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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왠지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명백하게 단백질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날 말이다. 그런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으니 바로 '몸이 허하다'이다. 사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며칠 동안 체중이 68킬로그램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이다. 원래 70킬로그램을 살짝 넘었는데 식사량 조절을 통해 감량에 성공했다.

걷잡을 수 없는 단백질에 대한 탐욕은 아마도 꾸준한 식사량 감소를 감지한 뇌의 강력한 반발이 아닌가 싶다. 감량을 결행한 것도 뇌(의식)고, 몸이 허하다며 고기 섭취를 재촉하는 것도 뇌(무의식)다. 둘 다 나라는 존재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요소인데, 과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무의식과 의식의 각축 끝에 대략 300g의 고기를 섭취하는 걸로 타협했다. 스마트폰 배달앱을 만지작거리다가 타이밍 좋게 눈에 띈 건 B마트에서 판매하는 한돈 냉장 등심덧살(가브리살) 포장육이었다.

이럴 때면 스마트폰이 뇌와 링크되어 있나 싶어 놀라게 된다. 소고기가 노출되지 않은 걸 보면 내 호주머니 사정까지 꿰뚫고 있다는 얘긴데. 미쉐린 가이드에도 선정된 맛집의 고기를 주문하고 삼십 분 안에 배달로 받을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구나.

예전에는 어떻게 술 없이 고기를 잘도 섭취했을까? 와인에 맛을 들인 이후 술 없이 고기를 먹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서로 잘 어울리는 와인과 음식이 만나면 그 시너지 효과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컬러텔레비전에 눈을 떴는데 흑백텔레비전이 성에 찰 리가 없지 않은가.

술엔 고기, 고기엔 술
 
돼지고기의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 헤매다가 의외의 카테고리(화이트와인)에서 찰떡궁합인 녀석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샤르도네다.
▲ 돼지고기와 샤르도네 돼지고기의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 헤매다가 의외의 카테고리(화이트와인)에서 찰떡궁합인 녀석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샤르도네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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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돼지고기에 안성맞춤인 와인을 발견하는 과정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와인에 막 빠져들었을 시기에는 육류라면 당연히 레드와인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레드와인에 한참 빠진 시기였는데, 삼겹살에다가 나파밸리 출신 녀석을 자연스럽게 곁들였다. 응당 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한 점 두 점 세 점 고기를 집어 먹을수록 느끼한 맛에 물리는 것 아닌가.

나파밸리 와인이 대체로 여타 레드와인에 비해 산미가 적고 과실 향과 연유 향, 초콜릿 향이 강한 편이다. 그 특유의 연유 향이 삼겹살의 느끼함과 만나니,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삼겹살에 한 점 먹고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느끼한 맛에 대한 역치가 유독 낮은 나로서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경험이 있고서야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주기 위해서는 산미가 제법 살아 있는 와인이 적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찾아보니 대체로 이탈리아 레드와인들이 산미가 강한 편이라 돼지고기에 추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토착 품종인 산지오베제 포도로 만든 와인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하여 산지오베제 와인을 구해서 돼지고기와 곁들여 마셔보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키안티 지방이 산지오베제의 산지로 유명해 키안티 와인을 선택했다. 확실히 연유 향 뿜뿜하는 나파밸리 와인보다는 돼지고기와 훨씬 잘 어울렸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산도가 높은 특성은 돼지고기와 잘 어울리지만, 뭔가 맛의 중간 부분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축구에서 공격수와 수비수만 있고 미드필더가 없어서 뻥축구를 하는 단조로움이랄까? 신맛(공격)과 타닌(수비)에 비해 여타 요소들이 약해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풍부한 풍미의 고급 키안티 와인들도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높아 가벼운 반주용으로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돼지고기의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 헤매다가 의외의 카테고리(화이트와인)에서 찰떡궁합인 녀석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샤르도네다. 화이트와인의 대표적인 품종이지만 화이트와인에는 해산물이라는 판에 박힌 공식에 얽매여 한동안 육류와 함께 마실 생각 자체를 못 했다. 게다가 갓 와인에 빠져들었던 시기에는 와인하면 역시 레드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화이트와인에 잘 손이 가지 않기도 했고.

