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동, 그날


[ 5·18 특집 ]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은 전쟁터와 다르지 않았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5월 21일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은 곳곳에서 집단 총격과 학살을 저질렀다. 특히 송암동 일대에선 무차별 사격, 오인교전(friendly fire), 보복학살 등으로 인해 만 11세 초등학생을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최근엔 현장에 있던 계엄군의 추가 학살 증언도 나왔다.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30분경 11공수여단이 송암동 일대를 통과한다. 앞서 11공수여단은 병력 재배치 명령에 따라 광주-화순 도로 봉쇄지를 20사단에 인계하고 이날 오전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송암동,
그날의 재구성

무차별 사격

5.18 직후 11공수여단이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전투상보)'에 따르면, 군용트럭 54대(2½톤 42대, 1/4톤 10대, 3/4톤 1대, 5/4톤 1대)와 APC(병력수송장갑차) 2대(선두와 후미 각 1대씩)가 줄지어 이동했다.
효덕초 삼거리를 지나던 선두 장갑차 병력은 시민군을 발견하고 총격을 시작했다.

"1, 2초 서로 주춤했고 정적이 흘렀다. 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갑차가 후진하더라. 그 틈에 제가 '군인이다, 피해라'라고 소리쳤다. 길 건너 집으로 도망치는데 '두두두' 소리가 들렸다. 장갑차가 다시 전진했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 시민군 최진수의 진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9년 2월)

11공수여단 후방 병력의 무차별 사격으로 진제마을 인근 '한씨 선산'에서 전재수(11)가 사망했다. 총소리에 도망가던 중 형이 사준 새 고무신이 벗겨져 이를 주우러 가다가 온몸에 총을 맞았다.

전재수의 검시조서 및 사체검안서엔 끔찍했던 그날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우측늑골 하부에서 좌측늑골 하부 부분으로 관통총상 ① 우복부 0.5cm×0.5cm 사입구와 좌복부 7cm×5cm 사출구 있는 관통총상 ② 후대퇴부 0.5cm×0.5cm, 2cm×1cm 사입구와 (후대퇴부) 6cm×10cm 후하퇴부 6cm×3cm 사출구 있는 관통총상 ③ 좌대퇴부 골절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갔더니 동생이 엎어져 있었다. 뒤집었는데 아랫배가 휑하니 싹 다 없어져버렸고 풀밭이 피로 물들었다. 도롯가로 나와보니 탄피가 쫙 깔려 있었다."
- 전재룡(전재수의 형) <오마이뉴스> 인터뷰(2023년 3월)

친구들과 원제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학생 방광범(12)도 총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방광범의 검시조서를 보면 그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음을 알 수 있다.
두부관통 총상 (두개골 좌측이 떨어져 나감)

"효덕초 인근에서 먼저 총소리가 났다. 그 순간부터 군인들이 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했다. 방광범 선배님이 내 옆에 있었는데 순간 외마디 '으' 하는 소리만 들렸다. 광범이형은 위쪽을 맞아서 얼굴이 날아가 버렸다."
- 안용남(방광범의 마을 친구)씨 진술, 광주 남구청 구술 채록(2021년 5월)

오인교전
friendly fire

금당산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보병학교 교도대)가 송암동을 지나던 11공수여단을 공격했다.

교도대는 90mm 무반동총으로 11공수여단 선두 장갑차를 공격하는 등 집중 사격을 이어갔고, 11공수여단 또한 이에 대응하며 서로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11공수여단 9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다쳤다.

"장갑차에 (90mm 무반동총을) 세 발인가, 네 발인가 맞았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나의) 철모가 벗겨져 바닥의 핏물, 내장 위에 떠 있었다. 철모를 주워 도롯가 도랑에 복지부동으로 있었다. 조◯◯ 중령은 팔이 떨어져 껍질만 달랑달랑했고 (차◯◯ 대위 등) 나머지는 거의 토막 살해가 돼버렸다."

"1시간 정도 지나니 전방에서 '사격을 중지하라, 사격을 중지하라' 소리가 들렸다. (오인교전(friendly fire) 종료 후) 나중에 보니까 2½톤 트럭은 벌집이 돼 있었고 바닥의 탄피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 특전사 K(당시 선두 장갑차에 탑승) 2023년 3·4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오인교전(friendly fire) 후 민간인 학살

오인교전(friendly fire) 후 가택수색에 나선 11공수여단은 단지 젊다는 이유로 권근립(24)·임병철(23)·김승후(18)을 끌고 나와 사살했다.

