흔히 미국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가, 특유의 명암과 색감, 기존의 공식을 따르지 않은 과감한 구도와 현대인의 외로움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월 20일까지 열리는 전시 '에드워드 호퍼:길 위에서'는 공식처럼 알려진 특징들 위주로만 살펴보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을 기념하여 휘트니미술관과 공동으로 '이것이 미국미술이다'(2011.6.11-9.25) 전시를 연 바 있다. 미국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내는 대표 작품들 위주의 공동전시였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획전시 도록 표지
▲ Railroad Sunset / 1929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획전시 도록 표지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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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호퍼의 작품은 '철길의 석양'(1929) 하나였다. 전시의 성격을 드러내는 도록의 표지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의 도록을 살펴보면 '유럽 유학을 떠났지만 유럽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미국 작가'이며 '미국적이면서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듯한 우수가 배어 있다'고 에드워드 호퍼를 소개했다.

2011년 한국 전시 도록에 실려있던 호퍼에 관한 설명을 충실하게 구현한 것은 2022년 10월부터 2023년 3월 5일까지 열렸던 뉴욕 휘트니미술관의 전시였다.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뉴욕과 관련 있는 작품들, 그가 뉴욕에서 그린 작품들을 전시했다.

2011년 한국전시 도록의 표지였던 '철길의 석양'과는 다른 작품인 '맨해튼 다리'를 도록의 표지로 걸었지만 호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비슷한 시기의 뉴욕 그림이라는 점에서 전시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
 
2022년 휘트니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도록 표지
▲ Manhattan Bridge Loop / 1928  2022년 휘트니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도록 표지
ⓒ 휘트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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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직접 목격한 휘트니미술관의 모든 벽은 흰색이었다. 밝은 조명과 적절한 채광은 작품 속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7개의 섹션은 호퍼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보여주기 좋은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1)The City in Print, (2)The Window (3)The Horizontal City (4)Washington Square (5)Theater를 통해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고 호퍼 특유의 뉴욕 감성을 (6) Reality and Fantasy에서 드라마틱하게 끌어냈다. (7)Sketching New York에서는 작품들의 탄생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휘트니미술관의 전시장은 모두 흰색이었고 촬영이 가능했다. 작품들은 호퍼의 대표적인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전시 풍경 / 2023 휘트니미술관의 전시장은 모두 흰색이었고 촬영이 가능했다. 작품들은 호퍼의 대표적인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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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전시를 찾은 노년의 뉴요커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나 여행객의 눈에는 호퍼의 작품이 그저 그림이었겠지만, 노년층의 다수가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를 하며 감상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젊음을 추억하며 그 시절의 뉴욕과 뉴욕커의 삶을 투영한 관람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외로움과 상실한 시대에 관한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좋은 전시였다.

이번 서울 전시는 뉴욕 전시와 완전히 다르다. 서울 전시장은 조도가 낮고 섹션에 따라 전시장 벽의 색이 다르다. 채도와 조도가 모두 낮기 때문에 명암에만 집중하면 전시를 충분히 감상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섹션은 작품이 아니라 호퍼의 인생을 기준으로 나뉘어 있다.

(1)에드워드 호퍼 섹션에서는 자화상과 습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명한 중년 이후의 자화상이 아닌 젊은 시절의 호퍼부터 시작한다. 관람 방향이 있지만 전시장 가운데 서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 1903년과 1925년의 호퍼가 마주보고 있다.

작가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간 과정에 집중하는 전시라는 것을 첫 섹션에서 느낄 수 있다. 대표작 중심의 전시는 맥락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삶의 연속성을 가진 인간이 중심에 있는 전시는 작가의 생애가 곧 전시의 맥락이다.

노화와 함께 성숙해지는 작품을 접했을 때 감동과 감상의 층위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관람객은 '잘 몰라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서' 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고 감상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수평'을 감상 포인트로 꼽는 경우가 많지만 서울 전시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청년 호퍼는 상승 구도의 작품을 즐겨 그렸기 때문이다. 전성기 때는 건물의 층에 관계없이 수평 구도를 많이 사용했지만 극장을 좋아했던 호퍼는 발코니 석에 앉아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형태의 하강 구도 작품도 많이 남겼다.

