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3 20:15최종 업데이트 23.05.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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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고 있다. 2023.5.21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그간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보면 말 위주로 해왔다면, 이번에는 실천을 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일 정상이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함께 묵념을 올린 것은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대통령실의 평가를 무색케 하는 일이 지난 16일 있었다는 점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은 이달 7일 한일정상회담 때 기시다 총리가 공동 참배를 제안한 날로부터 9일 뒤였다.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본 내각의 16일 정례 각의 때 한국인 원폭 피해와 관련된 내각의 공식 입장이 결정됐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쓰지모토 기요미(辻元清美) 참의원 의원이 제출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외국인 원폭 피해 상황의 인식에 관한 질문(広島·長崎における外国人の原爆被害状況の認識に関する質問)'에 대해 답변서를 채택하는 형식으로 그런 결정이 나왔다.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 홈페이지(www.kiyomi.gr.jp)에 따르면, 쓰지모토 의원은 질문서에서 '한국인 피해자들은 식민지배로 인한 징용이나 징병 혹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본에 건너왔다가 원폭 피해를 입었으므로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로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때 기시다 총리가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제안했다.
 
기시다 총리는 각국 수뇌들에게 '일본인 원폭 피해의 비참함'을 호소할 뿐 아니라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원폭 피해 실상'을 정확히 전달해야 핵무기 폐기를 각국 공통의 과제로 만들기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원폭 피해를 입었으므로 피해 실태를 각국에 정확히 알리는 게 일본 국가의 도리다. 쓰지모토 의원이 지적한 것은 그것이다.

그런데 피해 실상을 알리려면, 그 실상부터 제대로 파악하는 게 순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이것을 해놓지 못했다. 80년이 다 되도록 피해자들의 출신국별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 피해자가 7만 혹은 10만이라는 통계가 있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쓰지모토 의원이 요구한 것은 피해자들의 국가별 데이터를 조사하는 작업에 대한 정부의 의견이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물은 것이다. 16일 각의 결정에 따르면, 기시다 내각의 대답은 '노'다.

원폭 피해자에게는 무관심

16일 자 <교도통신> 기사 '원폭 사망자 숫자 재조사 안 해(原爆死者数、再調査せず)'는 "정부는 16일 미군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에 의한 사망자 숫자의 재조사와 관련해 '자료 수집이나 피폭자로부터의 청취가 곤란해지고 있어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서를 각의에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재조사'란 표현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재조사를 안 하겠다는 것은 동일한 조사를 이미 했기 때문에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출신국별 데이터를 조사하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세계 각국 정상들을 불러놓고 원폭 피해를 대대로 강조하면서도, 자료 수집이 어렵다며 피해자 조사를 거부했다. 피해자의 출신지에 대한 조사를 거부하는 것은 외국인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기시다 총리가 각의 결정을 내린 것은 윤 대통령에게 '함께 참배하자'고 제안한 뒤였다. 한국인 피해자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명확한 거부 표시보다는 다소 모호한 거부 표시를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윤 대통령의 방일 이후로 공식 결정을 미뤘을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을 초대해놓고 이처럼 명쾌하게 거절한 것은 강제징용(강제동원)뿐 아니라 원폭 피해에 대해서도 성의를 표시할 의사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두 정상이 참배한 위령비는 1970년에 건립됐지만, 오랫동안 평화기념공원 밖에 방치돼 있었다. 주된 원인은 일본 정부의 한국인 차별정책이었다. 비석이 안으로 옮겨진 것은 1999년이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경성제국대학 예과(고교과정)에 다닌 적이 있는 히라오카 다카시(平岡敬, 1927~ ) 당시 히로시마시장이다.

지난 15일 <동아일보> 특파원과 인터뷰한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본은 원폭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말했다. 일본이 가해자인 한 가지 이유는 쓰지모토 의원의 질의에서도 나타났다.

또 다른 이유에서도 일본은 가해자다. 자국 영역에서 발생한 인명손상에 대해 국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책임의식을 발휘해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일본은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 국민에 대해서도 국가배상책임이 아닌 시혜적 조치를 베풀고 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자국민 피해자와 한국인 피해자를 차별하기까지 했다. 한국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시효가 경과했다느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났다느니 하는 억지 주장을 폈다. 한국인 피해자 중에서도, 일본에 남은 피해자보다 한국으로 돌아온 피해자를 더 차별했다.

2015년에 최고재판소가 '한국인 피해자에게 치료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판결하긴 했지만, 이것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국가배상책임에 입각한 사과와 배상이 당연히 필요하다. 또 피해자 2세에게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도 폐기해야 한다. 과학자가 아닌 이상 원폭 피해의 유전 사실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가 유전됐으리라는 전제하에 일본 정부가 '인과관계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기시다가 이런 사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당장에 사과·배상은 못 할지라도 한국인 피해자들이 겪은 차별과 시련에 대해 입장 표명 같은 것은 했어야 마땅하다. 대통령실 홈페이지의 동영상에 따르면, 한일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공동참배와 관련해 그가 한 말의 전부는 이렇다.
 
조금 전 윤 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양국관계에서도 그리고 세계평화를 바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담 후에 다른 정상들과 합류해서 평화기념자료관을 함께 방문하고 평화기념공원 위령비에 함께 기도를 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시다가 공동참배를 통해 얻고자 한 메시지는 다른 나라 정상들과의 공동참배 때 어떤 말을 했는지에서 쉽게 드러난다. 윤 대통령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도 여기에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인 21일 자 <산케이뉴스> '초대국이 원폭자료관 방문 ··· 수상, 비참한 실상 설명(招待国が原爆資料館訪問 首相、悲惨な実相説明)'은 기시다가 각국 정상과 함께 원폭자료관을 방문하거나 위령비에 헌화한 일을 보도하면서 "원폭의 비참한 실상에 대한 이해를 넓힐 목적으로 수상이 직접 관내를 안내하고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일본도 피해자라는 메시지

전범국 일본이 대놓고 전쟁 피해국을 자처하기는 힘들다. 원폭 피해를 당했어도 마찬가지다. 원폭 피해 참상을 소개하면서 세계평화를 역설하는 것은 일본이 눈총을 덜 받으면서 자국의 피해를 강조하는 간접적 방법이다.

기시다가 그런 방식을 통해 던진 것은 '우리도 피해자'라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전범국 이미지를 탈피하고 군사대국화를 자유롭게 추구하려는 열망이 이 같은 피해자 흉내내기에 담겼다고 할 수 있다. 피해자들의 신원과 출신지를 파악하고 이들을 도우려는 노력은 게을리하고 자국이 피해국이라는 점만 은근히 강조하고 있으니, 흉내내기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한국 정상 앞에서 책임지는 가해자의 자세를 보여주려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건네고자 한 것 역시 '우리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는 물론이고 한국인 원폭 피해 문제에서도 기시다 내각이 무성의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참배한 것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우리 총리님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기억될 것입니다"라고 아름답게 평가했다.

그런 뒤 기시다 총리가 이달 7일 한국에 와서 '가슴 아프다'고 말한 일을 상기시키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총리님의 용기와 결단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지난 16일에 "우리 총리님"이 공식 결정한 사안을 고려해 보면,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해 줬는지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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