"군인들이 집으로 들어와 방, 화장실까지 다 뒤지고 장롱의 이불까지 다 꺼내 난리를 쳤다. 큰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열어 담배, 라이터, 시계 같은 것을 가져가버리고 다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 김금순(권근립의 어머니)씨 진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9년 1월)


"우리 아들(권근립)과 김승후, 임병철이 밖으로 끌려 나갔죠. (나중에) 우리 영감하고 나하고 아들을 찾으러 나갔는데 철둑 넘어 바로 근처에 김승후란 사람은 쭉 뻗어 있대요."


김승후의 검시조서 및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여러 발의 총알이 그의 몸을 관통했거나 몸에 박혀 있었다.

① 흉부 관통총창 : 사입구 우흉배부(0.5cm×0.5cm) 사출구 흉부(4×7cm) ② 우흉배부에 0.5cm×0.5cm 맹관총창 2군데 존재


"신작로 저 건너 넘어가서 보니까 고랑에서 우리 아들은 손이 끊어져서 덜렁덜렁하고 등을 맞았는지 피를 흥건히 흘리고..."


권근립의 검시조서 및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수많은 총상과 찢긴 상처가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① 흉부 관통총창 : 사입구 우상흉부(0.5cm×0.5cm) 사출구 좌하흉부(1cm×1cm) ② 우상박부 관통총창 : 사입구 우상박외측부(0.5cm×0.5cm) 사출구 우상박내측부(8cm×12cm) ③ 좌복측부 맹관총창 ④ 팔꿈치관절하부 열창


"병철이란 사람도 (우리 아들이랑) 똑같이 엎어져 있었다. 신작로 철둑 고랑에디 우리 아들, 병철이, 승후... 거적때기 깔고 덮었다. 그날까지 비가 와서 바람 들어가면 안 된다고 덮어놓고 밤을 꼬박 새웠다." - 김금순(권근립의 어머니)씨 진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9년 1월)


임병철의 검시조서 및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총알이 그의 몸통을 그대로 관통했다.

흉부 관통총창 : 사입구 우견갑상부(0.5cm×0.5cm) 사출구 좌배흉하부(5cm×10cm)

아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광주 시내 쪽으로 이동하던 박연옥(49)은 고랑에 숨었다가 '나오라'는 군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박연옥의 검시조서에 따르면, 총알이 그녀의 하반신을 관통했을 뿐만 아니라 복부에 박혀 있기도 했다.
복부 맹관총상, 회음부 관통총상

"제가 직접 본 것은 당시 제가 총격을 받기 전에 저의 앞 15m 전방에서 하수구로 몸을 피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박연옥..." - 김행남(당시 총상)씨 진술, 서울지검 조사(1996년 1월)

효덕초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살레시오고 2학년 김평용(18)은 발목에 총을 맞고 대검으로 몸과 팔을 찔려 숨졌다.

김평용의 검시조서엔 그가 발목에 총을 맞고 상체를 여러 차례 찔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좌우족관절부 통총상, 우측늑골부·우측상박부 자상

광주에 사는 자녀를 피신시키던 영암초등학교 교감 송정교(50)는 효덕초 앞에서 피습당해 입원 중 사망했다.

송정교의 검시조서엔 그가 여러 차례 무언가에 찔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측늑골하부·우측견갑부 자상, 우측대퇴부 찰과상

"11공수여단의 무차별 사격으로 저는 길 건너 집 안방에 제일 먼저 들어갔고 이후 박◯◯씨가 들어왔다. 이후 총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가 40분 정도 들렸다. 그러더니 얼마 후 '사격중지, 사격중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군은 그때야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군인들이 집을 에워싸는 중이었다. 순간 망설였다. 총을 꺼내려고 하자 (집주인) 이◯◯ 어르신이 '옆방에 아이들이 있으니 쏘지 말라. 지금 쏘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죽는다'고 그러셨다. 순간 정말 많이 고민했다."