노년에도 하강 구도의 작품을 그렸다. 습작에서는 경사가 심한 하강 구도였던 그림이 완성작에서는 수평에 가까운 형태의 하강 구도로 변화한 것을 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가장 화려한 시기의 대표작에 집중하지 않고 초창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호퍼 특유의 스냅샷 같은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단 한 번도 끊긴 적 없었던 호퍼의 미술인생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유명해지기 전의 삶은 (2)파리 섹션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가장 미국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연구한 것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가 파리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어디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실내에서 야외로, 실내와 야외를 함께, 커다란 창, 인상주의 화풍에서 얻은 빛의 효과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지는 캔버스의 크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휘트니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전시의 영상 자료
▲ 과거 뉴욕의 모습 /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휘트니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전시의 영상 자료
ⓒ 휘트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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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뉴욕의 스케치와 작품들을 통해 호퍼가 뉴욕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평생을 뉴욕에서 살며 도시와 도시인들의 일상을 작품에 담았다. 섬세한 관찰은 사회의 변화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남성들 없이는 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여성들의 외출을 캔버스에 담았다. (5)뉴잉글랜드 (6)케이프코드는 매뉴얼처럼 알려진 감상 포인트를 부수는 섹션들이다.

모래는 거칠게, 햇살은 밝게, 바다는 깊게 보여준다. 실험적 구도를 과감하게 쓴 작품이 보여주는 불안정감은 호퍼의 그림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영역이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흰 벽의 색감을 치밀하게 표현했다.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숲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들, 뉴요커와는 다른 정적인 자세의 사람들을 통해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감정을 유도한다. 
 
휘트니 미술관 소장작품 검색
▲ Sea at Ogunquit / 1914  휘트니 미술관 소장작품 검색
ⓒ 에드워드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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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전시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던 조세핀 호퍼가 서울 전시에서는 비중있게 다뤄진다. 다른 섹션에서도 조세핀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작품을 얼마에 팔았고 중개업체는 얼마를 가져갔으며 최종 이윤은 얼마를 남겼는지, 그림에 등장하는 집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등을 상세히 적은 그녀의 노트가 키포인트로 작용한다.

(7)조세핀 호퍼 (8)호퍼의 삶과 업에서는 평생을 함께 했던 조세핀을 그린 작품과 기록을 통해 호퍼 부부의 삶과 사랑을 살펴볼 수 있다. 호퍼는 유명 화가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대형 미술관이 추상미술 작품만 구매하는 것에 항의하며 일인 시위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호퍼의 다양한 모습들 중 오로지 유명세를 떨쳤던 시기의 그의 작품에만 집중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실은 대부분 사진촬영 불가이므로 작품을 보고 그림
▲ 에드워드 호퍼의 자화상(1903-06) 모작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실은 대부분 사진촬영 불가이므로 작품을 보고 그림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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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감상 포인트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전시는 오롯이 보는 이의 몫이다. 나의 삶, 내가 살아온 장소, 여행한 곳들을 떠올리며 서울 전시만의 특별한 큐레이션에 집중하는 것도 전시를 관람하는 좋은 자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유명 작품의 특징을 소상히 알고 봐야만 그림을 잘 감상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콩테 작품을 보고 아내가 콩테 가루를 치우며 잔소리하는 장면 따위를 상상하는 사람, 콩테의 질감과 표현을 고민하면서 한편으로는 팔리지 않고 쌓이는 그림을 보며 걱정하는 호퍼의 얼굴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감상을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순 없다. 호퍼가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뻔한 재료를 사용했지만 자신만의 관점에서 풍경을 해석하고 그렸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다름'에 주목하며 구태의연한 감상 포인트는 잠시 잊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전시장의 풍경에 집중하는 것은 어떨까? 
휘트니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전시에서 촬영
▲ 자화상 / 1925-30  휘트니 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전시에서 촬영
ⓒ 휘트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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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
당신이 '길 위에서' 보고 느낄 모든 것은 다 옳다.'


서울 전시에는 엔딩 크레디트가 있다. 이름으로 성별을 추정할 수 있는 엔딩 크레디트는 얼핏 봐도 여성이 30%를 넘어선다. 에드워드 호퍼의 삶에 조세핀이 존재했던 것처럼 좋은 전시의 바탕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훌륭한 엔딩이다.

뉴욕 전시와 겹치는 작품 목록, 시간차가 거의 없는 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큐레이션으로 색다른 감상을 끌어낸 큐레이션 팀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태그:#에드워드호퍼, #길위에서,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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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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