샤르도네를 돼지고기와 먹게 된 계기는 와인 관련 앱 덕분이었다. 와인 애호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비노Vivino 앱은 와인을 검색하면 'Food that goes well with this wine'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어서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준다. 마침 구매한 샤르도네 와인을 비비노 앱으로 검색하니 제일 먼저 추천하는 음식이 돼지고기였다. 그렇게 해서 돼지고기와 샤르도네의 궁합을 처음 경험했는데, 키안티 와인쯤은 가뿐하게 제압하는 그 놀라운 시너지 효과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격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능

이제 그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 위해 드디어 B마트에서 주문한 등심덧살이 전면에 등장할 때다. 이게 얼마만의 고기인지. 간만에 불판을 꺼내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서는 손바닥만 하게 썰린 고기들을 한 덩이씩 올려놓는다. 적당하게 익으면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주는데, 어느덧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의 온기를 타고 인절미 콩가루처럼 고소한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피어오른다. 침샘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어느새 입안은 범람 직전의 하천과도 같은 상태다.

일단 고기 자체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해 쌈장이나 소금 같은 외부적 요인을 일체 배제하고 순수한 한 점을 입에 투여한 후 수십 년째 단련한 규칙적 저작운동에 돌입한다. 유명한 음식점의 고기라 그런지 누린 잡내 하나 없이 깔끔하고 고소하다. 냉동이 아닌 냉장고기라서 푸석푸석하지 않고 쫀득쫀득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희한하게도 극미량의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은 은은한 짠맛이 기분 좋게 배어 있다. 따로 기름장이 필요 없을 정도다.
   
시원하게 준비해 놓은 영혼의 동반자는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언오크트 샤르도네 2020이다. 집 근처 홈플러스에서 약 1만 5천 원에 구매했다. 할인하면 9천 원대에 판매하기도 하는 저렴한 와인이다.
 
유리병과 라벨에 새겨진 자전거는 포도를 보호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을 누비는 코노 수르 직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언오크트 샤르도네 유리병과 라벨에 새겨진 자전거는 포도를 보호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을 누비는 코노 수르 직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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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 수르는 칠레 와인 회사명, 비씨클레타는 스페인어로 자전거, 언오크트(unoaked)는 숙성할 때 오크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유리병과 라벨에 새겨진 자전거가 눈에 들어오는데, 포도를 보호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을 누비는 코노 수르 직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뜨끈한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섭취한 후에는 역시 시원한 술 한 잔이 그만이다.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아 신선하고 청량한 과실 향을 그대로 유지한 깔끔한 샤르도네를 한 모금 들이켜자 민트 향 가득한 치약으로 정성껏 칫솔질한 후에나 만끽할 개운함이 구강 내부를 휘돌아 감싼다.

어라? 돼지고기의 특유의 느끼함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되었지? 입안을 헹군 샤르도네가 식도로 내려가며 함께 데려갔구나. 돼지의 둔중한 고소함에 샤르도네의 경쾌한 산미와 풋풋한 꽃향기가 어우러져 마치 보슬비 온 뒤 산 중턱에 걸린 안개처럼 서늘하게 구강 내부를 감도는데, 과연 미각의 절경이구나 싶다.

그나저나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언오크트 샤르도네, 이놈 물건이네. 별로 기대하지 않고 마셨다가 가격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능에 눈이 동그래졌다. 저가 샤르도네에서 종종 감지되는 쓴맛이나 인위적인 조작 느낌도 없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데다가 맛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최근 마셨던 1만 원대 화이트와인들이 대부분 실망스러웠는데 이 녀석은 그야말로 5만 원짜리 로또에 당첨된 정도의 만족감을 준다. 어쩐지 그동안 샀던 로또가 모조리 꽝이다 싶더니, 이 와인에 당첨되려고 그랬나 보다.

태그:#임승수, #샤르도네, #돼지고기, #페어링, #와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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