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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시에 '메트스쿨(The MET school)'이라는 공립고등학교가 있다. 그곳엔 선생님이 없다. 학교에 선생님이 없다니 그게 뭔 소린가? 이 학교에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의 배움을 코칭해 주고 지역사회 멘토들과 연결을 돕는 '조력자(adviser)'가 있을 뿐이다. 교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식 전달자'가 아닌 '배움의 코치'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1주일에 두 번 정도는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다. 그 대신 학생의 관심 분야에 전문가인 멘토의 일터로 출근한다. 이 학교의 대표적인 교육과정인 인턴십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연초가 되면 '학생-학부모-교사'가 함께 학생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학습계획을 수립한다. 학교가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이 이 계획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한다. 학기말이 되면 결과 발표회에서 함께 모여 그간 학생의 노고와 성과를 격려하고 피드백한다. 정해진 교육과정이라는 건 없다.

다만 '각각의 학생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도록 적극하고 돕는다'는 원칙만 있다. 대학진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지만 이 학교의 대학진학률은 70%를 상회한다. 1996년에 개교한 이 학교는 그동안의 교육적 성과를 인정받아 미국 전역에 공립형 협약학교(Charter School)로서 현재 70여 개로 확대되어 운영되고 있다.

현장 교사들이 5년간 공부하며 설계한 학교

충북에서 이런 교육을 하고 싶어서 지난 5년간 자발적으로 모인 교사들이 단재고등학교(아래 단재고)의 교육철학과 교육과정을 만들며 개교를 준비해왔다. 처음엔 대안교육이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우리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교육의 본령을 고민하며 학습과 연구를 지속했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좋은 교사의 소양은 무엇인가?',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교육과정과 교육공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나?', '지역사회와는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
 
단재고 교사준비팀 교사들이 주말을 활용해 월례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단재고 교사준비팀 교사들이 주말을 활용해 월례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 충북대안교육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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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방과 후, 주말, 방학 동안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이런 작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충북의 미래교육을 꿈꾸며 꿋꿋하게 단재고를 준비해 온 것이다. 마침내 교사들은 충북교육에 최적화된 교육과정의 설계도를 내놓았고, 산고 끝에 교육부의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

가르칠 교사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열정을 다해 학교의 교육철학과 교육과정을 만들고, 교육공간을 설계하고 대한민국 교육부의 승인을 얻어낸 것이다. 이런 경우는 17개 시도교육청 어디에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같은 학교를 개교할 수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 공교육에 있어 신기원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며 충북교육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개교를 미루고 교육과정을 새로 짜겠다고?

그런데 충북교육청은 느닷없이 개교 10개월을 앞두고 단재고의 개교를 2025년 3월으로 1년 미루겠단다. 만들어진 교육과정을 손보겠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새로운 교육과정 TF'를 만들겠단다. 기존에 단재고 개교를 준비하고 있던 교사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배제를 당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계획이다. 
 
충북교육연대는 17일 도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단재고의 2024년 개교를 촉구했다.
 충북교육연대는 17일 도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단재고의 2024년 개교를 촉구했다.
ⓒ 충북교육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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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청이 단재고의 교육과정을 새로 짜겠다는 가장 큰 이유는 단재고 학생들의 대학 선택폭이 좁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란다. 교사들이 설계한 단재고의 보통교과가 국어, 사회, 한국사뿐이고 이 세 과목의 단위(시수)도 13단위밖에 되지 않아 학생들이 대입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관련 기사 : 다 만들어놓은 단재고 교육과정, 개교 연기하고 다시 짠다는 충북교육청).

나는 이 우려에 대해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얼마든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따위의 구구절절한 반론을 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대학입학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현행 일반고의 경우라면 몰라도 그것이 단재고가 교육과정을 새로 짜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시경쟁교육보다는 자신이 삶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배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를 지향하는 단재고의 교육과정에서 대학입시는 그렇게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없다(대학에 가서는 안 된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시라).

단재고는 대학입시보다는 행복한 삶과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교육과정에 특화되어 있는 공립형 대안학교다. 괜시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욕심은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단재고 3년을 충실히 겪은 아이들이라면 제 앞가림 할 줄 알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능히 지혜롭게 해나갈 수 있는 내적 근육이 단단해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교육과정 TF'를 만들겠다는 교육청의 계획에도 동의할 수 없다. 새롭게 팀을 구성한다는 건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기존에 개교를 준비하던 교사들은 그동안 대안교육 교사로서의 소양을 다양하게 갖춰온 사람들이다. 매월 모여 연수를 진행했고 방학엔 며칠씩 공동체 연수를 했다.