영화 <송암동> 스틸컷 이미지

"손들고 나오라고 하더라. 제가 가장 먼저 방문을 열었고 손을 든 채 한 발짝 밖으로 나갔다. 예전 시골집엔 마루 아래 디딤돌이 있었다. 그 디딤돌을 딛는데 순간적으로 '먼저 나가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1, 2초 망설이는데 김군이 손을 든 채 제 오른쪽으로 먼저 내려갔다. 저도 그 옆으로 내려갔고 박◯◯씨는 제 왼쪽 뒤편에 있었다. 부사관 한 명이 에워싼 특전사들 틈을 뚫고 와서 '뭐야 이 새끼는' 하면서 김군의 관자놀이를 바로 쏴버렸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 시민군 최진수 <오마이뉴스> 인터뷰(2023년 4월)

영화 <송암동> 스틸컷 이미지

'김군'과 이◯◯의 집에 숨어 있던 최진수·박진우씨, 인근에 숨어 있던 최영철·이재남·이강갑씨는 도롯가로 끌려 나와 심하게 구타당한 뒤 연행됐다.

"개머리판으로, 군홧발로 찍어버리고 쓰러지면 깨워서 다시 때리고. 너무 심하게 맞으니 거듭 기절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최소 한 시간 이상이었다."

"국군통합병원 헬기장에 내리니까 특전사들이 양쪽으로 도열했다. 100여 명이 50m 정도 줄지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로 우리 4명(최진수·박창호·최영철·이재남)을 통과시키더니 무자비하게 구타하더라.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쓰러지면 밟아버리고. (오인교전(friendly fire)으로 인해) 자기 부대원들이 사망했으니 분풀이했던 것 같다."

"6월에 수사가 시작됐다. (효덕초 삼거리에서 우리가) 먼저 총을 쐈는지 추궁했다. 우리가 먼저 총을 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인하니까 조지기 시작하더라. 고춧가루(를 이용한 고문)부터 해서 정말 많이 맞았다. 포승줄에 묶여 부대 내 식당으로 끌려가 곡괭이로 엄청나게 맞았다."

"수사관들 입장에선 (오인교전(friendly fire)으로 인해) 군인들이 상당히 사망했으니 우리가 먼저 총을 쏜 걸로 만들려는 것 같았다. 너무 많이 맞으니까 '방아쇠는 당겼는데 안전핀을 풀지 않아 발사가 안 됐다'고 허위로 진술했다." - 시민군 최진수 <오마이뉴스> 인터뷰(2023년 4월)

그 밖의 총상 및 연행

진제마을과 효덕초 사이에 살던 노득기(34)는 점심을 먹은 뒤 집에서 쉬던 중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약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효덕초에서 친구들과 놀던 김문수(효덕초 5학년)도 총소리를 듣고 숨어 있다가 등에 총상을 입었다.

윤영화(37)는 효덕초에서 인성고 인근으로 이동하던 중, 김영묵(65)·최철진(38)는 벽돌공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김행남(39)씨는 농장에서 일하던 중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김재명(31)·이용수(33)도 인성고 인근에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서호열(26)은 광주대 인근 집에서 점심을 먹던 중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개머리판으로 맞은 후 연행됐다.

특전사 K의 증언

11공수여단 장갑차 선두에 타 있던 특전사 K는 오인교전(friendly fire) 및 가택수색 직후 벌어진 새로운 집단 학살 사건을 2021년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증언했다.

"(계엄군들이) 주위에 가서 젊은이들을 막 잡아 왔어요. (잡혀 온 사람들은) 포승줄에 묶여서 고랑에 엎드린 사람도 있었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고요."

"(계엄군) 몇몇이 엎드린 사람들 등 위에 올라가 쭈그리고 앉아서 대검으로 조샀어요. '내 전우를 죽여?' 그러면서 대검으로 등을 콕콕 찌른 거죠."


"묶인 사람들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랬고요. 근데 갑자기 H 소령이 나타나서 '야, 비켜 비켜' 하더니 탕탕탕. 고랑에 엎드린 사람들도 탕탕탕, 서 있는 사람도 그대로 탕탕탕."
- 특전사 K <오마이뉴스> 인터뷰(2023년 3·4월)


고 전재수
고 방광범
고 권근립
고 임병철
고 김승후
고 박연옥
고 김평용
고 송정교
고 '김군'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 일대에서 숨진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수많은 부상자와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위로를 전합니다.



글 : 소중한 · 인터랙티브 제작 : 이종호
위성사진 : 국토지리정보원·OpenTopography
트럭모델링 : Brout / 장갑차모델링 : nemaalingat1359

후원연재[5.18 특집] 송암동
이 연재를 후원해 주세요!

2023.05.27까지 목표금액 30,000,000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