여러 교사가 몇 개월씩 해외연수를 다녀왔으며 대안교육을 주제로 연구년 연구를 수행했다. 이런 교사들을 놔두고 '새로운 교육과정 TF'를 구성하겠다는 건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얘기다. 이건 지난 5년간 열정과 헌신으로 오직 단재고의 개교 준비에 매진해 온 교사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단재고 건물도 걱정이다. 건물은 현재 162억 예산을 투입해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청 얘기대로 개교를 1년을 미루면 완공된 건물을 공실로 방치하게 되어 예산 낭비 문제가 발생한다. 또,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육과정을 실현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교사들은 오랜 시간 연구를 통해 단재고의 공간 설계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바꾼다면 정교하게 설계된 교육과정과 교육공간의 조화가 어그러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동안 정성을 다해 곳곳에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까 우려스럽다.

교육청이 공식적으로 표명한 개교 연기나 교육과정 수정, '새로운 교육과정 TF' 도입 등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표면적인 이유 말고 다른 이유, 예를 들어 설계된 단재고의 교육과정이 교육청이 추구하는 교육철학과 차이가 있다거나 준비팀 교사들의 교육적 소양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면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확인하고 간극을 좁혀 나가는 노력을 하면 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교육문제를 교육의 관점이 아니라 진영논리 같은 정치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이것은 가장 비교육적인 처사가 될 것이다. 아무쪼록 교육청이 공개적인 대화와 토론으로 이 문제의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경쟁 패러다임을 넘어서 미래교육과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경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일은 심대한 시대적 과제다. 경쟁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Winner takes it all)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는 승자의 전유를 정당화하는 논리다. 대학은 서열화되었고 소위 상위권 대학의 학벌을 얻어야 좀 더 많은 돈과 권력에 가까워진다. 그러하기에 어려서부터 기를 쓰고 시험 잘 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마치 '공부'인양 '학교-학원-집'의 쳇바퀴를 돈다.

이 경쟁에서 패배를 경험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깊은 좌절과 낮은 자존감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참담하게도 2022년 OECD '아동·청소년 삶의 행복도' 조사에서 대한민국이 꼴찌다. 교육이 나서야 한다. 교육의 역할은 이 '경쟁 패러다임'을 넘어서 서로 협력하며 공존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단재고의 교육철학인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과 이 철학을 실현하는 교육과정으로 '스스로 배움의 주체가 되어 삶의 맥락 속에서 배우는 프로젝트, 인턴십 등'은 미래사회의 성숙한 민주시민의 소양을 갖추는 바람직한 미래교육과정이다. 이것은 권위 있는 국제기구들(OECD, 유네스코 등)의 공통된 미래교육의 방향이기도 하고, 단재고의 교육과정이 많은 교육전문가들부터 호평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래교육의 진화 방향

나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통찰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구한 세월 생명의 진화과정은 (항간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약육강식의 논리처럼 힘센 종들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잘 적응한 종들이 살아남은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생명 진화에는 특정한 목적이 없으며 그 방향은 더 높거나 고등하거나 복잡한 곳으로가 아니라 생명 다양성의 확장이었다는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의 마지막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진화를 통해 형성된 '다양한 종들(endless forms)',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most beautiful and wonderful)' 세계는 이 지구별 진화과정의 진실이다.

인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한 처지와 입장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인류진화의 방향이라는 얘기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천편일률의 입시경쟁교육을 넘어서 각자의 관심과 소질을 잘 발현하는 다양한 개인들이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미래사회 교육의 진화방향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아이들의 다양한 개성이 빛날 수 있는 천 개, 만 개의 학교와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단재고 96명의 아이들에게 96개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듯이.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치열씨는 충북대안교육연구소 대표, 충북대안교육연구회 자문위원입니다. 대안교육연구회는 그간 단재고 설립과 관련된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해 왔습니다.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중복 게재되었습니다.


태그:#단재고등학교, #공립형 대안학교, #미래교육,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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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안교육연구소 대표. 충북대안교육연구회 자문위원. 대안교육, 전환기교육, 마을공동체교육 관련 교육, 연구, 컨설팅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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